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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27화 (27/44)
  • 27.

    건물 밖으로 나가는 윤주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강을 발견했을 때는 있는 힘껏 뛰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강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에게 안기는 윤주를 받아 안았다.

    “나 너무 행복해.”

    “나도 그래.”

    “엄마가 아프지 말래.”

    “그럼 잘 먹어야겠네.”

    이강의 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윤주가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윤주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잘생기긴 했나 봐. 엄마가 계속 그 말씀만 하셔.”

    “나 성격도 좋은데.”

    “고마워, 이강 씨.”

    “뭐가?”

    “그냥, 전부. 우리 엄마 손도 잡아주고 놀라지도 않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나란히 걷던 이강이 윤주의 앞을 막아섰다. 수경은 편찮으신 분이 맞다. 똑바로 앉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불편하고 손 하나 움직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말할 때마다 입 모양이 괴기하게 뒤틀렸고 중간중간 침도 닦아드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란 건 아니다. 불편한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건 똑같은 사람의 영혼이었다.

    “당연한 걸로 그런 말 하지 마. 어머니는 그저 편찮으신 거잖아. 당신도 좀 편히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는 여전히 우리 엄마의 건강한 모습에 사로잡혀 있나 봐. 지금의 엄마가 망가졌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니까 참기 힘들었고.”

    “나도 내 동생이 건강히 뛰어다니고 반듯하게 걸어 다니던 모습이 지금과 겹쳐 더 힘들었어. 당신도 그럴 거야.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다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윤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과거에 사로잡혀 계속 현재와 미래를 외면할 수는 없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도망만 갔었다. 우리 엄마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멀쩡한 사람이라고 지금 이 모습은 우리 엄마가 아니란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엄마도 자신도 더 불행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근데 이젠 이강의 말대로 극복해야만 한다.

    “배고프다. 여기 닭갈비랑 막국수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가자, 내가 쏠게.”

    “말만 들어도 맛있겠다. 가자.”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신나게 앞뒤로 흔들었다. 이강은 잠시 상상했던 거 같다, 윤주를 닮은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손그네를 태우고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말이다.

    * * *

    안드레아가 드디어 이강의 작업실에 입성했다. 본사에서 쥴스를 데리고 와야 하는데 안드레아가 그걸 떡하니 막고 나섰다. 자신에게 이강의 작업을 보여주기 전에는 쥴스를 데리고 올 수 없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작업을 보여주기로 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안드레아는 작업실로 올라가기도 전에 건물 앞에서 인상을 확 썼다.

    ―뭐야, 이 후진 동네는?

    ―테오 님께서 원하신 곳입니다.

    ―이 낡은 건물도 물론 형 취향이겠지?

    ―잘 아시네요. 들어가시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좀 불편하실 겁니다.

    ―걱정 마, 계단도 못 올라갈 만큼 병신은 아니니까.

    신경질적인 안드레아의 말에 쟝의 이마에 주름이 쫙 잡혔다. 저렇게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은 그의 마음은 정말 괜찮은 걸까? 제발 이강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목에 걸렸다. 쟝은 불편한 다리로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뒤에서 보조를 맞춰 걸었다.

    ―벌써 봤지?

    ―네.

    ―어때?

    ―그 어떤 때보다 훌륭합니다.

    ―도망가서 그만큼 놀았으면 해내야지.

    안드레아의 빈정거리는 말에 쟝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참고, 인내하고, 어린애라고 봐주고, 이강의 동생이라 이해하고 그 모든 것들이 이젠 짜증스러웠다. 결심한 듯한 쟝이 안드레아의 등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만해라.

    ―뭐라고?

    ―그만 빈정대라고. 테오가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는 없어.

    ―지금 나한테 반말했어? 형이 잘 봐주니까 나까지 만만해 보여? 감히 날 어떻게 보고, 나 아르노 가문의 아들이야. 그리고 네 상사기도 해.

    ―아니, 내 상사는 네 아버지고 넌 나와 직급이 같은 실장이지. 앞으로 내 존중을 바라면 너도 날 존중해.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테오 빈정거리지 마. 그 녀석은 네 형이기도 하지만 나한텐 내 핏줄보다 더 소중한 친구야.

    안드레아에게 일갈한 쟝은 그를 지나쳐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강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안드레아의 유모라는 빈정거림을 별명으로 들을 만큼 그를 봐주지 않았을 거였다.

    이강이 안드레아에게 가진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안드레아는 점점 더 기고만장했고 이강에게 가하는 강압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너도 혼자 설 때가 됐어.”

    혼자 한국말로 중얼거리던 쟝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한국말을 배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강이 하도 배우라고 강요하고 떼쓰고 설득해서 배웠던 건데 이럴 땐 아주 유용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간 쟝이 잔뜩 독이 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안드레아에게 소리쳤다.

    “얼른 와, 빨리 안 오면 안 보여준다.”

    할 말을 다 한 쟝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두고 먼저 올라가 버렸다. 한국말은 잘 못 해도 듣는 건 꽤 하는 편이니까 이 말 정도는 알아들었을 거였다.

    쟝이 작업실에 들어와 느긋하게 이강의 작품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숨이 거칠어진 안드레아가 들어왔다. 다른 때 같으면 의자를 내어주고 물이라도 따라 주었을 텐데, 쟝은 힐긋 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기 앉든가.”

    ―한국말 하지 마. 못 알아듣는다고.

    ―자랑이다. 어머니가 한국분이신데.

    ―우리 엄마 이태리어 잘해.

    ―너 모르지? 어머니 이태리어 하실 때보다 한국어 하실 때 훨씬 더 편하고 깊게 말씀하시는 거.

    ―말도 안 돼.

    ―너도 그랬잖아, 어머니가 너보다 이강과 더 잘 통하는 거 같다고. 그게 모국어의 힘이다. 딴말 말고 저것들이나 봐.

    잔뜩 성이 난 눈으로 쟝을 째려보던 안드레아가 이강의 작업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눈빛이 변한 안드레아는 뭔가에 홀린 듯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나, 하나 차근차근 디자인된 옷들을 볼 때마다 안드레아의 눈에는 경외심이 차올랐다.

    ―내 형이지만 정말 무섭다.

    ―그게 이강의 저력이지.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묶어만 두면 튕겨져 나갈 거다.

    쟝의 말에 안드레아가 심각한 얼굴로 그를 봤다.

    ―무슨 뜻이야?

    ―너도 알잖아. 테오는 자유가 필요한 사람이야. 자유롭지 않으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없어.

    ―그렇다고……

    ―스스로 곁에 머물게 해. 그게 최고의 방법이야. 지금처럼 굴었다간 더더욱 멀어질 거다.

    ―……작품은 이게 다야?

    ―몇 개 더 만들어본다고 했어. 어떤 게 또 나올지 기대되지 않아?

    쟝은 순수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디자인할 때 이강의 약점은 절차에 맞춰 일러스트를 그리고 패턴을 뜨고 재단을 해서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강은 그저 머릿속 생각을 즉석에서 토해내며 최고의 작품을 보여주지만 두 번 다시 똑같은 걸 만들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대중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고급 시장에선 그것이 강점이고 또 큰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번엔 프레타포르테인데, 시간이 더 걸리지 싶다.

    ―형이 제일 싫어하는 작업이네.

    ―맞아, 그래서 테오는 회사 생활에 안 맞을지도 몰라.

    아무튼 이강의 예술작품 같은 옷을 본 두 남자는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안드레아는 이 작품들이 런웨이를 누비는 상상을 이미 머릿속으로 하고 있었다. 옷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무대를 만들고 세계 최고의 모델들을 섭외하고 작품들을 더 빛나게 만들 자신 있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근데 쟝, 옷이 좀 작아 보이지 않아?

    ―피팅 모델이 좀 작았어.

    ―모델 섭외를 어떻게 한 거야?

    ―직접 했어, 네 형이.

    ―뭐?

    ―다 봤지? 3일 안에 쥴스 모시고 와. 가자.

    쟝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길게 이야기해 봐야 어떤 모델이냐, 어떻게 섭외한 거냐, 등등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댈 게 뻔했다.

    먼저 나가버린 쟝을 쏘아보던 안드레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뭔가가 들어왔다.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는데 그 안에는 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윤주가 활짝 웃으며 누군가를 향해 팔을 뻗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건…….

    안드레아는 빠르게 이강의 작품들을 훑었지만 여자가 입은 드레스는 없었다. 저기 남아있는 작품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완벽한, 그야말로 걸작인데 그게 없었다. 안드레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윤주의 얼굴로 향했다. 누군가를 보고 활짝 웃는 여자, 저 미소는 절대 비즈니스도 아니고 거짓으로 꾸며낸 것도 아니었다.

    ―설마, 아니겠지.

    사진을 구기려던 안드레아는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 그 사진을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형이 직접 섭외했다는 피팅 모델, 딱 봐도 전문 모델은 아니다. 형에게 알아내야 할 신변의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감히 나에게 비밀을 만들다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잠시 수그러들었던 집착이 배가 되어 치솟는 안드레아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강은 예전과 달리 윤주의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을 했고 그가 있는 윤주의 일상도 별 탈 없이 흘러갔다. 이강은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주말이면 윤주와 함께 수경을 찾아가기도 하고 저녁이면 잠깐 짬을 내 그녀와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웬만하면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외부 인터뷰가 있다며 저녁만 같이 먹으면 안 되냐고 문자가 왔었다.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이는 문자에 잠시 생각이 많아진 이강이었다.

    “내가 아직도 많이 어렵나?”

    분명 그를 위한 배려였지만 가끔 그녀의 배려가 거리감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좋다고 문자를 보낸 후 그녀가 기다리지 않도록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출발한 이강이었고 그 뒤를 안드레아가 탄 차가 은밀하게 뒤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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