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강이 일어난 건 아주 늦은 밤이었다. 마루에서 책을 보고 있던 윤주가 막 자러 가려고 일어날 때 방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이강이 나타났다. 여전히 졸린 것인지 반쯤 눈을 감은 이강이 하품을 쩍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윤주야.”
“잘 잤어?”
“우웅.”
어리광을 부린 이강이 윤주에게 턱 기대왔다. 힘을 빼고 축 늘어져서 그런지 윤주가 휘청할 정도로 이강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배고파.”
“죽 끓어놨어.”
“진짜? 나 먹을래.”
“세수부터 하고 와. 데워놓을게.”
“응.”
이강이 신난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고 어린애 같은 모습에 윤주가 피식 웃으며 주방으로 가 죽을 데웠다. 가스레인지 위의 죽이 보글보글 끓어갈 때 상큼하게 샤워까지 마친 이강이 옷까지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냄새 끝내준다. 얼른 줘, 얼른.”
“아직 덜 데워졌어.”
“괜찮아, 괜찮아. 너무 뜨거우면 빨리 못 먹어서.”
“앉아, 그럼.”
그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죽을 덜어 담은 윤주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는 이강의 앞에 죽 그릇을 내려줬다. 다 내려놓기도 전에 크게 한 숟가락 퍼먹은 이강은 뜨겁다고 난리를 폈다.
“물 먹어, 물. 방금 불에서 꺼낸 건데 식히지도 않고 덥석 먹으면 어떻게 해.”
“덜 데워졌다며. 안 뜨거울 줄 알았지.”
“천천히 먹어. 한 냄비 끓였어.”
“맛있다.”
이강은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죽을 두 그릇이나 비워냈다.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겨우 두 그릇인데 뭐.”
“그거 밥공기 아니고 면기거든.”
“나 아직도 배고파.”
“과일 줄게.”
윤주는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 뒀던 과일을 꺼내 건네줬고 이번에도 커다란 접시에 담긴 복숭아, 사과, 참외에 토마토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이제야 좀 배가 찬다. 나 디저트는?”
“풋. 푸하하하하! 기다려, 케이크랑 커피 줄게.”
윤주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역시 미리 준비해 놓은 초콜릿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내어줬다. 윤주의 웃음에도 이강은 쉬지 않고 케이크와 커피를 흡입했다.
“일이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
“응. 디자인만 막 끝내 놓은 거지. 완벽하게 옷으로 만들려면 아직 멀었어.”
“바느질도 직접 해?”
“아니. 쥴스라고 전문가가 와 주실 거야. 완전 장인이야.”
“그거 다 하면 회사로 돌아가?”
“아니, 나 여기 떠날 생각 없는데? 그리고 여기서 패션쇼 하게 될 거야.”
“패션쇼? 뭐가 규모가 되게 커지네.”
케이크까지 다 먹은 이강은 턱을 괴고 윤주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핵심적인 질문은 피하고 있었고 돌아가냐는 말도 너무 쉽게 했다. 뭔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따지거나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윤주는 얼굴에 길게 꽂히는 이강의 시선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왜?”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잘 지냈어?”
“거의 40시간 넘게 잠만 잤으니까 그렇지. 오늘 밤 잘 수 있겠어?”
“아마도? 내일 토요일인데 뭐해?”
“엄마한테 가는 날이야.”
“잘됐다. 나랑 같이 가자.”
“그건 좀…….”
“같이 가. 어머니 보는 거 싫으면 밖에서 기다리면 되잖아.”
“거기 멀어. 서울도 아니고 최소한 차 타고 2시간은 가야 해.”
“오랜만에 드라이브도 하고 좋네. 같이 가는 거다. 우리 산책 가자. 나 너무 배불러.”
이강은 거절하려는 윤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대로 자기엔 너무 아쉬웠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별 이야기 없이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처럼 정겨운 동네 골목을 걸었다.
이웃집 담벼락 위의 붉게 핀 장미꽃도 예뻤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꽃냄새, 다정하게 들리는 이웃들의 생활 소음, 이강은 그 모든 걸 즐겼다.
“난 이 동네가 좋아.”
“환상이라니까.”
“아냐, 진짜 좋아. 저기 있는 작은 가게도 너무 사랑스럽잖아.”
“당신이 갈 때마다 사장님이 서비스 주니까 그렇지, 원래는 얼마나 얌첸데.”
두 사람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산책하는 평범한 일상을 즐겼다. 이강은 소중한 사람들과 즐기는 이런 소소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 * *
공항의 입국장 앞에 서 있는 쟝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인내심이 바닥 난 안드레아가 결국 한국에 온단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베르기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연락이 왔었다. 이강에 안드레아까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하아,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것들과 엮여서는.
그나마 이강이 안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이강이 다른 때처럼 작업한다고 예민하게 굴었다면 쟝은 이미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강은 윤주를 만난 후 굉장히 많이 변했다. 예전엔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작업실에만 박혀 잠도 잘 안 자고 밥도 잘 안 먹고 신경이 날카로워 누굴 만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작업 한 번 끝나고 나면 병원으로 실어 날라 다시 사람 만드는 게 쟝의 일 중에 하나였는데 요즘엔 그가 참견하지 않아도 생활 규칙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건 윤주 씨에게 고마워해야지.
쟝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드디어 입국장 문이 열리며 안드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 하나 없이 완전히 회사의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그와 과도하게 많은 경호원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과하다, 과해.
눈이 보이지 않는 진한 선글라스, 주름 하나 없는 감색의 스트라이프 양복에 포마드를 발라 깨끗하게 넘긴 머리, 행커치프와 회중시계, 왼손 새끼손가락의 커다란 문장 반지까지 책에서 나오는 중세 귀족의 모습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끄는 건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고 있는 불편한 그의 왼쪽 다리였다.
저 다리만 아니었다면 예민한 성격이나 완벽한 외모에 대한 집착이 좀 덜 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쟝이 안드레아에게 다가갔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형은?
―작업실에 계십니다.
―나 오는 거 몰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작업실에 있다고?
―3년 만에 다시 하시는 작업입니다. 집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쟝의 말에 안드레아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쫓아가 한바탕 쏟아냈으면 좋겠는데 작업할 때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테오의 새로운 디자인을 가장 기다리고 기대하는 건 바로 그였다.
―그래서 작업 속도는?
―글쎄요…….
―완성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뭘 한 거야?
―작업 중간에는 누구도 못 보게 하시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난? 나도 못 보는 거야?
―호텔로 가시면 형님께서 오실 겁니다.
―싫어! 작업실을 봐야겠어. 거기부터…….
―한국에 계시는 동안 안드레아 님의 모든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동의하셨죠?
―으, 악랄한 인간.
이를 악문 안드레아의 협박에도 쟝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안드레아를 작업실로 데리고 오지 말라는 건 이강의 부탁이었다. 안드레아가 작업실의 위치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수시로 그를 찾아오거나 염탐을 할 것이고 이강은 그게 부담스러웠다.
그걸 잘 아는 쟝 역시도 이강의 말에 동의했다. 이강에 대한 안드레아의 집착은 병적이니까. 형을 너무 좋아해서 과한 행동을 하는 안드레아에게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 적도 있었다.
―형, 건강은?
―괜찮으십니다.
―작업 시작하면 잘 안 먹고 잘 안 자잖아.
―요즘엔 안 그러십니다.
―형이 바뀌었다고?
―지난 3년 동안 깨달은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강이 변했다는 말에 안드레아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모르는 상황에서 이강의 신상에 변화가 생기는 거에 가장 예민하게 굴었다. 습관이 변했다는 말에도 저렇게 날카롭게 나오는데 만약 윤주의 존재를 알게 되면, 생각하기도 싫다.
-그래도 언젠간 만나게 될 텐데.
―혼자 중얼거리지 말라고.
―식사는 호텔에서 하시겠습니까?
―형이랑 같이 먹고 싶어. 연락이나 해봐.
―알겠습니다.
차를 타고 호텔로 가는 내내 안드레아는 중간중간 이강에 대해 물었고 쟝은 빙빙 돌려가며 필요한 것들만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