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5화 (15/44)

15.

윤주는 점점 심장 박동이 높아졌다. 단순히 육체적 반응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그냥 모든 걸 무시해 버렸다.

‘뭐면 어때, 내가 좋다는데.’

윤주의 가는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그리고 감질나게 가볍게 부딪치던 그녀의 입술이 그와 깊게 맞물렸다. 맞물린 두 입술이 만드는 질척한 소리가 공간 가득 울리고 그 소리에 이강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아플 정도로 윤주의 혀를 빠는 이강의 손이 그녀의 셔츠 안으로 밀어넣었다. 날씬한 허리춤의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 가슴으로 향하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중심부가 그녀의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커다란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감싸려고 할 때 윤주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아, 그만, 여기까지.”

“아니, 왜에.”

“나 배고파요, 밥 먹을래.”

“진짜? 이 타이밍에? 그럴 리 없는데.”

“그럴 리 있어요. 나 오늘 점심도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구요. 말할 기운도 없어.

“잔인한 서윤주, 제발 밥은 그때그때 잘 좀 먹읍시다.”

윤주는 계속 투덜거리는 이강을 두고 뒤돌아섰다. 가뿐한 걸음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웠고 얼굴엔 설핏 웃음까지 돌아와 있었다.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보며 이강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다, 솔직하다 걸음걸이까지 솔직하네. 혼자 너무 신나 하니까 좀 얄미운데?

혼자 중얼거린 이강이 단번에 윤주를 따라잡아 허리를 감쌌다.

“근데 왜 내 말에 대답 안 해?”

“무슨 말이요?”

“연인처럼 친구처럼 지내자니까.”

“그걸 한국말로는 썸 탄다고 하죠.”

“뭐가 됐든, 우리 그거 해. 그거 합시다. 대답은?”

“……좋아요.”

“와, 신난다.”

“근데 아까부터 은근슬쩍 반말이다.”

“누군가 내가 반말할 때 되게 섹시하다 그러던데.”

“귀는 좀 건드리지 말라고.”

이강이 귓속말 끝에 귓불에 입을 맞췄고 윤주가 질색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와, 새로운 성감대 찾았다. 윽!”

계속 장난치는 이강의 배를 윤주가 팔꿈치로 한 대 퍽 치고 작업실을 나가버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깔깔 웃는 이강 역시 작업실을 나가 윤주에게로 갔다.

[공금☞☜]

선글라스를 낀 이강은 바이크에 앉아 윤주가 나올 회사 입구를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만 처박혀 있다가 윤주가 정시에 퇴근한다고 해서 마중 나온 참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던 아이디어는 머릿속에서만 돌아다녔고 하루 종일 그렸다 지웠다만 반복했다. 그러다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윤주가 보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와버렸다.

“나왔다.”

회사 입구를 나온 윤주는 오늘도 무채색의 디자인이 튀지 않는 세미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함께 나오는 동료를 보며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웃음이 흔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녀가 웃을 때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예쁘네.”

누구에게도, 하물며 자기 자신에게도 잘 생겼다, 예쁘단 말이 야박한 이강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강은 주변 공기의 흐름도 잊고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윤주에게 몰두해 그녀만 봤다.

“어, 이강 씨다. 이강 씨!”

이강을 발견한 윤주의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반가운 마음이 숨겨지지 않아서 곁에 나정이 있음에도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이강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그쪽으로 가버렸다.

“윤주 씨.”

“여기까지 웬일이에요? 이 바이크는 뭐고?”

“윤주 씨 마중 왔어요. 바이크는 친구한테 돈 빌려 샀구요.”

“친구한테 또 돈을 빌렸다고요? 작업실도 친구가 얻어준 거라며, 대책도 없이…….”

“우리 아가씨, 지금 내 걱정하는 거예요? 예쁘기도 하지. 내 걱정은 말고 밥 먹으로 가요. 맛있는 거 사줄게. 맞다, 점심은 제대로 먹었어?”

“말 돌리지 말고, 진짜 친구한테 빌린 거 맞아요? 혹시 어디서 막 사채 빌리고 그런 거 아니죠? 그 친구 사기꾼은 아니고?”

“풋, 아무튼 상상력하고는. 그 친구가 우리 부모님이랑도 잘 알아요. 내가 못 갚으면 아마 부모님께서 갚아주실…… 아! 왜 때리는데?”

“진짜 철없는 소리 하고 있어. 나이가 몇 갠데 부모님께 의지할 생각이나 하고.”

멀리 떨어진 나정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것도 신경 안 쓰고 단숨에 남자에게 가버리더니 이건 사랑을 하는 건지 싸움을 하는 건지 주변 사람들 시선도 의식하지 못하고 둘이 꽁냥거리고 있었다.

“어쭈, 저것들 봐라.”

나정의 날카로운 시선이 윤주를 떠나 이강에게 향했다. 이강이라는 남자는 한 마디로 근사했다. 잡지사에서 오래 일한 만큼 더 이상 감흥이 없을 정도로 멋진 남자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저 남자는 독보적이다. 잘생기고, 몸매 좋고, 비율 좋고, 매력적인 데다 분위기까지, 모든 게 너무 근사했다.

“지나친 건 독인데, 그럼 좀 알아봐야겠지?”

나정은 부러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고 윤주의 머리에 헬멧을 씌우려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이강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안녕하세요.”

“누구, 십니까?”

“박나정이에요. 서윤주의 직장 상사이자 대학 선배, 그쪽은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강이라고 부르세요. 서윤주 씨 동거인입니다.”

“아, 그분이시구나? 이태리에서 오신 막무가내 동거인.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바쁘지 않으면 우리 저녁 같이 할까요? 내가 살게요.”

“좋습니다.”

“아뇨! 편집장님, 저녁은 다음에 제가 살게요. 저희가 오늘 음, 그러니까…….”

“쯧쯧, 우리 윤주 거짓말도 못 하고 순발력도 달리고, 저 성격에 인터뷰 잘하는 거 보면 참 신기해.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제대로 된 한정식을 먹어보고 싶습니다.”

“잘됐네요. 이 근처에 제대로 하는 한정식집이 있어요.”

나정은 자연스럽게 이강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난감한 윤주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르자 이강이 손짓으로 불렀다.

“정 내키지 않음 넌 오지 마. 우리 둘이 가면 더 재미있을 거니까.”

나정의 저 한 마디에 윤주가 입을 삐죽 내밀고 터덜거리며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나정에게 잡힌 이상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아주 길고 불편한 식사 시간을 가지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윤주의 머리를 스쳤다.

세 사람 앞에 떡 벌어지는 한정식 한 상이 차려졌다. 은행과 밤, 대추 등 여러 가지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영양밥에 돌판에 구워지고 있는 떡갈비, 고명이 곱게 올라간 도미찜과 연저육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근사한 음식들이 상을 그득 채우고 있었다.

“와, 한식은 정말 근사하군요.”

“우리 윤주가 이런 것도 대접을 안 하던가요?”

“윤주 씨가 많이 바쁘더라고요. 퇴근도 매일 늦게 하고, 주말에도 나가버리고.”

“우리 일이 그래요, 마감이 걸리면 잠잘 시간도 없는 걸. 대신 다음 주부터는 한가하니까 같이 놀아요. 3일 정도는 편집장 권한으로 특별 휴가 줄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편집장님. 휴가 안 주셔도 되니까 얼른 식사하세요.”

“왜, 휴가라도 내서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우리나라는 근사한 음식만큼 풍경 멋진 곳도 많아요.”

“그 말을 들으니까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네요.”

“내가 몇 군데 추천해줄까요?”

“그럼 감사하죠. 이왕이면 바이크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걱정 마세요, 코스별로 쫘악 보내줄게요. 그러려면 연락처가 필요하겠죠?”

나정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내밀었고 윤주가 방해할 사이도 없이 이강이 그걸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윤주는 두통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음식에만 집중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저들의 대화에 자신까지 꼈다간 대화는 더 길어지고, 산만해질 것이 자명했다.

수북하게 뜬 윤주의 숟가락 위에 생선살 한 점이 올라왔다. 나정하고 이야기하느라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의 시선엔 계속 윤주가 있었나 보다.

“생선도 좀 먹어요. 계속 나물만 먹잖아.”

“나 생선 안 좋아하는데.”

“고기도 안 좋아하고, 생선도 안 좋아하고. 당신 식단에는 문제가 있어.”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았어요.”

“흐음, 건강하다면서 퇴근하고 들어오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고 하는구나.”

“그거는…….”

“쉿, 밥풀 튄다. 꼭꼭 잘 씹어 먹어요.”

이강은 계속 따지고 다는 윤주를 애기 다루듯 달래 그녀의 입에 밥을 넣어줬다. 뾰로통하면서도 윤주는 그 밥을 받아먹었고 이강은 그런 윤주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던 나정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놨다. 앞에 앉은 자신도 의식하지 않고 둘이 꽁냥거리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흐음, 아까도 그러더니…… 딱 하는 짓은 연인인데.’

드디어 윤주가 연애하는 걸까? 동혁과 헤어진 후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않던 윤주였다. 물론 동혁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기도 했지만 윤주 스스로 현실 핑계를 대며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일, 일, 엄마, 또 일, 일에 미친 사람처럼 지난 몇 년 윤주는 경주마처럼 그렇게 일만 하며 지냈다. 그런 윤주에게 저 남자는 과연 적당한 상대일까? 나정은 성격대로 직설적으로 물었다.

“우리 윤주 좋아해요?”

“언니!”

“왜 이렇게 발끈하지, 두 사람 엄청 다정해 보여서 물은 건데? 아님,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다정하고 그런 성격이에요?”

“성격이 모나진 않았지만 아무한테나 다정하진 않죠.”

“그 말인즉 우리 윤주한테 특별한 감정이 있다, 그 뜻인가요?”

“언니,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 사람 곤란해하잖아.”

“윤주 씨 말로는 우리가 썸 타는 사이라고 하던데요.”

“썸? 써엄? 나이 서른 훌쩍 넘어 써엄? 풋, 어이가 없다.”

나정은 생각도 못한 대답에 폭소를 터트렸다. 살아생전 윤주가 썸 타는 걸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저 남자의 눈빛이 사랑보다는 2%로 부족했던 걸까? 썸은, 한 발 담그면 사랑이고 한 발 빼면 이별이니까, 과연 그런 관계의 선택은 누가 먼저 한 건지가 정말 궁금했다.

“이탈리아 분이시라면서 한국말 잘하시네요.”

“어머니가 한국 분이야. 동생도 한 명 있고 부모님 두 분 다 건강하시데. 지금은 장기 휴가 중이고 원하면 언제든 회사 복귀 가능. 또 뭐가 궁금해, 언니?”

“내가 걱정이 많아요, 윤주에 한해서.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윤주 씨 옆에 좋은 분이 계신 거 같아 도리어 안심입니다.”

“오케이, 여기까지. 맛있게 먹어요. 알아야 할 거 대충 알았으니까 나는 먼저 실례할게요.”

“같이 드시죠.”

“으음, 절제하지 않으면 이렇게 뛰어난 몸매는 유지할 수 없답니다. 운동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죠. 서윤주, 내일은 쉬어도 좋아. 오랜만에 권력 남용 좀 하지, 뭐.”

나정은 계산서를 들고 식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건 여기까지, 대충 알고 싶은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아, 마지막으로 정확한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성까지, 풀네임. 이강은 이태리 사람 이름 같지는 않은데, 별명이에요?”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테오 이강 쉔브룩, 제 풀네임입니다.”

“이름도 근사하네요. 진짜로 가요.”

나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윤주는 그대로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완전히 기운이 쭉 빠져 완전히 밥맛이 달아나 버렸다.

“저분, 윤주 씨를 굉장히 아끼시네요.”

“저 언니는 내가 아직도 어리바리한 대학교 1학년인 줄 알아요. 그땐 내가 진짜 순진했거든요.”

“운이 좋은 사람이네, 서윤주.”

이강이 윤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생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3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외로운 윤주 옆에 그녀를 진정 걱정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안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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