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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20화 (20/44)
  • 20.

    어느새 윤주가 걸치고 있던 원단은 바느질 없이도 근사한 드레스가 됐고 다시 한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 이강은 붓을 들고 와 드레스 밑자락과 길게 뺀 테일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시라도 그의 작품을 망칠까 봐 윤주는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결국 작품을 다 완성시킨 이강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옷을 벗겨 작업실에 있는 반신 마네킹에 걸쳐놨다.

    “자, 이번에는 이거.”

    “또?”

    “아직 멀었어.”

    이번에는 하늘색이었고 윤주는 별말 없이 그걸 이강 앞에서 척하니 걸쳤다. 이번 원단에는 앞에 것과는 달리 얼굴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놔 걸치기가 편했다. 윤주는 똑같이 팔을 들고 섰고 이강은 또다시 작업을 해나갔다. 순식간에 옷의 형태를 잡고 또다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윤주는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작업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옷을 만드는 이강도, 가만히 서서 모델을 해야 하는 윤주도 땀이 날 정도로 길고 힘든 작업이었다. 매번 새로운 원단으로 비슷하게 작업하는 거 같았지만 막상 만들어 놓으면 디자인과 분위기도 전혀 달랐고 그림도 제각각이었다.

    드레스의 긴 끝자락에 그려진 그의 그림은 한 폭의 명화 같았다. 그의 그림 덕분에 옷들은 예술품으로 승화되는 것 같았고 윤주는 그의 재능과 열정 앞에서 그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영광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이강이 손에 들고 있는 건 하얀색의 앤티크 레이스 원단이었다. 은사가 섞인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얇은 원단에는 중간중간 크기가 제각각인 원형의 앤티크 레이스가 달려있었다. 마치 요정의 날개 같은 원단은 정말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헐벗은 몸에 걸쳐야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윤주는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이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가 해?”

    “하아, 네 마음대로 해.”

    자포자기한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한 미소를 지은 이강이 재빨리 그녀의 몸에 원단을 감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신을 휘감으며 자리를 잡아가던 이강이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쓰더니 작업대 위의 가위를 가져와 그녀의 팬티를 잘라서 던져버렸다.

    “야!”

    “거슬려.”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환한 불빛 아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속옷까지 벗겨져 나신으로 서 있어야 하는 윤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아올랐지만 이강은 그저 옷을 만드는데 빠져 그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강은 완전히 자신의 작업에 빠져있었고 잠시 부끄러움을 느꼈던 윤주도 곧 평정심을 찾았다.

    처음엔 그녀의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리고 있던 레이스 무늬들이 겹쳐지며 그녀의 몸을 가려 나갔다. 이번 작업은 특히나 공을 많이 들였고 한참 만에 일어난 이강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천천히 감상했다.

    ―완벽해.

    윤주의 모습에 이강이 숨을 멈췄다. 자신의 머릿속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됐다.

    아주 어릴 적, 제목도 모르고 출연 배우도, 어떤 내용인지 기억도 못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은 그의 머릿속에 인장을 찍은 듯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영화의 여주인공이 지금 윤주가 걸친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방 안 한가운데 무섭게 타오르고 있던 불꽃을 향해 걸어 들어갔었다.

    영화 속 여자는 성녀 같기도 했고 요녀 같기도 했고 여왕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순진한 시골 소녀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재연해보고 싶어서 시즌마다 만들었지만 그 어떤 잘나가는 모델도 그의 환상을 만족시켜주지 못했었다.

    덕분에 완성시키지 못하고 그냥 포기하고 있던 옷이었는데…….

    작업대에 불량스럽게 기대 서 있던 이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윤주에게 다가갔다. 우아함이 느껴지는 가는 목, 어깨선이 예쁜 긴 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그사이 레이스의 무늬가 가려진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따라 이강의 시선이 흐르고 손길이 흘렀다. 손등으로 부드럽게, 만지는 그 자체의 행위가 마치 예술처럼, 윤주는 자신을 보는 이강의 시선이 너무 뜨겁고 또 너무 경건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아름답다.”

    “…….”

    “정말 완벽해, 이대로 무대 위에 세웠으면 좋겠어.”

    그 순간 이강은 완벽하게 윤주에게 홀렸다. 황홀하다는 듯, 경배하는 눈길로 윤주를 보던 이강이 작업대 위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어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

    “하지 마, 창피해. 찍지 말라니까. 안 돼.”

    “싫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윤주는 사진을 찍지 말라며 그에게 다가왔지만 이강은 뒤로 도망가며 그 모습까지 몇 장이나 사진을 찍었고 그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바닥 가득 떨어졌다. 카메라를 뺏으려는 윤주와 이리저리 피하는 이강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실실 웃으며 빼앗겨 줄 듯 약만 올리는 이강 덕분에 바짝 성이 난 윤주가 사력을 다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혹시라도 옷이 망가질까 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꾸 약 올리면 이 옷, 확 찢어버린다.”

    윤주의 일갈에 이강이 드디어 사진 찍는 걸 멈췄다. 무서운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이강에게 겁을 먹은 윤주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노, 농담이야.”

    윤주의 질문에도 카메라를 작업대에 툭 던지듯 놔버린 이강은 별 대답 없이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조금은 냉정하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그의 시선에 겁을 먹은 윤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 내가 한 말은…… 으악, 뭐 하는 거야.”

    감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던 이강이 가차 없이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확 찢어버렸다. 놀란 윤주가 그의 손을 잡았지만 이강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찢어 바닥에 버린 후에야 이강은 넋이 나간 윤주와 마주 섰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이건 너 아니면 그 누구도 소화 못 해. 너만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낼 수 있어.”

    “그렇다고 찢으면 어떻게 해. 너무 아깝잖아.”

    “주인이 없는 옷은 버리는 거야.”

    “내가 주인이라며.”

    “나만 보면 돼.”

    이강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잡고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윤주를 안아 작업대에 앉혔다. 이강은 윤주가 만지작거리는 조각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으며 한껏 달아올라 무척이나 뜨겁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강은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작업은 끝났지만 긴장을 계속됐고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그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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