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4화 (14/44)

14.

윤주가 출근하자마자 이강도 집을 나섰다. 그가 나서자마자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도착했고 이강이 타기 전 쟝이 조수석에서 내려섰다.

―왜, 차 문이라도 열어주려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됐고, 얼른 타. 궁금하다.

―암요, 암요.

다시 조수석으로 오르려는 쟝의 목덜미를 잡은 이강이 그를 뒷좌석에 태우고 자신이 그 옆에 앉았다. 이강이 운전석을 바라보며 눈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여기 있는 동안 도와줄 친구야.

―신원보증은?

―다 알아봤고 계약도 꼼꼼히 했어.

―두고 보면 알겠지. 작업실은 여기서 멀어?

―가까운 곳에 얻으라며. 분부대로 했어.

이강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꽤나 시니컬하게 굴었지만 쟝은 익숙하다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믿지 않고 타인에게 배타적인 모습이 쟝에게 익숙한 이강의 본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새로 얻은 작업실에 도착했다. 쟝의 말대로 윤주의 집과는 차로 약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차에서 내린 이강이 건물을 전체를 눈으로 훑었다. 5층짜리의 낡고 붉은 벽돌 건물, 주변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가로수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내부는 모르겠지만 외관은 마음에 들었다.

―괜찮네. 건물 전체를 산 거야?

―급매물이라 시세보다 30프로나 싸게 샀어. 너 작업 끝나고 되팔면 적어도 반은 남길 수 있어. 4, 5층 비워놨어. 작업실은 5층이야. 참고로 이 나무들은 벚나무래.

―유능하기도 하시지, 우리 비서실장님.

이강은 여전히 변죽을 울리는 쟝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과 달리 건물 내부는 새로 리모델링을 했는지 깨끗하고 신식이었다.

―참고로 엘리베이터는 없어.

―작업 시작하면 당분간 외출 안 할 거니까 상관없어. 아, 윤주 씨 오려면 힘들려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쟝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쟝이 앞서가는 이강의 팔을 잡았다.

―그 여자를 여기 들인다고?

―안 될 이유 있어?

―그 여자 진짜 너한테 특별한 거야? 작업실에 들일 만큼?

―풋, 뭐가 이렇게 심각한데? 내가 남자 만난다는 말보다 더 놀란다?

―농담하지 마. 작업할 때는 부모님은 물론 안드레아도 못 오게 하잖아. 네 작업실에 드나들었던 사람은 지금까지는 아무도 없었어.

―그랬나? 이젠 기억도 안 나네.

이강은 쟝의 팔을 툭 밀어내고 다시 위로 올랐다. 쟝은 그 앞을 다시 막아섰다. 가볍게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너 그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앞서가지 좀 마. 그 여자는 음, 그래, 특별해. 그 정도야.

―네 결혼은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

―언제부터 이렇게 잔소리쟁이가 된 거야. 저리 비켜.

이강은 쟝이 쓸데없이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를 밀쳐내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랐다.

회사에서 아직 표면적으로 그가 나서지는 않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지극히 사적인 일인데 그런 것까지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강이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무슨 일이든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건 정말 체질에 맞지 않는다.

작업실 내부는 생각보다 무척 넓었고 쾌적했다. 높은 층고에 오픈 마감이라 붉은 벽돌이 주는 빈티지하고 거친 느낌이 작업실 내부를 채우고 있었는데 딱 마음에 들었다.

쟝이 꼼꼼하게 신경 쓴 듯 작업 테이블이며, 컴퓨터, 여러 가지 디자인 도구들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다.

작업공간과 분리된 거주 공간에도 작은 침대와 옷장, 간단한 요리가 가능한 간이 부엌과 냉장고 등의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본 이강은 한쪽 벽에 크게 차지하고 있는 창문으로 갔다. 창문을 활짝 열자 텁텁한 서울의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멀리 흐르는 한강이 보이고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자란 가로수가 보였다. 창밖을 보고 선 이강의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 들어찼다.

―마음에 들어. 고맙다.

―뭐, 이 정도는 기본이지. 원단은 어떻게 할래? 아무래도 본사에서 공수…….

―아니, 일단 모든 건 한국에서 해결해볼 거야. 윤주 씨한테 물으면 도움받을 수 있을 거 같아.

―근데 그 여자 직업이 뭐야?

―…….

―내가 알아내? 그렇게 되면 내 손 안에게 그 여자 신상이 다 들어올 텐데.

―잡지사 기자야. 패션 잡지.

―야!

―미국에서 지낼 때 내가 먼저 그 여자한테 다가갔어. 윤주 씨 내 이름 보고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고. 돈 없다는 말에 집에서 지내게 해준 거 보면 몰라?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 있지.

―그렇게 영악하지 못해. 그 여자는 뭐랄까, 그냥 말하는 대로 믿어. 사람에 대한 촉은 너보다 내가 한 수 위야.

―그건 인정, 그래도 난 그 여자 계속 의심할 거야.

―그 여자 이름은 서윤주야.

―뭐?

―이름 서윤주라고. 예의는 지키자.

이강이 쟝의 어깨를 툭 치고 작업대로 넘어갔다. 예쁘게 잘 깎인 연필 하나를 들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아직은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떠다니고 있지만 딱 하나 물꼬만 터지면 그 뒤로는 줄줄 아주 잘 풀려나갈 것이다.

“예감이 좋아.”

흐뭇한 얼굴로 서 있는 이강을 보는 쟝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단순히 뮤즈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강은 지금 그 여자에게서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슬슬 좋은 여자 만나 가정을 이루면 아주 좋겠지만 그 전에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

거기다 서윤주라는 여자는 아직 검증도 안 됐고 사귀던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다면 감정적 타격은 이강이 더 클 것이다.

예술을 해서 그런지 이강은 특히나 감정적 데미지를 잘 견뎌내지 못했다.

―제발, 아프지만 마라.

쟝이 바라는 건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린 이강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거였다.

* * *

이강의 손에 이끌려 그의 작업실에 도착한 윤주는 차분한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운치도 있고 위치도 좋고 깔끔하면서도 거친 느낌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직업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면 자신이 꼭 가지고 싶었던 작업실이었다. 작업대에 살짝 걸터앉은 윤주는 차를 만들고 있는 이강을 봤다.

“돈 없다는 말, 거짓말이죠?”

“그땐 진짜였어요. 나 거짓말은 정말 잘 안 해요.”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나?”

“음, 곤란한 건 대답 안 할 거예요. 그건 거짓말 아니니까.”

“직업이 뭐예요?”

“디자이너예요. 패션디자이너, 그래서 윤주 씨가 좀 도와줘야 하는데.”

“패션디자이너?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데요? 그쪽은 내 전문인데.”

“직업은 얘기했으니까 다음 질문.”

“가족…… 아니에요. 다른 건 알 필요가 없네요.”

이사까지 가고 나면 끝, 그런 마당에 이 남자의 개인적인 것들을 알아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당신이 내 연인이라고 한 주제에, 뭐랄까 좀 섭섭하달까? 작업실을 얻는 것도, 이사를 할 것도 다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혼자 결정할 일이란 걸 알면서도 먼저 의논해주지 않은 게 좀 섭섭하고 이젠 그와도 끝이란 생각에 거리감도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던 윤주가 퍼뜩 놀랐다. 관계라고 말할 것도 없는 관계인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이 남자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같이 지내는 며칠 동안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윤주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는 언제 해요?”

기분 좋게 찻잔을 가지고 오던 이강은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는 거리감에 이강의 표정이 좀 흔들렸다.

“주말에 하긴 할 건데…….”

“그럼 난 없겠네요. 여권은 오늘 바로 돌려줄게요. 난 이제 집에 갈 건데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 건가요?”

이강은 대답 대신 윤주의 손을 잡아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혔다. 윤주는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강은 놔주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정도 멀어지는 게 전부였다.

“이것 좀 놓죠.”

“난 3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시고 엄마가 한국분이세요. 덕분에 어릴 때 잠깐 한국에 살았어요. 그리고 회사는…….”

“궁금하지 않아요.”

“들어줘요, 윤주 씨가 나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어요.”

“왜요? 우리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요.”

“내가 말했잖아요, 지금은 당신이 내 연인이라고.”

윤주는 말을 멈추고 이강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고 이강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높아지던 긴장감은 이강의 말로 사라졌다.

“나는 윤주 씨와 계속 잘 지내고 싶어요.”

“잠자리할 여자가 필요해요? 그런 거라면…….”

“윤주 씨가 날 그렇게 생각했단 뜻입니까?”

“아니에요!”

“근데 왜 나한텐 그런 말을 해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에 손을 올린 윤주가 힘없이 책상에 털썩 걸터앉았고 이강도 별말 없이 그냥 그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윤주가 손을 내렸다.

“미안해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요. 이강 씨가 이사 간다니까 괜히 섭섭하고 멀어지는 것 같고.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감정 느끼는지 내가 너무 웃기고, 그냥 복잡해요.”

“혹시 우리 사이를 정확하게 규정짓고 싶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난 지금 연애할 마음도, 여유도 없어요.”

“그럼 당분간은 지금처럼 지내는 거 어때요? 친구나 연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서로 나누고 조금 가깝게. 나도 더 이상 강요는 안 할게요.”

윤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고 슬쩍 미소를 지은 이강이 그런 윤주를 확 끌어당겨 자신의 다리 사이에 세웠다.

“꾸엑! 놀랐잖아요.”

“꾸엑? 꾸엑! 푸하하하하, 재밌네. 당신, 정말 재미있어.”

“매번 놀라게 하니까.”

이강이 새초롬하게 자신을 째려보는 윤주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어깨를 때리는 그녀의 눈길이 더 매서워졌지만 이강은 상관없이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마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거야. 그만, 그만해요. 아, 쫌, 진짜!”

이강은 반항하는 윤주의 얼굴을 딱 잡아 그대로 입술로 직진했고 단번에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여자의 립스틱 맛도, 냄새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키스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윤주는 그것도 예외였다.

윤주의 입술이 입속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다. 억지로 벌리고 들어간 입안도 달콤하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혀는 레몬만큼 상큼한 것 같다. 도망가려는 윤주의 머리를 잡고 허리를 더 꼭 끌어안고 혼자만의 키스를 꽤나 오래 했다.

“왜 같이 안 해줘?”

“너무 막무가내야.”

“나 많이 참는 건데. 당장이라도 안고 싶어. 그러니까 이젠 당신이 해줘.”

이강은 눈을 감고 그녀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강은 자신의 목을 꼭 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스해주는 윤주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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