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0화 (10/44)
  • 10.

    커피숍 앞 화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이강이 활짝 웃으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기엔 검은색 세단에서 내리는 깔끔한 양복 차림의 쟝이 있었고, 이강을 발견한 그는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했다.

    “저 답답한 인간.”

    잔머리 하나 없이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장시간 비행에도 구겨짐 하나 없는 양복과 손에 들고 있는 서류 가방까지 빈틈없는 그의 차림새가 꼼꼼하고 깐깐한 쟝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에 비해 편한 차림의 이강은 정말로 자유로워 보였다.

    ―쟝, 안녕.

    ―안녕하십니까, 테오 님.

    ―제발, 그 님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둘이 있을 땐 친구로 지내기로 했잖아, 옛날처럼.

    ―지금 제가 테오 님을 친구로 대하면 넌 나한테 죽습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그 ‘님’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럴래? 그럼 내 어퍼컷 먼저 맞고 시작할래? 아주 늘씬하게…….

    종알종알 잔소리하는 쟝을 이강이 덥석 안았다.

    ―반갑다, 친구.

    ―너는 정말…….

    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년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친구가 건강하게 눈앞에 나타나 준 게 정말 반가웠다. 쟝과의 재회가 반가웠던 건 이강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만났고 중, 고, 대학까지 함께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취직할까 고민하는 쟝을 이강의 아버지인 베르기가 스카우트했다.

    쟝의 고지식하고 정직한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던 베르기는 쟝이 독특한 제 아들들 옆에 있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한 거였다. 그때 이강은 무척이나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3일 정도 고민을 하던 쟝은 베르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봐, 친구. 난 야망이 있어. 평사원으로 시작해 회장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 회사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거야.’

    저 말이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담일 것이다. 이강과 오랜 시간과 추억, 기억을 공유한 쟝은 아마도 그의 옆에서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걸 거다.

    ―이제 좀 떨어지자.

    ―누가 프랑스인 아니랄까 봐 냉정하기는.

    ―그럼 넌 이탈리아인이라 질질 흘리고 다니냐?

    ―내가 언제…….

    ―안드레아한테 전화해. 아님 메시지라도 남기든지.

    ―한계야?

    ―한계는 진즉에 지났어. 이미 화산 폭발했다고. 회장님께서 간신히 누르고 계시기는 하는데 길어야 3일이야.

    ―……그 녀석, 건강하지?

    ―건강은 하지, 너무 건강해서 아주 성질이……. 넌 내가 그동안 그 녀석한테 어떤 테러를 당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어깨를 부르르 떠는 쟝을 보며 이강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생을 떠올렸다.

    겨우 3살 어린 동생,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예민하고 날카롭고 덕분에 남들에겐 상대하기 힘든 그저 까다로운 아이였다. 그런 안드레아가 부모님보다 더 잘 따르는 존재가 이강이었고, 이강은 어느새 안드레아의 형이자 보호자, 보호막이 되어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어, 그것도 아주 엄청.

    ―하지만 그 녀석…….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닥쳐. 다 지난 일이야.

    그 말에 이강은 씁쓸하게 웃었고 쟝은 안타까웠다. 아직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강의 상태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여전히 크지 못한 어린아이, 두 형제 모두 과거에 갇힌 어린아이들이었다. 쟝이 이강의 머리를 툭 쳤다.

    ―네가 제일 잘못한 게 뭔지 알아? 안드레아를 감당할 수 없는 응석받이로 만들었다는 거야.

    ―너는 뭐 다를 줄 알아? 너 별명이 유모라며? 안드레아 유모.

    ―야! 그거야 어쩔 수 없이…….

    ―나 작업실 얻을 거야, 여기에.

    ―……진짜? 진짜 다시 작업할 거야?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

    쟝이 진짜로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이강이 디자인 작업에서 손을 뗀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예술 하는 사람들이 슬럼프를 겪는 건 다반사지만 3년이 지나가며 이강의 부모도, 또 회사와 안드레아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나 있게 될 거 같은데? 잘될 거 같아?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 언제부터 발표 가능할 거 같은데?

    ―워, 워, 천천히 하자. 당장은 작업을 하고 싶다, 할 수 있겠다 정도야. 음, 하나 더 생각난 게 있는데 그건 나중에. 작업에 속도가 좀 붙으면 그때 자세히 말할게.

    ―제발 번갯불에 콩 볶듯 사람 볶아치지 말고 지금 말을 해. 계획해 놓고 엎어지는 게 차라리 나아.

    이강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구체적인 건 아니었다. 그냥 윤주를 보고, 윤주 옆에 있으면서 많은 상상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다시 디자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생각인데 현실로 해낼 수 있겠단 자신은 아직 없었다.

    ―아직은…….

    ―말하라고. 구체적인 건 내가 만들 테니까 그냥 말해.

    ―여기서 단독 패션위크를 해보면 어떨까 해서.

    ―여기, 서울에? 서울에서만?

    ―응, 지금 진행되는 패션위크들은 이미 포화상태고 매너리즘에 빠진 지 오래잖아.

    ―너 지금 네가 하는 그 말이 회사, 아니 패션 시장에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 생각은 해본 거야?

    ―글쎄…….

    ―알겠지만 전 세계 명품 패션 회사의 반 이상을 우리 그룹이 소유하고 있어. 그 말인즉, 우리 회사의 결정에 전 세계 패션 판도가 바뀐다는 말이고. 이사회를 설득해 네 말대로 했다 치자. 성과가 좋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책임질 자신은 있는 거야?

    ―그렇다고 언제까지 안전성만 추구하고 있을 건데? 그 시장은 더 이상 메리트가 없어. 그리고 꼭 빠져야 할 이유는 없지.

    서로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이강이 한 말이 몰고 올 파장은 단순히 그들의 그룹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계에 부딪힌 많은 대기업들이 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아시아도 이젠 한계가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아시아 역시 소비시장으로선 포화상태인 분야가 있지만 패션은 말이 좀 다르다.

    큰 소비시장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창조시장은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은 좋지만 지금까지 유지하던 안정성까지 버리는 건 너무 큰 도박이었다.

    ―일단 가볍게 패션쇼부터 하는 건 어때? 너 작업 속도 보고, 가을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아, 그걸 아셨구나. 아시는 분이 패션위크 말을 꺼내셨구나. 그냥 한 대만 맞자. 너 이렇게 얄밉게 굴 땐 안드레아와 똑같아.

    ―그건 너무 큰 욕이잖아.

    ―테오 님, 이제 실내로 들어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강은 뒤돌아 가버렸고 쫓아온 쟝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차에 태웠다.

    ―어딜 내빼. 일거리를, 그것도 대박 일거리를 던지셨으니 테오 님도 일을 좀 하셔야죠.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일개 디자이너가 그런 일에 참여하는 거 아니지.

    ―설마요.

    쟝은 이강을 차에 욱여넣었고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반항하는 이강이었다.

    * * *

    “나 왔어요.”

    현관을 열며 한 윤주의 인사에 집안에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좀 늦은 퇴근이었지만 잘 시간은 아니었는데, 거실로 올라선 윤주는 조심스럽게 이강의 방문을 노크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땐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에도 그는 없었다.

    “갔나?”

    그 생각과 함께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괜히 불안해졌다. 아직 여권도 자신에게 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 잘 개켜져 바닥에 놓인 그의 옷가지들이 보였다.

    다행이다 안심하며 문을 닫고 돌아선 그녀에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꽃병이 보였다. 노란색 프리지아 한 다발이 소박하게 꽂힌 꽃병이 그녀의 마음을 홀렸다.

    “오늘은 꽃이네.”

    그녀의 잔소리에도 이강은 매일 한 개, 두 개씩 여러 가지 소품들을 사다가 거실을 장식했다. 덕분에 무채색이었던 그녀의 거실이 알록달록 아름다운 동화처럼 바뀌어 가는 중이었다.

    윤주는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부드럽다. 꽃이 예쁘다는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네.”

    아름다운 걸 모르고 사는 직업도 아닌데, 오늘따라 꽃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한참 꽃을 보고 있던 윤주는 손에 들었던 비닐봉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뭐해요, 윤주 씨?”

    “다 됐어요. 잠시만요.”

    “저리 비켜요, 내가 할게요.”

    이강은 얼른 마루로 올라와 서랍장을 밀며 낑낑대는 윤주를 밀어냈다. 윤주는 도통 움직이지 않던 서랍장이 이강의 손길 한 번에 제자리를 찾아가는 걸 보고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옮기겠다고, 나한테 미리 말을 하죠.”

    “아저씨가 현관까지 들어다 줘서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죠.”

    “이걸 왜 샀는데요?”

    “……이강 씨 옷이 바닥에 있길래 여기 넣으려고.”

    뜻밖의 말에 이강이 윤주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안았다. 그녀의 집에 들어온 후 계속 거리를 두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데 그 모든 게 없어지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이 편해졌다.

    “고마워요.”

    “뭐, 나중엔 어차피 내가 쓸 거니까…….”

    말끝을 흐리는 윤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맙다는 별거 아닌 말에 괜히 마음이 들뜨고 안아주는 푸근한 품에 심장이 뛰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집으로 온 후 이강은 한 번도 그녀에게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았었다. 윤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고 그와 거리를 벌리고 섰다.

    “어디 갔다 와요?”

    “친구가 한국에 와서 잠깐 마중 갔었어요. 테이블 위에 저거는 뭐예요?”

    “맥주하고 치킨, 한국에 왔으면 치맥은 먹어봐야죠.”

    “맛있겠다. 가서 옷 갈아입고 와요.”

    윤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고 이강은 맥주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안주를 준비하는 이강도 편안한 옷을 입고 욕실로 들어가는 윤주도, 이젠 한집에서 지내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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