29.
이강의 작업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쥴스는 끊임없이 이강을 구박하고 투덜거리고 있었고 이강과 쟝은 그 말을 노래처럼 들으며 스케치북을 보고 있었다.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어. 내년이면 은퇴하시겠다고 하던데.”
“너 없는 동안 2번이나 사표 내셨어. 내가 잡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너는 몰라.
―두 사람, 내 얘기는 우리나라 말로 해.
―네, 쥴스. 죄송합니다.
이강은 빨리 사과를 하고 쟝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무튼 눈치 하나는 귀신이다. 작고, 마르고 완전 꼼꼼한 인상의 할아버지인 쥴스는 16살 때 공장 청소부로 입사를 했다고 했다. 그 후에 어깨너머로 혼자 바느질을 배우고 연습하고 노력해서 장인의 자리까지 올라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강은 쥴스를 존경했고 그의 투덜거림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내했다. 그의 옷을 그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내는 데는 쥴스 이상의 솜씨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쥴스 좀 쉬세요.
―옷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쉬란 말이 잘도 나온다.
―죄송해요.
―거짓부렁. 니가 정말로 미안하면 옷을 또 이딴 식으로 안 만들지. 재단하고 본 만들어서 규칙대로 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이건 뭐, 잠깐만 딴 데 신경 써도 흐트러질까 봐 숨도 제대로 못 쉬겠고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있어야지.
―대충하세요. 쥴스 솜씨면…… 죄송합니다.
이강의 말에 쥴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날아와 박혔다. 눈빛에도 죽을 수 있다면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회의한다고 모인 것들이 입 다물고 잘도 하겠다.
이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쥴스를 이길 수 있을까, 그의 아버지인 베르기가 와도 기 하나 안 죽고 자기 할 말 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쥴스는 자신의 기술에 자신이 있는 거고 이강은 그런 쥴스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서울 단독 패션쇼, 이사회에서 오케이 떨어졌어. 몇몇 브랜드는 조인하고 싶다는 의사도 표명했고.
―그렇군.
―뭐야, 이 반응. 왜 안 놀래?
―네가 추진해서 안 되는 일이 있었어?
―이번엔 나 아니야. 안드레아가 엄청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사회에선 아무래도 나보단 안드레아의 입김이 더 세니까. 확실히 오너 아들이란 타이틀이 대단해. 근데 윤주 씨랑 안드레아랑 만났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드레아는 되게 무시무시한 여자라고 하더라.
쟝의 말에 이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안드레아가 그렇게 말할 만하다. 그날 윤주는 그도 깜짝 놀랄 만큼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따지고 들었으니까.
―안드레아 보고 머리가 나쁘다고 했어.
―뭐? 안드레아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어?
―아마 넋이 나가서 아무 말도 못 했을걸? 윤주가 안드레아의 패션 감각을 훈계하며 그 답답한 재킷과 과한 액세서리들을 전부 제거해버렸거든.
―와우, 브라보. 나 윤주 씨 응원할래.
쟝은 진심인 듯 박수까지 쳤다. 안 듣는 척했지만 바느질 속도가 늦어질 걸 보니 쥴스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 결혼은 할 거야?
―윤주가 결혼 생각이 없어.
―너는, 너는 어떤데?
―글쎄, 평생 같이 있고 싶다. 내 옆에 두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사랑받고, 가끔은 윤주 닮은 딸아이를 가지고 싶다 그런 생각은 해.
―쯧쯧, 멍청하긴, 그게 바로 결혼이라는 거다.
쥴스의 말에 이강이 생각에 잠겼다. 사랑, 결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명제에 이강은 생각이 많아졌다. 윤주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반드시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에 묶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이강의 생각을 나태하게 만들어 버리는 쟝의 한마디가 그의 귀를 때렸다.
―내가 윤주 씨라면 불안할 거 같아.
―내가? 왜?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윤주도 잘 알아.
―그것과 별개로 넌 외국인이잖아. 네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문화에 익숙하다고 해도 넌 이탈리아인이야. 거기다 회사에 복귀하면 언제든 이탈리아로 떠나야 하는데 그게 윤주 씨한테 영향이 없을까?
쟝의 말에 이강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면 윤주가 그대로 믿어주고 그것으로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떠나기 쉬운 외국인이라 윤주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항상 한 발 뒤로 물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을까?
―윤주가 개인적인 일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조만간 차이겠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여자들이 그런 행동을 할 땐 다 이유가 있지, 네가 믿음을 못 준 거야.
쥴스의 말에 빠직, 화가 난 표정을 한 이강이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보란 듯 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만나자는 그의 말에 윤주가 곤란해하는 것 같았지만 꼭 오늘 봐야 한다고 우기는 이강을 보며 쟝과 쥴스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저럴 땐 안드레아와 똑같구나.
―제 말이요. 둘이 아주 똑같이 유치하네요.
결국 윤주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후에야 이강은 의기양양 두 사람을 돌아봤다.
―거 봐요, 우리 윤주는 제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구요.
―아무렴, 그 정도로 사정하는데 모르는 척하면 인간적 도리가 아니지.
―길거리 거렁뱅이도 제 주머니 털어주겠다.
―쥴스!
이강의 고함에 쥴스는 모른 척 바느질에 몰두했고 그사이 쟝은 작업실을 떠나버렸다. 오후가 될 때까지 이강의 마음에는 불안한 바람이 계속 불었다.
* * *
컴퓨터 화면을 보던 나정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녀가 보는 화면엔 몇 년 전 잡지에 실린 아르노 가문의 기사와 가족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쉔브룬? 얍삽한 인간, 성을 바꾸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았어?”
이강을 처음 봤을 때 뭔가 익숙한 듯했다. 그래서 이름까지 확인했던 건데, 이렇게 깜찍하게 속이고 있을 줄 몰랐다.
“돈이 없어서 신세를 져?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아르노 가문은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제국이었다. 세계 명품의 반 이상을 소유한 회사의 소유주이자 경영주이고 베르기 아르노가 세운 왕국이었다.
그 말인즉 이강은 동혁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글로벌 재벌가의 자제란 말이다. 나정은 눈앞이 캄캄했다.
물론 동혁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다. 또 한 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윤주는 못 견딘다.
“혹시 윤주는 아는 건가?”
그녀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볼까 하다가 분란의 불씨를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에 전화를 내려놨다. 알고도 가만히 있기엔 불안했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일이 더 커질 거 같았다.
“차라리 사귀질 말던가. 고백은 왜 해, 고백은. 나쁜 새끼.”
안절부절못하던 나정은 점점 더 화가 났다. 가만히 잘살고 있는 애를 사랑이니 뭐니 왜 들쑤셔서는, 나정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강에게 전화를 걸고 가방과 태블릿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