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8화 (18/44)
  • 18.

    “에휴, 냉장고에 진짜 아무것도 없구나.”

    자신의 냉장고를 확인한 윤주가 푹 한숨을 쉬었다. 나정의 배려로 생각지 못한 휴가를 받았다.

    덕분에 잠도 좀 자고 청소도 하고 저녁에 집에 올 이강을 위해서 음식을 좀 해볼까 했는데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재료가 있어야 뭘 만들지. 한심하네.”

    냉장고 문을 닫은 윤주는 식탁에 앉아 메뉴를 고민했다. 이강이 워낙 음식을 잘해서 도대체 뭘 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할 수 있는 거 하자. 한식 좋아하니까 집밥도 괜찮겠지.”

    가장 평범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 된장찌개에 제육볶음 정도는 자신 있었다. 재료를 메모한 윤주는 가벼운 차림에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후덥지근한 한낮의 공기가 식은 오후의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오랜만에 좀 걸어볼까?”

    차를 두고 천천히 골목을 걸으며 윤주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했다. 슬슬 여름이 오고 있다. 다른 집 담벼락의 덩굴장미들이 수줍게 꽃봉오리를 만들고 나무들은 한층 녹음이 짙어졌다.

    이렇게 여유 있게 걸어본 게 얼마 만인지, 윤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좋다, 이강 씨도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이강을 생각하며 혼자 웃던 윤주가 입을 가렸다. 이강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났다. 이런 변화가 자신에게 올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윤주는 이런 자신의 변화가 좀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부지런히 장을 본 윤주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차를 안 가지고 간 걸 살짝 후회했지만 달달한 쭈쭈바를 입에 물고 걷는 것도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좋았다.

    “그래도 좀 빨리 가야겠다. 어깨 빠지겠네.”

    이제 거의 집에 다 왔다. 대문을 보며 신나게 걷던 윤주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고 입에 물고 있던 쭈쭈바가 힘없이 떨어졌다.

    “장 보고 오니? 무겁겠다, 이리 줘.”

    차에서 내린 동혁이 손을 내밀며 윤주에게 다가왔다. 할 말을 잃은 윤주는 동혁이 자신의 짐에 손을 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 손을 쳐냈다.

    “여긴 어떻게…… 설마, 우리 집 알자고 권력 남용했어요?”

    “사장이 직원 이력서 보는데 권력 남용까지 할 필요는 없지. 5년을 사귀었는데 오늘에야 너네 집에 처음 와 본다.”

    “이래서 집안을 선택한 거군요.”

    “윤주야.”

    “오신 이유 말씀하세요, 사장님.”

    “제발, 둘이 있을 땐 그 사장 소리 좀 하지 마! 아니, 아니…… 미안해…… 내가 언성이 높았다.”

    언성을 높였던 동혁이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이 잘못한 거 아는데도 윤주가 자신을 밀어낼 때마다 울컥, 울컥했다.

    “전화도 안 받고 회사에서도 안 보이고 걱정이 돼서 와 봤어. 그때 봤던 남자 누구야?”

    “사장님께 제 개인적인 일까지 말할 이유 없어요.”

    “사장으로 온 거 아니야! 나는, 여전히 네가…….”

    “그럼 남자로 온 거예요? 올 수는 있구요?”

    윤주의 직설적인 질문에 동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주 앞에 누구보다 당당하고 서고 싶었던 건 동혁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했고 졸업반이었던 윤주와 5년 동안 연애를 하며 한 번도 그녀와의 미래를 의심해 본 적 없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녀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너한테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그때가 언젠데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이번엔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건가요? 아니면 재벌가 딸인 부인이 스스로 이혼해 줄 때까지 날 내연녀로 만들래요?”

    “…….”

    “그거 알아요? 선배는 날 참 비참하게, 꼭 상간녀처럼 만들어요.”

    “그런 거 아니냐. 난 아직도 너 사랑해. 많이 사랑하고 생각하고 또…….”

    “그건 선배 미련이죠. 난 선배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더 이상 미워하지도 않아요. 선배와 관계된 모든 것들은 이젠 완벽한 과거예요. 그러니까 선배도 현재를 살아요.”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모두 말한 윤주는 그를 지나쳐갔다.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동혁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게 윤주를 무척이나 힘들게 만들었는데 제발, 동혁이 그걸 좀 알아줬으면 했다.

    “내 말 다 듣고 가.”

    동혁이 지나가는 윤주의 손목을 잡았다. 동혁은 여전히 윤주가 아쉽고, 그립고, 사랑하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 체 아무 감정 없다고 말하는 윤주가 야속했다.

    “이거 놔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내 말 들어. 내 말부터 들으라고.”

    “들을 말 없어요. 이거 놓으라구요. 내 몸에 손대지 마!”

    윤주는 질색하며 어떻게든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고 그럴수록 동혁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벌레 취급하며 피할 때마다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러지 말라구요. 싫어!”

    “윤주 씨!”

    드디어 윤주의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이강이 재빨리 뛰어와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그에게 안긴 윤주는 파들파들 떨고 있었고 이강은 그 이상으로 놀랐다.

    “윤주야, 괜찮아?”

    “……나, 좀…… 여기 있기 싫어.”

    “들어가자.”

    “윤주한테서 손 떼! 당장 손 떼라고! 너 뭔데, 네가 뭔데…….”

    눈이 뒤집힌 동혁이 이강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윤주를 안고, 윤주에게 손을 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이강은 본능적으로 윤주를 보호하기 위해 품으로 감쌌고 사납게 달려든 동혁에게 몇 대 맞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때 악을 쓰고 동혁에게 덤벼든 건 윤주였다. 이강의 품을 빠져나와 동혁을 있는 힘껏 밀어버리고 그 앞에 버티고 선 윤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이 벌게질 정도로 독하게 동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 피부가 아플 정도로 따가운 그녀의 분노가 전해졌다.

    “유, 윤주야.”

    “네가, 네가 뭔데…… 이 사람한테 손을 대……. 네가 뭔데 나한테 손을 대냐구!”

    “윤주 씨, 그만해.”

    “비겁한 새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비겁했던 것도 너고, 내 손 놓은 것도 너야. 근데 왜 네가 피해자 행세를 해!”

    “나는 그저, 널 잊을 수가 없어서, 널 너무 사랑해서…….”

    “사랑, 웃기고 있네. 사람 괴롭히는 게 사랑이야? 넌 사랑을 이따위로 하냐고!”

    윤주의 발악 같은 고함에 동혁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강이 여전히 흥분해 있는 윤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넌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우리 엄마 그렇게 만들고도 그 뻔뻔한 얼굴로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정말로 진이 빠진 듯 윤주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며 다리가 휘청했다. 무너지려는 윤주를 부축한 이강이 그녀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그제야 윤주는 그의 품에 온전히 기대왔다.

    “난 내가 용서가 안 돼. 이럴 때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쉬, 쉬, 그만. 당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이강은 기진맥진 지친 윤주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참고 있던 윤주의 눈물이 그의 품 안에서 터졌고 소리 없는 울음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윤주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녘 동이 서서히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아직은 어둠에 휩싸인 회색 하늘이 보였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이강은 그녀의 옆에서 불편하게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넓은 침대를 그녀에게 양보하고 옆으로 쪼그려 누운 이강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윤주가 그의 등을 꼭 안았다. 그녀의 인기척에 이강이 돌아누웠고 윤주가 다시 그 품에 안겼다.

    “잘 잤어요?”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요, 덩치도 큰 사람이.”

    “나 별로 안 큰데. 아픈 데는?”

    “……없어요.”

    이강은 또 울음기가 가득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와 함께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이강의 입에서 약한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나올 눈물이 남았어? 이제 그만 울어, 나 속상해. 당신 이렇게 울 줄 알았으면 그 새끼 곱게 안 보냈어.”

    “싸움은 할 줄 알고?”

    “태권도만 4단이야. 취미로 복싱도 하고 펜싱 선수도 했었어.”

    이강의 농에 분위기가 잠시 가벼워졌지만 윤주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어제 일을 다 털어버리지 못한 윤주가 이강은 많이 걱정스러웠고 더 이상 마음이 안 다치길 바랐다.

    윤주는 자신의 걱정을 털어내지 못한 이강의 표정을 보며 어렵게 입을 뗐다.

    “어제 일은…….”

    “설명 안 해도 알아.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어. 도리어 내가 더 미안해.”

    “당신이 왜?”

    가벼웠던 이강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강이 안타깝고 그윽한 눈빛으로 윤주를 보며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떼 줬다.

    “연인이라고 말하고도 당신하고 관계에서 한 발 빼고 있었어, 무서웠거든.”

    “이강 씨…….”

    “당신이 좋아. 한 번 보고 한국이란 나라까지 올 정도로 당신은 특별했는데 그걸 인정 안 했어. 깨닫지 못했던 거지. 나 누구 말 안 들어. 우리 부모님도 내 일에는 상관을 못 하시지. 근데 당신 말에는 저절로 마음이, 몸이 움직여. 나 당신 진짜 사랑해.”

    “…….”

    “당신한테 뭘 원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만 알아줘. 그리고 앞으로 나 당신 일에 더 적극적으로 끼어들 거야. 어제 같은 일 또 있으면 그 새낀 나한테 죽어. 나는 내 사람 건드리는 거 못 참아.”

    “……내 사람?”

    “당신이 인정 안 해도 나한테 당신은 이미 내 영역 안에 들어온 내가 지켜야 하는 내 사람이야.”

    윤주는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생긴 것만 같아서 단단하게 굳었던 마음 한쪽이 둑이 무너지듯 푹 무너지며 그 안에 담겨있던 감정들이 마구 흘러넘쳤다.

    윤주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봤다. 우는 거 진짜 안 좋아하는데 이강은 자꾸만 그녀를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 엄마 말고는 날 지켜준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해.”

    “믿어도 돼?”

    “응.”

    “나 상처받기 싫어. 정말, 싫어.”

    “절대 그렇게 안 만들어.”

    “세상에 절대는 없데.”

    “나한테는 있어.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하는 상상도 절대 해본 적 없었어, 당신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나의 약점을 너무 잘 알아.”

    “좋다는 뜻이지?”

    “조금이라도 상처 주면 그대로 차버릴 거야.”

    “이리 와, 안아줄게.”

    이강은 팔을 벌렸고 윤주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아직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단순히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뿐만 아니라 그와는 비밀을 나누고 정신적 교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것을 다 드러낼 정도면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신이 좋은 거 같아.”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이강은 더 힘을 줘 그녀를 안았다. 자신이 갑자기 그녀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던 것처럼 윤주도 언젠간 그녀의 진짜 감정을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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