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7화 (17/44)

17.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세 사람이 작업대에 마주 앉았다. 앞에는 음식과 차가 놓였지만 먹고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그저 멋쩍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이강이 어쩔 수 없이 먼저 나섰다.

“윤주 씨, 인사해요. 이쪽은 내 친구 쟝, 이쪽은 서윤주 씨.”

“쟝 프랑코입니다. 첫 만남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윤주라고 합니다.”

서로 인사를 나눴지만 분위기는 영 풀리지 않았다. 이 새벽에 누군가 이강의 작업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해서 놀란 건 쟝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둘이 잠까지 자는 사이라니,

그저 뮤즈라길래 자극받을 상대 정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쟝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강을 향했지만 그의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기 싸움을 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윤주가 조용히 일어났다.

“음, 저는 이만 가볼게요. 출근 전에 집에도 들러야 하고,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요.”

“택시 타면 돼요. 집에 도착하면 문자할게요. 그쪽, 쟝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만…….”

“이 사람 옆에 좀 있어 주세요. 어제 열이 좀 났거든요. 혹시 또 아플까 봐 걱정이 돼서요. 그리고 식사도 좀, 이틀 동안 내내 굶었데요.”

“아, 네, 뭐, 그러죠”

“이강 씨,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퇴근하고 만났으면 좋겠는데.”

“집으로 올래요? 나 내일은 출근 안 하니까 맛있는 거 해 먹고 놀아요.”

“좋아요. 이따 집으로 갈게요. 뽀뽀는?”

“떽!”

윤주는 뽀뽀를 해달라는 이강의 얼굴을 쭉 밀고 얼른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친구도 와있는데, 첫 만남에 반쯤 헐벗은 모습을 보여 민망해 죽겠는데 이강은 그런 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자꾸 느물거렸다.

이강은 작업실을 나가는 윤주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있다 놔줬다. 그녀와 헤어지는 게 어찌나 아쉬운지, 이강의 눈이 윤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을 꼴사납게 보던 쟝이 목청을 높여 그를 불렀다.

―야, 야!

―뭐?

―뭐야, 왜 이렇게 퉁명스러워. 이 온도차 뭐냐?

―됐고,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둘 중 하날 거라고 생각했지. 너무 안 돼서 열 받아 펄펄 끓고 있거나 너무 잘돼서 쫄쫄 굶고 있거나. 나보다 윤주 씨가 한 발 빨랐네. 근데 윤주 씨 되게 예쁘다, 매력적이야.

―봤어?

―뭘? 얼굴 봤다, 얼굴. 다른 건 아무것도 못 봤다고, 예쁘다고 했잖아, 예쁘다고.

―그만 가, 나 잘 거야.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이강이 침대로 향했다. 디자인만 생각하고 있을 땐 몰랐는데 주변이 환기되고 나니 자신이 꽤 피곤하다는 걸 깨달았다.

―스트레스가 무서워 피하고 있다라…….

―뭐라고?

―쟝, 내가 피하고 있는 걸까?

―알아듣게 말해.

―스트레스가 무서워서 깊게 몰두하는 걸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걸까?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윤주 씨가 그런 말을 했어. 과거의 혹독한 경험 때문에 피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작업대를 정리하던 쟝이 손을 멈추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 이강을 의미심장하게 봤다. 누구의 말에 영향을 받는 이강이라, 쟝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너, 저 여자 좋아하지?

―당연히, 좋아는 하지.

―나 저 여자 뒷조사 들어간다.

―야!

―의례 하는 일이잖아. 저 여자라고 예외일 수 없어.

―홀어머니에 외동딸이야. 어머니는 요양원 계시고 아버지 얘기는 못 들었어. 잡지사 기자고 나이는 나도 몰라.

―집안이 별 볼 일 없다는 말이네.

―너 저 사람 상처 주면 용서 안 해. 진심이야.

이강이 지금까지의 부드러움을 거두고 정식으로 말을 했고 쟝 역시 피하지 않고 정식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글쎄, 상처는 받는 게 네가 될지 서윤주가 될지 그건 누구도 모르지. 멀쩡한 거 같으니까 나는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작업실을 나온 쟝이 피식 웃었다. 제 사람을 지킬 때 이강은 가끔은 잔인하다 생각이 될 정도로 최고로 무서운 모습을 한다.

거역하기 힘든 카리스마와 따를 수밖에 없는 권위, 그건 아버지인 베르기를 꼭 닮아있었는데 평소에 어떻게 저런 모습을 숨기고 사는지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바보 같은 녀석, 누가 그런 게 궁금하댔나.

두 사람을 방해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물론 윤주의 배경을 알고는 있어야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만약 이강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라면 그 누구보다 응원해줄 거다. 다만, 혹시 모를 그 어떤 사건이나 사람들에게서 보호하려면 쟝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야 했다.

―차라리 사랑이라고 말을 해, 대놓고 보호라도 할 수 있게.

흐뭇한 기분으로 건물을 나서는 쟝의 휴대전화가 방정맞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쟝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고 너머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한껏 인상을 썼다.

조용한 사무실에 아침 댓바람부터 동혁이 들이닥쳤다. 덕분에 업무시간 전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직원들이 다들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서윤주 팀장 아직 출근 전입니까?”

“네, 아직요.”

“출근 전에 외부 미팅 있습니까?”

“아뇨, 없어요. 오전까지 기사 마감해서 넘겨야 하는데 아직 오시지 않았네요.”

선애의 대답에 동혁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꽤 오래 참았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이라 사무실까지 찾아왔는데 오늘도 윤주는 자리에 없었다.

“출근하면 사장실로 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서 팀장, 오늘 출근 안 하는데요.”

동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나정의 목소리에 한층 더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안경을 쓰고 태블릿 PC를 든 나정은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를 보는 동혁의 눈엔 불쾌감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편집장님, 서 팀장님 기사는 어떻게 해요, 오늘 마감인데 연락도 없으시고.”

“주제넘네, 이선애. 제가 오늘 하루 휴가 줬어요. 이번 달, 다른 기자 꼭지까지 커버하느라 무리했거든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사장님.”

“저와 따로 말씀 나누시죠.”

“일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정의 나긋한 말에 동혁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동혁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정이 지금까지 궁금증 가득한 시선으로 동혁을 보는 선애에게 다가가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책상에 던지듯 놨다.

“이선애.”

“네, 편집장님.”

“이 뷰티 기사 협찬사들 가격과 조건,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그럼요. 제가 성형외과, 피부과, 피부 관리실, 그 외 업체들 일일이 다 인터뷰하고 전화해서 확인받았어요.”

“확실해? 근데 몇 업체들 가격이 왜 다르지?”

“그, 그럴 리가요.”

“특히 이 피부과 시술이 왜 전부 패키지 가격이야. 이대로 기사 나갔으면 어쩔 뻔했어!”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업체에서 알려주는 가격 그대로…….”

“그래? 그럼 법무팀에서 정식으로 법적 절차 밟아도 되는 거지?”

“그, 그건…… 죄, 죄송해요, 팀장님. ……하도 사정을 해서, 가격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어요.”

“그따위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우리 잡지사의 공신력이 달린 일이잖아! 이번 일 이대로 못 넘어가. 경위서 써오고 징계위 열릴 테니 그렇게 알아. 그리고 담달부터 뷰티 기사 막내가 맡아.”

“편집장님, 그럴 순 없어요. 제가 얼마나 공을 들인…….”

“입 닫아! 이대로 안 잘리는 거 감사한 줄 알아. 막내, 할 수 있어, 없어?”

“하, 할 수, 있습니다.”

“좋아, 밀어줄 테니까 해봐. 모르는 건 언제든 서 팀장한테 물어봐. 잘 가르쳐 줄 거야.”

선애를 뚫어질 듯 쳐다본 나정은 자신의 태블릿을 다시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아침부터 선애 때문에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덕분에 동혁이 찾아와도 아주 잘 처리할 수가 있을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로 갔을 때 동혁이 초조한 듯 그 앞을 서성이며 나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윤주가 연락이 안 되는…….”

“내가 니 연락받지 말라고 했어.”

“선배.”

“넌 결혼했고 윤주는 자기 인생 살아야 하는 애야.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죽으라고 등까지 떠밀래?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떤 남자와 있는 걸 봤는데…….”

“윤주가 남자랑 있든 여자랑 있은 네가 무슨 상관인데?”

“걱정이 돼서 그래요. 괜히 이상한 남자 만나서 고생할까 봐…….”

“그런 걸 상관하고 싶었으면 윤주 손을 놓지 말았어야지!”

“그땐 방법이 없었어요.”

“양쪽 손에 떡 하나씩 나눠서 지고 아무것도 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넌 욕심 때문에 윤주를 버렸잖아.”

나정의 가감 없는 일갈에 동혁의 얼굴이 파삭 굳었다. 그땐 동혁도 완전히 코너에 몰려 있었다. 아버지는 아팠고 그래서 회사는 위태했고 어머니는 울면서 동혁에게 매달렸었다. 그때 윤주가 보이지 않을 만큼 동혁도 힘들었고 위태로웠다.

“너와 네 어머니, 윤주한테 차고 넘치게 잔인했어. 그거로도 부족하니?”

“나도 잘못한 거 알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보상하고 싶어요. 내가 잘못한 만큼 보상하겠다잖아요!”

“보상? 어떻게? 지금이라도 이혼하고 윤주 잡을래? 그럴 수 있어?”

나정의 질문에 동혁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나정은 이혼이라는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동혁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찌질해 보였다.

“너 진짜 구제 불능이구나. 회사에서까지 쫓아내고 싶은 거 아니면 다시는 사무실까지 윤주 찾아가지 마.”

“아뇨, 전 윤주 봐야겠어요. 회사가 안 되면 집으로 찾아가는 건 상관없겠죠.”

“신동혁!”

“선배가 윤주 많이 아끼는 거 알고 있지만 저 역시 선배 이상으로 윤주 많이 걱정하고 여전히 아껴요.”

“그 차고 넘치는 애정은 네 부인한테나 쏟아. 한 번만 더 윤주 건드리면 그땐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반쯤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선 동혁을 두고 나정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뒤로 넘어갈 정도로 열이 받았다.

“에이씨, 짜증나. 확 다른 회사로 가버릴라.”

나정은 손에 든 태블릿을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아슬아슬하게 책상에 걸쳐졌던 태블릿은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다 조만간 저 3번째 태블릿까지 망가져버리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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