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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26화 (26/44)
  • 26.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윤주가 일어나기도 전에 부지런을 떤 이강은 아침상까지 차려놓고 그녀가 외출할 준비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윤주는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이강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싫다는데 꼭 이렇게 따라와야겠어요?”

    “어.”

    절대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한 대답이었다. 항상 그녀의 사정을 먼저 배려해주던 평상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보려던 윤주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설득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30분 후에 출발해요.”

    윤주는 그 말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갔고 이강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우길 자신은 없었는데, 끝까지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넘어가 줬다.

    수경에게 가는 내내 윤주는 운전에만 집중한 듯 말이 없었고 이강도 가만히 있었다. 입을 꼭 다물고 불편한 표정의 그녀가 시한폭탄 같아서 섣불리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반짝이는 가로수의 잎들은 너무 아름다운데 그들이 타고 있는 차 안은 냉랭하게 찬바람만 불고 있었다.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윤주가 병원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말했지만 우리 엄마 뇌경색 후유증으로 치매를 앓고 계세요. 요즘엔 정상이실 때보다 그렇지 않으실 때가 많으셔서, 날 못 알아보실 때가 많아요.”

    “알고 있어.”

    “그래도 우리 엄마 여전히 고우세요.”

    “윤주 씨는 엄마 닮았어?”

    “많이 닮았어요. 성인이 되고 엄마랑 같이 다니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자매로 오해받은 적도 많아요.”

    “윤주야, 긴장하지 마. 나 무리해서 어머니 뵙겠다고 안 할게.”

    윤주는 긴장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되면 존댓말을 쓰며 뒤로 확 물러난다. 아무래도 그게 자신의 방어기제 같기는 한데 이강은 자신에게 만큼만은 안 그래주길 바랐지만 강요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 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윤주는 계속 이강을 외면한 상태였다.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린 윤주는 뒷좌석에서 사 놓은 물건들을 꺼내 들었고 이강은 옆에 서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갔다 올게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엄마와 충분히 시간 보내.”

    “으응, 조금 있다 봐요.”

    이강은 윤주의 어깨를 쓰다듬어 줬고 무슨 뜻인지 모를 시선으로 잠시 그의 얼굴을 보던 그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윤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있던 이강이 둘레둘레 주변을 둘러봤다.

    “풍경 하나는 끝내주네.”

    병원을 보호하듯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과 앞을 흐르는 개울물, 잔뜩 심어진 나무들과 그사이에 놓여있는 벤치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셔 심호흡하던 이강은 가까운 곳에 놓인 벤치에 가 앉았다.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이었다.

    “낮잠이나 자자.”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다. 솔직히 윤주의 어머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그녀와 닮은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치매가 걸렸어도, 윤주를 못 알아보는 모습도 다 괜찮은데 윤주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강은 의자에 편히 기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작업실을 벗어나 좋은 공기를 마시며 일광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중이었다.

    수경의 병실로 향하는 윤주의 마음은 그 어떤 때보다 무거웠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의 엄마를 직면하게 될까, 혼자 두고 온 이강은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작정 수경에게 그를 소개할 수는 없었다.

    병실로 향하는 윤주의 눈에 혼자 정원을 서성이는 그가 보였다. 그를 잠시 보던 윤주가 수경이 병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엄마, 나 왔어.”

    윤주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휠체어에 앉아있던 수경이 그녀의 인사에 반응하듯 시선을 돌렸고 윤주가 또 한 번 인사를 건넸다.

    “엄마, 딸 왔어.”

    “……우리 윤주네.”

    “엄마…… 나 기억해?”

    “그럼 우리 딸 기억하지. 이리 와.”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느렸지만 수경은 천천히 팔을 뻗었고 윤주가 냉큼 그 손을 잡았다. 유난히 표정도 밝았고 그만큼 정신도 맑은 것 같았다. 수경의 다정한 모습이 반가운 윤주가 얼른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수경과 눈을 맞췄다. 수경도 반가운 듯 손을 뻗어 윤주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모녀는 한동안 포근하고 따뜻한 시간을 즐겼다.

    “엄마, 만두 사왔어. 우리 그거 먹을까?”

    “배불러. 산책.”

    “엄마 산책 가고 싶어? 그래, 가자. 오랜만에 나랑 산책하자.”

    살짝 들뜬 윤주는 수경의 매무새를 꼼꼼히 살핀 후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왔다. 수경과 함께 산책하는 게 얼마 만인지, 날이 좀 덥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 더우면 말해. 가방에 선풍기 있어.”

    “안, 더워.”

    건물 밖으로 나온 윤주는 천천히 휠체어를 밀어 병원 앞마당을 걸어 다녔다. 나무 향기 가득한 공기도 좋고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도 너무 좋았다. 윤주는 중간중간 수경을 살폈고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표정에 그녀도 같이 웃었다.

    “엄마, 좋아?”

    “좋아.”

    “안 피곤해?”

    “안 해.”

    “조금이라도 힘들면 말해. 엄마 피곤하면 안 돼.”

    “뒤로 가.”

    “어?”

    “뒷마당.”

    수경의 난데없는 요청에 윤주가 머뭇거렸다. 거기로 가면 이강이 있고 수경을 보게 된 그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자신이 없었다.

    “빨리, 가.”

    “으응.”

    수경의 재촉에 윤주는 어쩔 수 없이 뒷마당으로 향했고 그곳으로 갔을 때 눈을 감고 의자에 편히 앉아있는 이강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의자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나태했지만 또 섹시했다. 엄마와 마주치기 직전인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무척이나 우스웠다.

    “시원해.”

    “엄마 옛날부터 물소리가 노랫소리 같다고 좋아했어. 산에 가서도 계곡에서 밥 먹고, 봄에 꽃구경도 강가로 가고 여름에는 무조건 바다. 우리 바다 참 많이 갔었어. 기억해?”

    “기억해, 바다 예뻐.”

    “우리 엄마 기억 잘하네.”

    “나 머리 좋아.”

    “맞아, 그래서 엄마 딸도 머리 좋아.”

    수경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지가 얼마 만인지, 윤주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계속 이 정도로만 수경의 상태가 유지가 되어도 소원이 없었다. 수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 윤주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엄마. 사실은 내가 친구랑 같이 왔는데 인사시켜도 돼?”

    “너는 괜찮아?”

    “내가 왜?”

    “엄마 안 창피해?”

    “그런 말 하면 화내, 엄마가 어디가 어때서. 기다려, 친구 데리고 올게.”

    윤주는 씩씩하게 걸어 이강 앞으로 갔다. 얼굴에 그늘이 진 이강이 천천히 눈을 떴고 전사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윤주를 봤다.

    “벌써 나왔어?”

    “우리 엄마 만날래?”

    “정말? 그래도 돼?”

    “우리 엄마 지금 저기 계셔. 당신이 좀 실망할 수도 있는데, 우리 엄마는…….”

    “실망 안 해. 사람은 누구나 다 아플 수 있고 그럼 환자가 되는 거잖아. 어머니가 나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겠다. 가자.”

    이강은 손을 내밀었고 윤주는 그 손을 잡고 수경에게로 갔다.

    “엄마, 내 친구.”

    “안녕하세요, 어머니. 이강이라고 합니다. 윤주 남자친굽니다.”

    이강의 인사에도 수경은 대답 없이 그냥 빤히 그를 보기만 했다. 혹시나 또 정신이 흐려진 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지만 이강은 별말 없이 가만히 수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잘 안 보여.”

    한껏 고개를 들었던 수경의 한마디에 이강은 얼른 무릎을 꿇고 수경의 휠체어 앞에 앉았다. 수경은 제 앞에 앉은 이강의 얼굴을 빤히 보다 힘들게 손을 뻗었고 그가 얼른 그 손을 잡아 제 얼굴에 올렸다.

    “잘생겼다.”

    “엄마?”

    “제가 잘생겼습니까?”

    “응, 아주 예뻐.”

    “감사합니다.”

    “두 사람, 결혼해?”

    “어, 엄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결혼이야.”

    윤주는 당황했지만 이강은 조심스럽게 수경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혹시나 놀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수경이 이강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천천히, 부드럽게,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이강은 수경을 대하는 게 윤주보다도 능숙해 보였다.

    “지금은 예쁘게 만나고 있고 결혼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의논해보겠습니다. 제가 윤주 씨를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이강의 차분한 말에 수경은 그거면 된다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도 이강은 수경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했고 그럴 때마다 수경은 느리고 부정확하지만 꼭 대답을 해줬다.

    그런 수경의 모습에 윤주는 뿌듯했고 또 아쉬웠다. 건강한 엄마였다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런저런 거 다 물어보고 가끔은 으름장도 놓고 결국은 그를 좋아해 줬을 거였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이강을 봐줘서 그건 그것대로 정말로 감사했다.

    “엄마, 이제 병실로 가자. 엄마 피곤해 보여.”

    “응.”

    “그럼 어머니, 저는 다음에 뵙겠습니다.”

    “또 와.”

    수경은 끝까지 이강에게 친절했고 병실로 돌아가는 내내 이강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는 했다. 병실로 돌아간 수경은 많이 피곤했는지 곧장 침대에 누웠다. 눈을 껌벅껌벅하며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윤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내 딸 다 컸어.”

    “엄마 딸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어.”

    “아프지 마.”

    “엄마 딸 엄청 건강해.”

    “이제 시집 가.”

    “안 급해. 엄마 딸 인기 많아서 이놈 저놈 만나보고 골라서 갈 거야.”

    “저놈이 제일 나아.”

    “우리 엄마 이강 씨 되게 좋아하네.”

    “잘생겼어.”

    수경의 대답에 윤주가 오랜만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빠도 얼굴 보고 좋아했다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나 보다. 윤주의 웃음에 같이 미소 짓던 수경이 곧 잠이 들었고 윤주는 조금 더 앉아있다 병실을 나왔다. 엄마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오늘 윤주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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