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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12화 (12/44)
  • 12.

    대문 앞에 멈춰 선 윤주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이강에게 자신의 엉망인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침울한 기분이 드러난 표정을 숨기고 살짝 번진 화장도 손을 봤다.

    심호흡 몇 번을 한 윤주가 차에서 내렸고 대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처참히 일그러졌다.

    “일찍 왔네요? 꽃들 예쁘죠? 저기 나무 한 그루도 심었어요. 단풍나무에요. 여름에는 파랗고 가을에는 빨갛게, 상상만 해도 예쁘겠죠? 아, 주황색 꽃은 안 심었어요. 그래서 꽃 고르기 진짜 힘들었어요.”

    이강은 자신이 심어 놓은 나무와 꽃들을 자랑하는 사이 화를 참는 윤주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이리저리 파헤쳐진 정원, 엄마와 함께 죽어버린 그곳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았고 또 변해버렸다.

    “조금 늦은 봄이라 꽃이 예쁘게 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쁠 거예요. 꽃이잖아.”

    이강의 목소리가 수경의 목소리와 겹쳤다.

    ‘윤주야, 엄마 좀 도와달라니까? 오늘 꽃 심는다고 했잖어.’

    ‘나 바빠.’

    ‘기지배, 야박하기는.’

    ‘엄마가 더 이상해. 매년 다시 심어야 하는 꽃은 왜 심는 거야, 귀찮게. 차라리 채소를 심어, 그럼 따먹기라도 하지.’

    ‘얼마나 예쁜데. 심어 놓은 거 보면 지도 좋아하면서.’

    ‘맞아, 예쁘기는 해.’

    ‘얼른 서두르자.’

    ‘엄마 다 했어. 예쁘지?’

    ‘어.’

    ‘좀 보고 말해라, 눈동자 한 번 움직이는 게 힘들어?’

    ‘예뻐, 예뻐. 한두 해 보는 꽃이냐고.’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매년 얼마나 고심해서 꽃을 고르는데. 네가 주황색 싫어하는 바람에 심지 못하는 꽃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럼 그냥 심어.’

    ‘왜, 또 그때처럼 똑똑 따버리게?’

    ‘에이 씨, 그게 언제 적인데?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그런 거 가지고, 이제 안 그래.’

    ‘에이 씨? 너 지금 엄마한테 욕한 거야?’

    ‘그게 무슨 욕이야, 이건 그냥 추임새야, 추임새.’

    ‘너 이리 와. 너도 얘들처럼 물 마시고 정신 차려.’

    ‘으아, 엄마 차갑잖아. 아직 봄이라고! 내 책, 내 책 젖어!’

    화단을 꾸미던 수경은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윤주에게 물을 뿌리고 두 사람은 한참을 장난쳤었다.

    매년 봄이면 수경은 꽃을 심었다. 꽃을 마당 가득 심어놓고 윤주에게 자랑했었다. 그런 날이면 봄나물 가득한 밥상을 차려서 달래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 쓱쓱 비벼 먹기도 했었다.

    그게 윤주와 수경의 봄을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수경이 아프고 난 이후 마당은 죽어버렸다. 윤주가 물을 주고 비료도 줬지만 주인이 바뀐 걸 아는 건지 꽃과 나무들은 하나, 둘씩 시들시들 말라 죽어갔다.

    그게 마치 그동안 한 번도 엄마를 돕지 않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 같아서 그녀의 죄책감을 더 부추겼다.

    그런데 저 남자는 꼭 그녀의 아픈 속을 건드리고 만다. 윤주는 점점 더 얇아지는 자신의 인내심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대체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예요?”

    “이번에도 내가 뭘 잘못한 건가요? 나는 마당이 너무 휑하고 쓸쓸해 보여서…….”

    “제발, 뭘 하기 전에…… 그쪽은 여기 겨우 며칠 머무르는…… 사람…….”

    “윤주, 씨? 윤주 씨!”

    과호흡이었다. 수경이 아프고 난 후 윤주가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끔 이런 증상이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윤주의 어깨를 이강이 덥석 잡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를 도우려 했지만 윤주는 계속해서 그를 밀어냈고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가만히 있어요. 안 그러면 위험해!”

    이강이 포박하듯 윤주를 뒤에서 안았고 제 두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윤주였지만 결국 그의 힘에 굴복해 얌전해졌다.

    “천천히 숨을 쉬어요. 하나, 둘, 셋, 더 천천히, 천천히. 괜찮아요. 다시 하나, 둘, 셋 옳지 잘하고 있어요.”

    이강의 말을 따라 윤주의 호흡이 점점 가라앉았다. 호흡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윤주의 몸이 축 늘어지는 걸 느낀 이강은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집 안으로 옮겼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 재킷을 벗기고 벨트에 손을 올렸다.

    “딴생각 안 해요. 몸을 편하게 해주려는 거예요.”

    불편해 보이는 겉옷도 벗기고 다소 진정이 된 윤주 앞에 이강이 앉았다. 호흡은 좀 가라앉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이강은 어쩔 줄 몰랐다.

    “윤주 씨, 눈을 좀 떠봐요. 괜찮아요?”

    “…….”

    “어, 음, 저기 이번에도 내가 뭔가 잘못한 거 맞죠. 나는…… 정말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윤주 씨한테는 정말 많은 실수를 하네요. 아무래도 내가 없는 게 낫겠어요. 지금 내가 나갈게요.”

    이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집에서 머무르겠다는 생각은 즉흥적이었다. 그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상상력을 위해, 상상력과 창작을 위해, 자신을 자극하는 윤주 옆에 있기 위한 굉장히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그녀에게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거 같았다.

    윤주가 겨우겨우 올린 손으로 힘겹게 멀어지는 이강의 손을 잡았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은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 상대가 낯선 이강이라면 더 완벽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돌아 나가던 이강은 자신을 잡는 손길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새 눈을 뜬 윤주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윤주의 손을 고쳐 잡은 이강은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윤주가 조용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마당은…… 우리 엄마 공간이에요. 우리 엄마는 화단을 가꾸는 것으로 봄을 시작했어요.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맛있는 밥을 해 먹고, 난 그 옆에서 구경하고 그게 우리의 봄이었어요.”

    “행복했겠네요.”

    “그땐 행복한 줄 몰랐어요. 그냥 아주 흔하디흔한 일상이었으니까. 우리 엄마도 나 때문에 주황색 꽃을 못 심는다고 투덜거렸어요. 내가 초등학교 때 주황색 꽃만 골라서 따버렸었거든.”

    그 말을 마친 윤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얼른 그 눈물을 닦아 버렸다.

    “내가 왜 먹지도 못하는 꽃을 심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내 딸처럼 예쁜 꽃이 좋다고. 알록달록 피어있는 꽃을 보면 우리 윤주 같다고. 그렇게 예쁘고 좋은 우리 엄만데, 나한테 좋은 말만 해주고 사랑만 줬는데 그랬던 엄마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결국…….”

    그 말끝에 윤주는 울음을 터트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지켜보던 이강이 윤주를 소중히 품에 안았고 그러고 나서야 윤주는 제대로 울기 시작했다. 물론 큰 소리를 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참고 있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고 이강은 힘줘 그런 윤주를 안았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침대에 마주 보며 누워있었다. 이강은 눈이 퉁퉁 부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어머니 얘기 더 해봐요.”

    “내가 잠을 못 자면 우리 엄마가 이렇게 머리를 만져줬어요.”

    “모녀 사이가 좋았군요. 착한 딸이었겠어요.”

    “아뇨, 나는 무척이나 이기적이었어요. 항상 시간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공부도 해야 했고 친구랑도 놀아야 했고, 엄마는 항상 가장 마지막이었어요.”

    “그 나이 땐 다 그러지 않나?”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 엄마한테 근사한 집도 사주고 같이 여행도 자주 가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 엄마는 지금 요양원에 있어요. 바로 나 때문에.”

    “그런 자책은 좋지 않아요. 윤주 씨가 그런 마음으로 사는 거 알면 슬퍼하실 거야.”

    “나 때문에 맞아요. 우리 엄마 나 때문에 쓰러졌고, 뇌경색 때문에 치매가 왔거든요.”

    그 말끝에 윤주의 목소리엔 다시 물기가 끼어들었다. 쓰러진 수경을 발견했을 때 그때의 심정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우리 엄마 치매예요. 내 얼굴도 못 알아봐요. 욕해도 좋고, 화내도 좋고 다 좋은데 제발 우리 엄마가 내가 누군지 좀 아셨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정말 잘할 건데. 너무 후회돼요.”

    “살면서 누구나 후회는 해요.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럼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크게 후회하는 거 한 가지만 말해 봐요.”

    “음…….”

    “거봐, 대답 못 하잖아.”

    “당신을 지금 만난 거?”

    “그런 말은 당신 여자친구한테나 해요.”

    “지금은 당신이 내 연인인데.”

    “말도 안 돼…….”

    생각지도 못한 이강의 말에 윤주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강과의 관계는 뭐랄까, 가벼운 일회성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섞인 관계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피하고 싶어요?”

    반쯤 몸을 일으킨 윤주를 이강이 잡았다. 가볍게 넘기고 싶었지만 이강은 확신에 찬 눈으로 윤주를 오롯이 바라보고 싶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 걸까? 윤주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이강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닿고 잠시 음미하듯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윤주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상관 안 해, 그건 당신 마음이니까.”

    차갑게 말한 윤주가 이강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감정은 느껴지지 않은 육체적 접촉에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잠시 거리를 벌린 이강이 윤주를 바라봤다.

    말은 냉정했고 표정은 차가웠지만 숨길 수 없는 감정의 혼란과 고통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야?”

    “……지금은.”

    끊어질 듯 이어진 그녀의 말에 이강이 그녀를 안으며 그대로 키스를 했다. 잔뜩 입을 벌리고 자신을 원하는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그녀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과 온기에 위안을 느낀 윤주 역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키스는 순식간에 깊어졌다. 깊게 얽히는 호흡도, 서로의 입을 넘나드는 혀도,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타액과 함께 주변 모든 게 뒤죽박죽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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