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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25화 (25/44)
  • 25.

    불같은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육체를 꼭 붙이고 누워있었다. 아직도 거친 숨이 잦아들지 않은 이강은 의지하듯 그녀를 계속 안고 있었다.

    윤주 역시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를 꼭 안아줬다. 그녀의 손길에 이강은 점차 안정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오늘 동생이 왔어.”

    말을 꺼내는 이강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고 윤주는 거리를 벌리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릴 때 나는 엄청나게 개구쟁이였는데 동생은 몸이 많이 약해서 매일 아프고 예민하고 짜증스러웠어. 울고 칭얼거리고 시끄럽고 어머니는 동생을 돌보시느라 매일 바쁘고, 날 봐줄 시간이 없었지. 그래서 동생이 진짜 미웠어.”

    “어린 이강이가 속상했겠네.”

    이강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윤주의 말에 살짝 웃었다. 어릴 때 이강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넓은 집안을 위아래 층으로 뛰어다니고 장난치다 비싼 물건도 깨트리고 돌봐주는 누나 골탕 먹이는 게 일과였다.

    하루는 어머니의 드레스룸 옷장 안에 숨어있다 잠든 바람에 부모님이 실종신고를 한 적도 있었다. 잠에 취한 그가 부스스 나타났을 때 울음을 터트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개구쟁이한테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다니라는 거야. 정말 짜증이 났는데 벌이어서 어길 수 없었어. 어머니는 우리 둘 사이를 걱정하셨던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운동 갈 때마다 동생을 데리고 다녀야 했지.”

    “착한 아들이었네, 이강 씨.”

    “그건 아니야,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너무 귀찮더라고. 처음엔 싫다고 하던 녀석이 나중엔 나보다 더 열심히 다녔어. 알고 보니까 녀석은 운동이 아니라 나랑 다니는 게 좋았던 거더라고.

    안드레아가 좋아한 건 운동이 아니라 형인 이강이었다. 몸이 약했던 안드레아는 운동에 능하지 못했고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보호해준 건 이강이었고 안드레아는 항상 자신을 보호해준 형을 우상처럼 우러러보고 좋아하게 됐던 거였다. 안드레아는 어디든 이강을 쫓아다니려고 했고 결국 이강의 학교까지 쫓아와 그를 무척이나 곤란하게 했었다.

    “동생이 학교까지 찾아오니까 친구들이 놀렸어. 친구들과 처음 싸움을 했고 학교로 엄마가 불려왔어. 모든 게 다 안드레아 때문이라고 처음으로 엄마한테 대들었다. 밤에 엄마가 우시더라고.”

    이강이 속상해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고 윤주가 별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땐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짓누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일이 있고 안드레아가 학교에 오지 않는 대신 주말엔 무조건 같이 놀아주기로 약속을 했어. 근데 하필 제일 친한 친구가 주말에 생일파티를 한다는 거야. 안드레아한테 다음에 놀자고 말해봤는데 싫다고 하더라고. 화가 정말 많이 났었어.”

    승마하기에 적당한 날씨가 아니었다. 안드레아는 집에서 보드게임이나 하면서 맛있는 거 먹고 영화를 보자고 했지만 이강은 그럼 나가버리겠다고 협박해서 안드레아를 억지로 데리고 승마장으로 갔다.

    “좋지 않은 날씨였지만 화가 났던 난 무시했지.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천둥소리에 놀란 말이 뛰어오르며 승마에 미숙한 안드레아가 떨어졌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안드레아가 말에 밟혔고 의사는 이 정도인 게 다행이라고 했어.”

    을씨년스럽게 낮게 드리웠던 회색 먹구름, 물기를 가득 머금었던 바람, 멀리서 들리던 천둥소리와 함께 얼굴을 적시던 빗물과 날카로웠던 안드레아의 비명과 비에 섞여 있던 피 냄새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 없었지만 왼쪽 다리에 영구장애를 얻었어. 안드레아는 지금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 그런 동생을 볼 때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떨쳐 낼 수가 없어.”

    윤주는 이강이 무척이나 괴로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말하는 내내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표정은 처참했다. 꽤나 오래전 일인데도 그는 여전히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주는 그 어떤 때보다 연약해져 있는 이강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괜찮아, 그냥 사고일 뿐이잖아. 그건 사고였어.”

    “…….”

    “괴로워하지 마. 당신 잘못 아니야. 당신 역시 어린애일 뿐이었어. 어린 당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고.”

    “……내 동생은 다리를 잃었어.”

    “대신 살았잖아.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하면 당신 어머님도 힘들어하실 거야. 어머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마. 설마, 당신 이런 얘기 한 번도 부모님과 나눈 적 없구나.”

    “그럴 수 없었어. 어머님까지 괴롭게 해드릴 수 없었거든.”

    “당신 혼자 다 껴안고 있었네, 많이 아프고 외로웠겠다.”

    이강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윤주의 품에 안겼다.

    안드레아가 다치고 어머니는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덕분에 다쳐서 포악해진 안드레아를 상대하는 건 이강이었다. 안드레아가 악을 쓰고 물건을 던지고 그거에 맞아 다치기까지 했지만 죄책감이 깊었던 이강은 모든 걸 묵묵히 견뎌냈다.

    안드레아가 치료받게 하고 공부시키고 재활까지 시켜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거라는 그를 결국은 걷게 만들었다. 그 사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죄책감은 점점 더 켜졌고 그의 마음은 상처 입고 망가져 갔다.

    안드레아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을 때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볼 수 있었다. 힘이 완전히 빠진 이강은 죽은 듯 잠이 들었고 3일 내내 심하게 앓았다.

    집안의 장남으로, 안드레아의 형으로 자신을 잃고 살았던 이강은 드디어 집을 떠났고 안드레아는 필사적으로 잡았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큰아들의 고단함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윤주는 제 품속의 이강이 상처를 많이 받고 힘겹게 그 시간을 이겨내고 있는 어린아이로 보였다. 그 누구에게도 속상함을 토해내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 이겨는 그 시간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당신은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 마.”

    “내가 이렇게 내 인생을 살아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당연하지. 근데 잠깐, 혹시 당신 동생이 오늘 만나서 뭐라고 했어?”

    “안드레아가 원하는 건 내가 자기 옆에서 형으로 사는 거야. 그 아이는 아직도 내가 필요한가 봐.”

    “동생이 어리광이 심하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더 이상 받아주지 말고 지금이라도 혼자 잘 살 수 있게 그걸 가르쳐.”

    “그래도 되는 걸까?”

    “만약 당신 동생이 날 반대하면 어쩔 건데?”

    이강은 순간적으로 대답하지 못했고 윤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고 입을 삐죽인 윤주가 옆에 던져놓은 잠옷을 꿰입었다. 윤주를 따라 벌떡 일어난 이강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어디 가려고?”

    “당신에 대한 믿음이 반으로 줄었어.”

    “그런 거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거뿐이라고.”

    “그럼 다시 대답해 봐. 나야 동생이야?”

    “그걸 꼭 선택해야 해?”

    “이거 봐, 이거 봐, 벌써부터 어중간히 대답도 못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니? 있잖아, 자기야. 나는 사랑보다 믿음이 더 중요한 사람이야.”

    윤주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이강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방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이강은 당황했지만 밖의 윤주는 혼자 피식 웃었다.

    너무 힘들고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서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농담을 했더니 사색이 됐다. 욕실로 들어가던 윤주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방문을 째려봤다.

    “저 남자 진짜 나보다 동생을 선택하는 거 아냐? 웃을 일이 아닐지도.”

    혼자 중얼거린 윤주가 욕실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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