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강의 무거운 몸에 깔린 윤주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묵직한 이강의 무게감을 느끼며 윤주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강은 밑에 누운 윤주가 조금 바스락거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밑에 깔려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운 윤주를 바라봤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과,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붉은 입술, 귀밑부터 자신의 키스 마크를 달고 있는 윤주가 참 사랑스러웠다.
이강은 고개를 살짝 내려 그녀의 입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그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퉁퉁 부운 입술로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다.
‘욱신.’
그의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강은 생소한 듯 익숙한 그 느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젠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느껴졌다.
이강의 전화를 받고 쟝은 작업실로 오는 길을 서둘렀다. 오라고 전화까지 한 걸 보니 작업이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 몇 년 만에 이강의 작업물을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들떴다.
하지만 쟝의 입장에선 만에 하나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강의 작업물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그걸 말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작업실에 도착했을 땐 조금 마른 이강이 외출 준비를 다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뒤에 쭉 늘어선 반신 마네킹에는 그의 작업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간 쟝은 그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어때?
―너, 너…….
―너무 오랜만이라 감이 좀 떨어졌지? 나머지는…….
쟝은 옆에 서서 겸손을 떨고 있는 이강을 덥석 안았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제발 그가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감각만이라도 남아있기를 매일 밤 자기 전에 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나 보다. 그를 놓아준 쟝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툭 쳤다.
―이런 작품을 만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
―이 정도면 괜찮겠어?
―괜찮은 정도가 아니잖아. 이 정도면 당장 오트쿠튀르에 세워도 부족함이 없지. 아니, 차고 넘치지. 또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키겠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안심이 된다. 쥴스, 아직 은퇴 안 하셨지?
―아, 바느질? 네가 청하면 당장 와 주실 거야. 프레타포르테는 어떻게, 더 작업해야겠지?
―몇 벌 더 보충해야지. 난 기성 라인이 정말 힘들어.
―재단도 안 하고 옷을 만드는 네가 미친놈인 거야. 저것도 재단본 없지? 망치면 끝이지? 작업하는 내내 쥴스의 투덜거림을 노래처럼 들어야겠네.
―그러면서 즐기는 거 알아. 나 3일만 쉰다.
―알았어, 그동안 내가 이 작업실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게. 안드레아는…….
―작업 끝날 때까지는 신경 안 쓸 거야. 간다.
냉정하게 말한 이강은 가방을 들고 작업실을 떠났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던 쟝이 다시 이강의 작업물로 고개를 돌렸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꼼꼼히 그의 작품을 확인하던 쟝은 참을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물 같은 새끼.
확실히 이강은 타고 난 천재다. 외모, 머리, 창의력, 재력에 성격까지 너무나 불공평하게 신이 모든 걸 몰빵 해준 인물, 그러면서도 겸손한, 진짜 좀 질리는 인간이었다. 친구지만 가끔은 미치도록 질투가 났다.
이강이 윤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비어있었다. 당연히 윤주는 출근하고 없었고 이강은 갑자기 덮쳐오는 피곤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조용했던 집안엔 그의 코 고는 소리로 가득 찼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윤주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강의 가방을 발견했다. 뒷마무리 조금만 하면 된다더니 결국 그것까지 다 끝냈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윤주의 목소리가 설레었다.
“이강 씨, 자기야.”
이강은 대답이 없었고 그의 방에도 없었다. 가까운 마트라도 갔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방문을 열었을 때 제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 이불도 덮지 않고 잠든 그를 발견했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겉옷까지 그대로 입은 채였다.
“이강 씨, 자기야. 자? 잠깐 눈 좀 안 뜰래?”
윤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고 이강은 살짝 고개만 움직였을 뿐 잠에서 깨어나진 못했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근데 이 사람 밥은 어쩌나?”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주방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밥은 먹은 거 같지 않고, 밥이라도 먹이려고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 봤지만 역시나 이강은 반응이 없었다.
윤주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이강을 잠시보다 일단 옷부터 벗겼다. 낑낑대며 겉옷을 벗기고 양말을 벗기고 나머지는 포기, 그거하고 숨을 헉헉거리는 윤주가 방을 나갔다.
“되게 힘드네. 나라도 밥을 먹어야겠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윤주는 최대한 조용히 닦고,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자신의 방으로 갔지만 이강이 침대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옆에 누울 수가 없었다.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운 윤주가 이강의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이강이 자신을 꼭 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이강의 얼굴을 본 윤주도 다시 눈을 감았다. 확실히 혼자 자는 것보단 그와 이렇게 체온을 나누며 자는 게 좋았다.
윤주가 출근하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 그는 잠들어 있었다. 거의 24시간도 넘게 잠을 잔다는 말이었는데, 윤주는 작정하고 그를 흔들었다. 잠을 자는 건 좋은데 밥이라도 먹게 해야 할 거 같았다.
“이강 씨, 일어나 봐. 밥 먹고 자자, 어?”
“……으음, 계속 잘래.”
“배도 안 고파? 밥만 먹고 자라니까.”
윤주의 말에도 이강은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워 버렸다. 조금 더 고민하던 윤주가 마루로 나가 쟝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주 씨?]
“쟝, 이강 씨가 어제부터 계속 잠만 자는데, 이대로 둬도 돼요?”
[일어날 때까지 그냥 두세요.]
“하루도 넘게 잠만 자는데, 밥도 안 먹고? 저래도 된다구요?”
[이강이한테는 잠이 보약이에요. 대신 일어나고 나면 엄청 먹을 테니까 음식 좀 챙겨나 주세요. 일어났을 때 먹을 거 없으면 짜증 부려요.]
“이강 씨 뭐 잘 먹어요?“
[음, 그렇게 실컷 자다 일어나면 어머니께서 죽이란 거 끓여주시던데? 그거 잘 먹어요. 그다음에 찾는 건 고기, 과일도 엄청 먹고 아무튼 뭐든 많이 먹어요. 상상을 초월하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참, 이강이 작업한 거 아직 못 봤죠? 기대해요, 엄청나요.]
“봤는데, 작업할 때 옆에 있었어요.”
[……옆에, 있었다구요?]
“네. 그거 피팅 내가 했는데. 난 이만 장 보러 가야 해요. 나중에 또 통화해요.”
윤주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멍하니 서 있던 쟝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팅을, 윤주 씨가 했다고? 헐.
지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어떤 모델을 데리고 와도 작업을 못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더라니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서윤주로 가득 차 있단 증거였다.
그건 다 좋은데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이 변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지 그것도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테오는 한 번 마음먹으면 좀처럼 안 변하는데.
좋게 말하면 심지가 굳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한 거였다. 이강은 뭐랄까, 사람을 대할 때 그랬다. 친해질 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턴 웬만해선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가 뒤에서 자신의 욕을 하고 다니는 걸 알아도 이유가 있을 거라며 믿고, 믿고, 또 믿는다.
그러다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나 자신의 또 다른 친구에게 해를 끼치면 그때야 그 사람을 정리한다. 친구도 그런데 윤주를 연인이라고 인정한 지금 이강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마무리 지으면 좋겠는데.
너무 앞선 걱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강이 윤주를 자신의 작품에 가장 큰 부분으로 여긴 걸 보면 그의 마음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