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9화 (19/44)

19.

준비를 다 하고 집을 나서는 이강을 잠이 아직 덜 깬 윤주가 눈을 비비며 배웅했다. 이른 새벽이었는데 이강이 갑자기 작업실로 돌아가야 할 거 같다며 서둘렀다.

“잠 깨워서 미안, 조금이라도 더 자.”

“계속 작업실에 있을 거야?”

“응, 언제든지 신경 쓰지 말고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 해.”

“그럴게.”

“근데 나 완전 집중하면 전화 못 받을 수 있어.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거든.”

“알아, 나도 일할 때는 연락 잘 안 돼.”

“그건 곤란해. 당신 연락 안 되면 나 당장 쫓아올 거 같은데.”

“좋지 뭐, 그 핑계로 얼굴도 보고.”

“이리 와.”

준비를 다 한 이강이 현관에 서서 팔을 벌렸고 그녀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게 이렇게 아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윤주를 혼자 두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윤주는 마치 그런 이강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그의 등을 두드려 줬다.

“내 걱정 말고 일에 집중해. 나 당신 디자인 보고 싶어. 그리고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이제 우리 연인인 거다. 그치?”

“……응.”

이강은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대답해주는 윤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말랑말랑한 몸을 안고 내내 뒹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우 참았다.

이강은 윤주를 꼭 안았다 내려놓고 현관문을 나섰다.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마당에 서서 거실 유리문을 통해 손을 흔들어 또 한 번 인사를 하고 겨우 대문을 나섰다.

“잠깐 떨어지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꼭 붙어있고 싶다.”

이강은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바이크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자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당장이라도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났는데 막상 윤주 얼굴을 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작업실이 아니라는 걸로 엄청 짜증이 났을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달려가는 이 길의 공기도 달콤했다.

* * *

그날 이후 이강은 계속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고 윤주는 일상을 유지했다. 하루에 딱 3번, 아침, 점심,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그에게 문자를 남겼고 이강은 어떤 땐 매번, 어떤 땐 한 번만, 가끔은 하루 종일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새벽에 아주 늦은 답장을 남길 때도 있었다.

윤주는 불평하지 않았고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와 떨어져 서로의 안부를 문자로 나누며 그를 기다리는 시간도 기뻤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긴 하나 보다.”

“누굴 정말 좋아하는데?”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사서 회사 앞 화단에서 일광욕하고 있던 윤주는 나정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다.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언니.”

“계집애야 내가 더 놀랐다. 그래서 이강 씨 좋아한다고 혼자 고백하는 거야? 그렇게 좋으면 썸 타지 말고 사귀어.”

“……우리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어요.”

농담했던 나정은 윤주의 너무 뜻밖의 대답에 사레가 들려 한참을 캑캑거렸다. 그래서였나, 며칠 새 윤주의 얼굴이 환하게 예뻐졌다고는 생각했었다. 윤주는 나정에게 냅킨을 건네주며 등을 두드려 줬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알고 있었잖아요.”

“썸만 탄다며.”

“고백했어요, 얼마 전에. 날 사랑한대, 나는 그 사람을 믿기로 했고.”

“너 진심이구나.”

윤주는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주에게 믿음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나정은 걱정이 반, 안도감 반의 복잡한 마음이었다.

“잘 됐다, 축하해. 좋은 사람 같았어.”

“맞아, 좋은 사람이야.

이강의 얘기를 하는 윤주의 얼굴에선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윤주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걸 보는 나정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좋으면 얼른 결혼이나 해.”

“사귀기로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어. 얼른 일어나세요, 편집장님. 일해야죠, 일.”

윤주는 기분 좋게 나정의 팔짱을 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이라는 말에 잠깐, 아주 잠깐 상상을 했는데 그와 부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아니, 꽤 좋을 거 같았다.

난데없는 전화가 온 건 오후 4시쯤이었다. 한참 기획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고 윤주는 액정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좀 도와줘!]

“이강 씨?”

[급해, 얼른 작업실로 와.]

“무슨 일인데? 나 퇴근하려면 2시간쯤 남았어.

[안 돼! 당장 와, 당장!]

“왜 그래? 다쳤어? 어디 아파?

[일단 와, 와보면 알아.]

이강의 전화는 그대로 끊겼고 황당했던 윤주는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야, 설명도 없이. 내가 똥개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해? 웃겨, 진짜. 대한민국 직장인을 뭐로 보고.”

살짝 불쾌해진 윤주는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기획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집중은 깨진 지 오래였다. 퇴근은 2시간이나 남았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짜로 아프거나 다친 건 아닐까 고민하며 입술을 질겅이고 있는데 ‘띵동’하고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와, 나 당신이 간절해.]

문자를 확인한 윤주의 표정이 묘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간절히 원한다는 게 그녀를 흔들어 놨다. 문자를 보던 윤주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얼른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선애가 또 시비를 걸었다.

“선배, 오늘은 외근 스케줄도 없는데 어디 가세요? 요즘 너무 해이한 거 아니에요?”

“내가 해이해도 너보다 일 많이 해. 막내야, 나 지금 급하게 나가봐야 하거든? 나 대신 반차 좀 내줄래? 미안해.”

“괜찮아요, 선배. 제가 알아서 할게요.”

“고마워. 내가 다음에 밥 사줄게. 참, 지난달 기사 아주 좋았다. 계속 그렇게만 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

“그리고 이선애, 앞으로 팀장이라고 불러.”

윤주는 고까운 얼굴로 서 있는 선애에게 한마디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급하게 목에 걸린 명찰을 빼고 몇 분을 못 기다려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버튼을 반복해 눌렀다.

결정하고 나니 그에게 빨리 가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가 택시를 타고 그에게로 향하는 윤주를 업무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던 동혁이 지켜보고 있었다. 딱 봐도 신나서 어디론가 가는 게 느껴졌다.

“행복해 보이네.”

“이제야 그게 보이십니까, 사장님.”

“나정 선배. 윤주, 그 남자와 사귀는 겁니까?”

“어, 고백받았데. 그러니까 이제 너도 네 인생 살아. 네 부인 얼마나 괜찮고 근사하니? 너만 과거에 묶여 있는 눈먼 장님이야, 손에 들고 있는 보석도 못 알아보고. 그러다 하루아침에 팽 당한다. 그럼 이만.”

나정은 먼저 회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주 입장에서 보면 동혁은 몹쓸 놈이지만 그도 불쌍한 면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윤주와 연결될 일 없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길 바랐다.

이강의 작업실에 도착한 윤주는 마음이 급해서인지 오늘처럼 5층까지 올라가는 게 멀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씩씩거리면서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 이강은 처음 왔을 때처럼 청바지만 입고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채 원단이 잔뜩 쌓인 작업대 위의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작업실 한쪽 면을 잔뜩 차지하고 있는 반신 마네킹에는 옷 대신 원단들만 줄줄이 걸쳐져 있었다.

“아직도 작업이 잘 안 되나?”

그 모습에 걱정이 된 윤주가 안으로 들어갔고 그 순간 딱 이강이 그녀를 바라봤다. 성큼 다가온 이강은 그녀를 있는 힘껏 껴안았고 이젠 윤주도 익숙한 듯 놀라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그를 꼭 안아줬다.

“하아, 살겠다.”

“이러려고 오라고 했니? 나 퇴근 2시간 남겨놓고 반차 냈어.”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이강이 윤주를 품에서 내려놨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뭔가 아주 애틋하면서도 야망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봤다.

“나 좀 도와줘.”

“좋아, 뭘 어떻게 해줄까?”

“그럼 일단 이거부터.”

작업실의 원단 더미를 뒤지던 이강이 윤주의 손에 길게 자른 원단을 쥐여주고 탈의실로 데리고 갔다.

“자, 옷 벗고 이것만 걸치고 나와.”

“이거 그냥 원단이잖아.”

“알아, 옷은 내가 만들 거야. 얼른.”

“그렇지만 이건…… 피팅 모델이라면 내가 소개시켜 줄게. 한국에는 아주 근사한 모델들이 많다고.”

“왔다 간 피팅 모델만 수십 명이야. 근데 못 만들었어. 모든 모델들 얼굴이 전부 당신으로 보이더라고. 그러니까 얼른 좀 해줘.”

“난 모델로 적합한 몸매도 아니고…… 내가 아무리 당신을 좋아해도 이건 좀 곤란해.”

“윤주야, 나 이거 완성하고 싶어. 완성해야 해, 부탁이야.”

곤란한 얼굴로 손에든 원단과 이강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윤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부탁하는 이강은 굉장히 절박해 보였고 손에 든 천 쪼가리는 입기에 난감했다. 갈팡질팡,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낀 이강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내가 직접 해줄까?”

윤주는 자신의 재킷 칼라를 은근하게 만지작거리는 이강의 손을 찰싹 쳐내고 직접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고 최대한 몸을 가리도록 원단을 어깨에 걸쳐 둘렀지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고 막상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빨리 나와라, 서윤주.”

탈의실 안에서 원단만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있던 윤주는 이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밖으로 나갔다.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란색의 실크 원단, 밝은 조명 아래 달랑 원단 하나만 걸치고 있자니 너무나 부끄러웠다.

“저기, 아무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윤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던 이강이 원단 아래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를 벗겨버렸다.

“뭐하는 거야!”

“이래야 실루엣이 자연스러워. 이 예쁜 가슴을 왜 이런 투박한 속옷으로 가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자, 팔 벌리고 움직이지 마.”

지금 이 순간 윤주는 이강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작품을 완벽하게 완성시켜 줄 마지막 조각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 이강은 머릿속에 패턴이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디자인을 만들어나갔다. 시침핀에 찔린 윤주가 움찔하며 움직이자 단호한 일갈이 날아들었다.

“움직이지 마.”

“하지만…….”

“잠깐만 참아.”

시침핀으로 원단을 집어 모양을 만드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주름을 잡아 시침핀으로 고정시키고 때로는 가위집을 넣고 원단을 꼬고, 펴고, 찢고, 이강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원단은 생명을 얻어 하나의 예술품으로 완성되어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