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24화 (24/44)

24.

드디어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뒤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내내 인상을 쓰고 앉아있던 안드레아가 지팡이에 의지해 내렸고 쟝이 그와 보조를 맞춰 옆에서 걸었다.

―바로 방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필요한 모든 건…….

미리 로비에 와서 기다리던 이강이 안드레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완벽히 정리된 모습이었고 반가운 모습이었다.

이강을 발견한 안드레아가 천천히 멈췄다. 반가운 얼굴, 그리고 그만큼 미운 얼굴. 살짝 그을린 얼굴에 편안해 보이는 셔츠와 물이 빠진 청바지를 받쳐 입은 이강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 안드레아는 이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혀, 형.

이강은 반쯤 넋을 놓고 자신을 보고 있는 안드레아에게 다가갔고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따뜻하게 안았다.

―안드레아, 내 동생.

―형.

―많이 보고 싶었다.

―형은 나빴어.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

―무소식이라 희소식이라고 했잖아.

―맨날 나한테만 냉정하지.

―내 동생은 여전하네.

이강은 서운함을 내보이는 안드레아를 한층 더 따뜻하게 안아줬다. 이런 행동이 안드레아를 버릇없게 만든다고 쟝과 부모님은 질색하시지만 이강은 그냥 안드레아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

―얼굴 좀 보자.

―아, 형!

이강은 심술 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안드레아의 머리를 신나게 헝클어트렸다. 안드레아는 싫다고 칭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가서 밥 먹자. 여기 한식당 괜찮아.

―싫어, 고기 먹을 거야.

―거기도 고기 있어. 잔말 말고 따라와. 이 답답한 옷도 좀 벗고.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

이강은 투덜거리는 안드레아의 목덜미를 잡고 식당가로 올라갔다. 안드레아가 벗기를 거부하는 재킷을 결국엔 억지로 벗겨 제 어깨에 걸쳤다.

―진짜 싫다고. 이건 격식에 맞지 않아.

―그럼 조끼까지 벗으면 되겠네.

―그건 절대 안 돼. 나의 완벽한 옷차림을 망칠 순 없어.

―너 이렇게 입고 있는 걸 보면 초상화 속 할아버지가 살아 나오신 거 같아.

―형!

발끈하는 안드레아에 이강은 폭소를 터트렸고 뒤에 쫓아오던 쟝이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뭐라고 해도 우애가 좋은 형제였다. 다만, 안드레아의 집착이 조금 줄어들고 이강의 부채감이 좀 줄어들면 더 완벽한 사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아의 밥그릇 위로 잘 볶아진 불고기가 올라왔다. 안드레아는 이강이 올려준 고기와 밥을 맛있게 먹었고 이강의 밥은 좀처럼 줄어들고 있지 않았다. 보다 못한 쟝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테오 님도 식사 좀 하시죠.

―쟝 님도 저 그만 챙기시고 식사하시죠.

이강의 존댓말에 안드레아와 쟝,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받은 만큼 대우해 드리려고요.

―형, 하지만 쟝은 비서잖아.

―사석에선 친구지.

예전부터 이강은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걸 불편해했다. 이강은 작업할 때만 빼면 누구와도 격 없이 편히 지내길 원했고 그래서 회사에 처음 입사할 때도 베르기의 아들이라는 걸 알리지 않았었다. 안드레아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구는 이강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난 반대야. 두 사람이 친구였지만 지금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라고.

―정확히 말하면 쟝의 고용주는 아르노그룹의 수장이신 아버지지, 일개 디자이너인 나는 쟝보다 낮은 직분이야. 지금은 쟝의 호의로 파견근무 중이고.

안드레아는 도대체 뜻을 알 수 없는 이강의 말과 태도에 불쾌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그를 보지 못했던 지난 3년 이강은 더 자유로워지고 자신은 그들의 곁에서 더 멀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고용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형에게 님 소리 들을 사람 아니야!

―안드레아, 버릇없이 굴지 마. 그는 엄연히 너보다 연장자고 내 친구야.

―형 이러는 거 밑 작업이야?

―뭐?

―형은 아르노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잖아. 아버지의 자리에 오를 때 좋은 평판이 필요할 거 같아서 서민 코스프레하는 거냐고. 그럼 내가 이해할게.

한껏 비웃는 안드레아를 이강은 살짝 미소를 지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참지 못하고 성을 내는 게 여전히 8살짜리 꼬마 같았다. 그렇다고 어릴 때처럼 무조건 물러나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자, 두 사람 그만해. 오랜만에 만나서 왜 이러는 거야. 밥 좀 먹자, 밥 좀.

―아르노그룹의 후계자라…… 너야말로 그 자리가 탐나서 벌써부터 할아버지 흉내를 내는 거야?

―그런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봐. 네가 나보다 더 훌륭하게 그룹을 이끌 수 있을 거 같거든.

이강의 그 말에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와중에 안드레아의 눈빛은 점점 더 사나워졌고 쟝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걸 느낀 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테오, 너 왜 그래? 그만해.

―능력도 증명되지 않았는데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 자리를 물려받는 건 불공평한 일이야.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어.

―……완전히 도망치고 싶어?

―안드레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형은 계속 도망치고 싶어 했어. 계열사 디자이너로 간 것도 본사 안 오려고 한 거고 3년 전에도 책임 디자이너 안 하려고 그냥 사라진 거잖아.

―안드레아, 그때는 테오가 진짜로 많이…….

―맞아, 나는 최대한 자유롭게 살고 싶어.

또 한 번의 침묵, 귀를 찢을 것 같은 거대한 소음과 함께 안드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의자가 넘어지며 내는 소리가 사람들의 귀가 아니라 마치 심장을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꿈도 꾸지 마. 형은 평생 내 옆에 있어야 해.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

내내 담담한 얼굴로 앉아있던 이강의 표정이 파사삭 무너졌다. 떨리는 이강의 동공이 안드레아의 불편한 왼쪽 다리로 향했고 세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침묵으로 앉아있던 이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났다.

―형, 어디가. 형! 돌아와! 돌아오라고! 형! 테오!

―안드레아, 그만해!

쟝이 발악을 하는 안드레아의 앞을 막아섰다. 붉게 핏발이 선 안드레아는 정말 반쯤은 미친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강의 뒤를 쫓으려는 안드레아의 어깨를 잡아 그럴 수 없도록 말렸다.

―너, 절대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 할 거야. 형이 떠나려고 할 때마다 난 이 말을 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옆에 있게 할 거야!

―안드레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폭주하고 있는 안드레아를 쟝이 말렸다.

―제발 부탁인데 테오에게 더 이상 이기적으로 굴지 마. 그만 상처 주라고!

쟝은 안드레아를 방에 남겨 놓은 채 그대로 떠났다. 안드레아 혼자 남은 방에선 그릇이 깨지고 가구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쟝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방 밖에 대기한 경호원들에게 들어가 보라고 명령하고는 이강을 잡기 위해 복도를 내달렸다.

바이크에 올라타고도 이강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데 손이 떨려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잘 진정이 되지 않았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쟝을 발견한 이강이 억지로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지만 쟝이 그를 잡는 게 먼저였다.

―타지 마.

―괜찮아.

―괜찮기는 뭘 괜찮…… 미안하다, 나까지 소리 질러서.

―네 잘못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매번 미안해.

―내려, 이거 타고 가. 바이크는 내가 작업실에 가져다 놓을게.

쟝은 바이크의 시동을 끄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동차 키를 대신 내밀었다. 그가 탈 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이강은 자신이 차에 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쟝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바이크에서 내렸다.

그가 바이크에서 내리자 쟝이 재빨리 자동차 열쇠를 빼앗아 뒤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던졌다.

―운전하지 마. 오늘은 정말 너 걱정하면서 피 말리는 거 좀 안 하고 싶다.

―알았어. 안드레아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 녀석 걱정을 하고 싶냐!

―……동생이잖아.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한 마디만 더 해. 나 진짜 화낸다. 얼른 가버려, 새끼야.

이강은 자신을 위해 대신 신경질을 내는 쟝을 한 번 안아주고 마련된 차에 올랐다. 그가 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고 작업실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 앉은 이강은 창밖만 볼뿐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한데, 목적지 좀 바꾸죠.

―말씀하십시오.

이강은 작업실 대신 윤주의 집 주소를 말했고 차는 곧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머릿속은 윤주 생각으로 가득했고 당장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죽을 거 같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이강은 대문을 열었다.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던 윤주가 대문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들어오고 있는 그를 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운 마음에 현관 앞으로 간 윤주는 처음 보는 이강의 표정에 심장이 철렁했다.

“이강 씨,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한숨과 함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이강을 윤주가 얼른 안았다. 이렇게 아픈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당당하고 씩씩했던 이강이라 윤주는 자신의 마음이 파이는 것같이 아팠다.

“괜찮은 거 아니잖아. 아프면서 왜 말도 못 해.”

윤주의 그 말에 이강은 마음속의 뭔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상처받고 속상해도 숨 한 번 크게 쉬고 사람들 앞에선 괜찮은 척 웃었고 그럼 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갔었다.

자신 스스로도 괜찮은 거라고, 상처받았던 건 모두 과거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윤주의 말 한마디에 둑이 무너져 물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그동안 쌓여있던 모든 상처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강이 절박하게 윤주의 옷자락을 잡으며 매달렸다.

“아냐,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야 해.”

윤주는 꼭 주문처럼 말을 하는 이강을 더 꼭 안았다. 자신이 모르는 이 사람의 상처는 무엇인지, 뭐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묻는 거보다 위로가 먼저인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이강 씨…….”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강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잘 모르겠다. 마음도 머리도 전부 뒤죽박죽 엉망인데 오로지 간절한 건 윤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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