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28화 (28/44)

28.

이강이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윤주는 아직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20분 정도가 남아있었고 그의 이름으로 예약한 자리에 먼저 도착한 이강이 느긋하게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 감미로운 음악, 숙련되어 보이는 직원들과 깔끔한 인테리어까지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강은 건네진 메뉴를 보며 익숙하게 주문했고 먼저 서빙된 와인을 맛보며 느긋하게 윤주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윤주가 들어섰다. 다른 때와 달리 높은 하이힐에 깔끔하지만 몸의 곡선이 우아하게 드러나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윤주가 그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바지를 즐겨 입는 그녀라 가볍게 캐주얼로 입고 온 이강은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일하고 오는 거 아냐?”

“일 때문에 이렇게 입은 거야. 인터뷰 끝나고 오는 거거든.”

“인터뷰할 때도 이렇게 입은 적 거의 없잖아.”

“오늘 인터뷰한 배우가 좀 까다로워. 상대방도 격식 차려주는 걸 좋아하거든. 마음에 안 들면 하도 애를 먹여서. 밥은?”

“주문했어. 그 배우가 누군데?”

“말해도 모를걸? 당신 우리나라 배우들 잘 모르잖아.”

“말해줘. 누군데?”

“00라고, 얼마 전에 천만 들었던 영화 주인공.”

“아하, 그 남자 배우? 별것도 아닌 게 까다롭게 굴기는.”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자기가 날이 서서 그래? 괜한 신경질 부리지 말고 점퍼나 벗어줘. 나 살쪘나 봐, 이 옷 너무 딱 맞아. 이거 봐, 숨만 쉬어도 표시 나지?”

윤주의 청에 그녀를 훑어본 이강은 별말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감색 블루종을 벗어 건넸다. 윤주가 그의 옷을 입자 딸이 아빠의 옷을 입은 것처럼 소매고 품이고 너무 컸지만 윤주는 재미있다고 웃었다.

“당신 옷 되게 크다, 나는 두 명은 들어가겠다. 이것 봐, 손도 다 가려져. 나 이 옷 맘에 들어. 나 주라.”

“그거 싸구려야, 오래 입어서 낡기도 했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으면 됐지. 나 줘, 이강 씨 새로 선물할게.”

이강은 별말 없이 처음으로 뭔가를 달라고 하는 윤주를 봤다. 하필이면 처음으로 달라고 하는 게 많이 입어 낡은 옷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넌 욕심도 없어? 왜 그런 낡은 잠바를 가지겠데. 다음에 우리 컬렉션 와서 실컷 골라.”

“화, 났어?”

“나한테 처음 달라고 하는 게 그런 낡은 점퍼라서 짜증 났어. 난 조금 더 근사한 걸 주고 싶어.”

“고등학교 때였는데 집에 가는데 갑자기 비가 막 쏟아지는 거야. 우산 사려고 편의점으로 뛰어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점퍼를 벗어 자기 딸한테 씌워주더라. 그게 되게 부럽더라고. 이 옷 보니까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어. 밥 다 먹고 돌려줄게.”

윤주의 씁쓸하고 담담한 목소리에 이강은 아차 싶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할 여자가 아니었는데 신경질을 내는 대신 왜 그러냐고 이유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너는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냐, 사람 미안해지게.”

“미안하면 이거 나 줘. 그럼 용서해줄게.”

“집요한 서윤주. 그 옷 가져, 대신.”

“대신?”

“나중에 다른 옷도 사 줄 거야. 비싼 거, 완전, 대박 비싼 명품, 그때 싫다고 하지 마.”

“당연하지! 나 비싼 거 되게 좋아해.”

과하게 웃은 윤주가 앞에 놓인 생선구이를 크게 잘라 입에 넣었다. 음식을 보기 전까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냄새를 맡고 눈앞에 음식을 보니 참아지지 않았다.

“천천히 먹어.”

“엄청 배고파. 온종일 커피 한 잔 마시고 버텼어. 인터뷰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거기다 이해력은 되게 달린다. A냐로 물었는데 B라고 대답해놓고, 말 자르면 기분은 또 디게 나빠해요. 예상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렸어.”

“이것도 좀 먹어.”

윤주는 이강이 건네주는 고기를 사양하지 않고 냉큼 받아먹었다. 허기 채우기에 급급해 예쁘게 보이는지 마는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입술에는 소스가 묻고 완전 허겁지겁, 볼이 볼록해질 때까지 음식을 가득 입에 넣고 먹는 모습을 빤히 보던 이강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웃던 이강은 윤주가 여러 번 조용히 하라고 하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됐다.

“왜 그래, 갑자기. 미친 거야?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고.”

“미친 게 맞나 봐.”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조용히 하고 얼른 먹어.”

“너 지금 밥 되게 게걸스럽게 먹거든.”

“나도 알거든.”

“근데 그것도 예뻐 보인다. 서윤주, 사랑해.”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음식을 먹는 윤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정말 미친 거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실실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는 그의 눈에는 애정이 그득했다. 괜히 머쓱해진 윤주는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런 모습도 예뻤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이강이 상체를 기울여 기습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볼이 빨개진 윤주가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숨겼고 그 위로 기분 좋은 이강의 웃음이 떠다녔다.

그리고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레아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형과 여자, 형에게, 누구보다 자신과 가깝다고 생각한 형에게 자신도 모르게 여자가 생겼다.

안드레아는 지금 이강에게 여자가 생긴 게 화가 난 건지 아님 여자가 윤주인 게 화가 난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화가 많이 났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삔 거야?

조금 예쁘장한 얼굴을 빼면 키도 작고 몸매도 마른 듯 무난하고 패션 감각도 그럭저럭, 뭐 하나 눈이 확 갈 만큼 뛰어난 구석이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뭐가 좋은지 이강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그 여자를 숭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전형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알콩달콩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식탁으로 누군가 다가왔고 각자 다른 이유로 놀랐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올백으로 넘어간 밝은 갈색의 머리, 선이 고운 잘생긴 얼굴과 대조적인 삐딱한 표정, 행커치프와 스카프로 멋을 낸 딱 맞는 갈색 정장, 커다란 반지 낀 손에 들린 지팡이까지 잡지 화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남자의 복장에 윤주는 입을 쩍 벌렸다.

“와, 대박. 중세 귀족 같아.”

윤주의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이강이었고 안드레아는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팍 쓰며 그녀를 쏘아봤다.

“안드레아, 너 여기 웬일이야?”

―우리말로 해, 우리말로.

“윤주 씨, 인사해요. 이쪽은 내 동생 안드레아. 안드레아, 이쪽은 내 연인 서윤주 씨.”

“안녕하세요, 서윤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윤주는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비웃음이 짙어진 안드레아는 그 손을 무시했다. 안드레아는 계속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주를 보고 있었지만 말은 이강에게 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뭐라고?

―안드레아, 예의를 지켜.

―형이야말로 품위를 좀 지켜. 어디서 이딴 여자를 연인이라고. 입고 있는 옷 꼬락서니 하고는, 최소한 식사 예절이라도 제대로 배운 여자를 만나던가. 품격이라는 걸 찾아볼 수가 없어. 천박해.

윤주는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안드레아의 기분 나쁜 시선에 내밀었던 손을 거둬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안드레아와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고 그 시선에 표정이 한층 사나워진 안드레아였다.

―이 여자가 진짜…….

―자기야, 당신 동생은 기본 예의라는 걸 못 배웠나 봐?

윤주가 아주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했고 두 형제 모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윤주는 자신을 보는 안드레아의 눈을 똑바로 보며 계속 날 선 말들을 뱉어냈다.

―품격? 당신 동생은 말과 행동에서 배어 나오는 진짜 품격을 모르는구나.

―나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야, 누구 앞에서 배움을 논해.

―당신 동생은 머리도 나쁜가 봐, 행간을 못 읽네. 이래서 처음 본 사람한테 예의 없이 외모 지적질을 하면서 품격을 논했구나. 자기는 뭐 엄청 세련된 줄 아나, 1970년대 화보집에서나 볼 법한 복장을 해가지고.

―야! 이, 이게 얼마짜리 양복인데! 내 피부색, 머리색 다 고민해서 고른 색에 핏까지 고려한 완벽한 옷이라고!

―맞아요, 색은 잘 골랐어요. 그런데 밝은색으로 포인트를 줬으면 장식은 줄였어야지. 스카프에 행커치프, 조끼에 양말까지 너무 튀잖아. 거기다 그 회중시계는 진짜 할아버진 줄.

윤주는 자신의 독설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선 안드레아의 스카프를 풀어냈다. 스카프를 없애고 답답해 보일 정도로 꽉 조이는 재킷을 벗기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내 몸에 손대지 마!

―가만히 있지. 나 아주 유능하고 능력 있는 기자이자 스타일리스트거든. 우리나라 유명한 스타들도 나랑 작업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영광으로 알아. 이강 씨, 이 조끼도 좀 벗기자.

―어.

윤주는 이강이 조끼를 벗기는 동안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고 손목에 딱 맞게 떨어진 소매에서 커프스링을 빼 둘둘 말아 올렸다. 재킷 안에 숨겨졌던 멜빵도 풀어 버리고 바지의 커프스도 내려 발목도 가렸다. 온갖 장식을 다 빼고 나자 안드레아는 갑갑함을 좀 벗어버린 듯 편안해 보였다.

―잠깐만 그 머리도 좀 어떻게…….

―머리까지 건드리면 죽여버릴 거야.

안드레아의 강한 반발에 윤주는 두 손을 들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는 안드레아를 위아래로 살피고는 활짝 웃었다.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네. 근사해.

―나의 격식을 다 엉망으로 만들고…….

―이렇게 보니까 되게 잘생겼다, 동생분. 형이랑은 완전 분위기가 다르네. 뭐랄까, 되게 섬세한 조각 같아. 아름다워.

―뭐, 뭐라는 거야.

윤주의 생각도 못한 칭찬에 안드레아의 볼이 붉어지고 당황한 듯 말도 더듬었다. 이강은 처음 보는 안드레아의 쩔쩔매는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고 그 앞에 서 있는 윤주를 바라봤다.

―서윤주예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부턴 약속하고 만나요, 우리. 내가 무례했다면 사과할게요. 이강 씨, 오늘은 동생과 할 말이 많겠죠? 나 먼저 갈게요.

가방을 챙긴 윤주는 일부러 안드레아 보라는 듯 이강에게 살짝 입맞춤하고 자리를 떴고 이강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쭉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던 안드레아는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잔뜩 쌓여있는 물건들, 구경하고 있는 시선들, 마치 전쟁을 치른 듯했다. 안드레아는 손을 흔들며 나가버리는 윤주를 괴물 보듯 보고 있었다.

―형, 저 여자 이상해.

―근사하지?

―아니, 이상해. 근데 저 여자, 내 다리를 한 번도 보지 않았어. 처음이야, 내 다리를 보고 놀라거나 동정하지 않은 사람은.

이강은 반쯤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안드레아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나가버린 문을 물끄러미 봤다.

윤주는 그런 여자였다. 섬세하게 남을 배려하는 여자. 안드레아의 시비에 그녀가 심각하게 나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을 거였다.

안드레아와 똑같이 봐주지 않고 싸운 사람, 그래서 안드레아로 하여금 어색함 또는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 사람, 그게 바로 서윤주였다.

―가자, 형이 데려다줄게.

―근데 형, 내 복장이 정말 그렇게 후져?

―후진 게 아니라 좀 과하지.

―그동안은 한 번도 그런 말 안 했잖아.

―할아버지 같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어.

―형!

웃음을 터트린 이강은 슬쩍 앞서 가버렸다. 안드레아가 다리를 다치고 한 번도 그에게 장난을 쳐본 적이 없는 이강이었다. 이강은 항상 져줬고 그걸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그건 완전히 자신의 죄책감과 편견이 만들어낸 잘못된 생각인 거 같았다.

안드레아를 약 올리듯 앞서가던 이강이 다시 와 동생의 어깨를 껴안았다. 신경질이 난 듯 쳐내는 안드레아였지만 이강은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해, 먼저 말 못 해서.

―……왜 얘기 안 했는데?

―널 너무 사랑해서.

―뜬금없이 무슨…….

―안드레아, 형은 네가 참 좋아. 많이 사랑해.

―왜 그래, 갑자기?

―너한테 이런 말한 지 너무 오래된 거 같아서. 형이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

―비켜, 그딴 말로 빠져나갈 수 없어!

―알았어, 알았어. 형이 많이 잘못했어.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

이강은 어쩌면 오늘을 계기로 안드레아와 또 다른 관계 형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