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9화 (9/44)

9.

침대 위에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던 윤주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물소리며 오만가지 잡소리가 다 들리던 밖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시간은 저녁 8시 반밖에 되지 않았고 이 시간에 잠이 올 리 만무한 윤주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고파.”

아까는 너무 신경질이 나서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좀 차분해지자 배가 고팠다. 혼자 있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겠는데 괜히 이강이 신경 쓰여서 주방에도 못 가겠고, 방을 둘러봐도 굴러다니는 과자 나부랭이도 없었다.

“청소를 너무 열심히 했나 봐.”

평소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아서 간식거리를 사다 놓지 않았더니 이렇게 간절할 줄이야, 습관적으로 협탁 서랍을 열었던 윤주는 그곳에서 발견한 작은 초콜릿 하나에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맛있다.”

작은 초콜릿 조각을 천천히 녹여 먹은 윤주가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시간은 겨우 10분이 지났을 뿐이고 조금이라도 먹고 나니 더 허기가 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이라도 제대로 먹을걸.”

밥맛이 없어 대충 포장 샐러드로 때운 점심도 후회됐다. 어쩔 수 없이 윤주는 다시 눈을 감았고 약 한 시간 후,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윤주가 벌떡 일어났다.

“내 집이잖아, 내가 라면을 먹든 뭘 하든 내 마음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주는 방문에 귀를 대고 밖의 동태를 살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함에 살짝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고 주방의 작은 등만 켜진 채 밖은 아주 조용했다.

까치발을 하고 거실로 나온 윤주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 한 잔을 마시는데 식탁 위에 이강이 정갈하게 담아 놓은 음식들이 보였다.

용기에 담겨있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샐러드까지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윤주의 목으로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맛만 볼까?”

이강의 방문을 힐긋거린 윤주는 뚜껑을 열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스테이크는 차가워도 맛있었고 윤주의 손은 자연스럽게 포크를 집어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해물 맛이 잘 스며든 파스타 역시 맛이 일품이었다.

“끝내준다.”

“막 만들었을 때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겁니다.”

“엄마야!”

“나이스 캐치.”

이강은 놀란 윤주가 떨어트린 샐러드 그릇을 타이밍 좋게 잡았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윤주는 기침하기 시작했다.

“쯧쯧, 조심 좀 하지. 괜찮아요?”

이강은 사레가 들린 듯 계속 기침을 하는 윤주의 입에 물컵을 대주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윤주의 기침은 진정이 됐고 이강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남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샐러드 먹고 있어요. 배 많이 고플 텐데.”

“괘, 괜찮아요.”

“쯧쯧, 괜찮지도 않으면서. 버릇이에요?”

“진짜 괜찮아…… 그쪽 때문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잖아요.”

“또 내 탓이군요. 그럼요. 그럼요. 다 내 탓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먹어요.”

이강은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음식을 그녀 앞에 놓아줬고 움직일 생각이 없는 윤주의 손에 포크를 들려줬다.

“맥주 한잔할래요?”

“……좋아요.”

이강은 막 꺼낸 시원한 맥주를 윤주에게 건네줬고 두 사람은 건배했다. 시원한 맥주를 반주 삼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윤주의 얼굴엔 저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고 그 모습에 흐뭇한 이강도 미소 지었다.

“맛있어요. 요리 잘하네요.”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에요. 담엔 같이 먹어요.”

“……뭐, 시간 맞으면.”

윤주의 샐쭉한 대답에 이강이 피식 웃었고 그걸 본 윤주는 맥주를 마시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진짜 민망한데 음식은 또 왜 이렇게 맛이 있는지, 식탐이 있는 것도 아닌데 포크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다 하고 설거지까지 끝낸 윤주가 방으로 돌아가다 걸음을 우뚝 멈췄다.

주황색과 초록색, 노란색이 섞인 체크무늬 테이블 보, 그 밑에 깔린 베이지색 러그. 그리고 벽에 기대어 놓은 여러 개의 쿠션들을 보고 있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예쁜 배치였다. 윤주가 뭘 보고 있는지 깨달은 이강이 자랑하듯 입을 열었다.

“예쁘죠.”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나요, 주황색 싫어해요.”

“뭐, 라구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색이 바로, 저 주황색이에요.”

“설마.”

“그냥 그렇다구요. 잘 자요.”

방으로 쏙 들어간 윤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던 것도 같다. 너무 어이가 없는 이강은 꼭 닫힌 그녀의 방문과 쿠션들을 번갈아 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신경 써서 고른 것들인데, 진짜 맥빠진다.

“저 여자가 진짜. 하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아주 잘됐네.”

그리고 그다음 날 퇴근했을 때, 윤주는 보라색과 연두색, 노란색으로 벽을 채우고도 남아 바닥에까지 굴러다니는 더 많아진 쿠션들을 봐야만 했다.

“어차피 빨래는 해야 하잖아요.”

너무나 당차게 내놓은 이강의 대답이었고 윤주는 그에게는 함부로 말을 하지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 * *

보기 좋게 손질된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 조끼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감색의 스트라이프 양복, 주머니의 행커치프와 손가락에 끼고 있는 큰 문장 반지까지 책상에 앉은 안드레아는 마치 중세의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밝은 갈색의 눈동자와 살짝 휜 콧날이 이강과 무척이나 닮아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강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건 그의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는데 화려한 무늬의 실크 벽지부터, 구석구석 달려있는 은으로 만든 실내등, 화려한 황금색의 장식품들, 벽난로까지 마치 바로크 양식의 베르사유 궁전의 방 하나를 옮겨온 듯했다.

그중 한쪽에 레드 샌들우드로 만든 거대한 책상에 앉은 안드레아는 죽일 듯이 벽시계만 보고 있었다.

―삼, 이, 일, 땡! 쟝, 쟝!

세 번의 이름이 불리기 전에 몸에 딱 붙은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 사무실로 들어왔고 폭발 직전의 안드레아의 말을 가로챘다.

―벌써 점심…….

―형님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진짜? 드디어 찾았어?

―네.

―어딘데? 어디냐고! 아냐, 됐어. 바로 전용기 준비하고…….

―안 됩니다.

―뭐?

―안드레아 님께선 이곳에 계시고 테오 님께는 저만 갑니다.

―개소리!

―회장님의 명령이십니다.

―아버지가 그럴 리 없잖아.

분노에 미쳐 날뛰기 직전인 안드레아에게 쟝은 전화기를 내밀었고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받아든 안드레아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전화를 끊고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안드레아는 벌떡 일어나 사무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으아악!

―전화기 또 던지시면 이번엔 애마인 네레를 저한테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핸드폰을 던져버릴 듯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안드레아는 죽일 듯 쟝을 째려봤다. 안드레아는 거친 숨을 다스리며 천천히 팔을 내렸고 핸드폰을 줄 듯 손을 내밀었지만 쟝이 받기 직전 바닥으로 툭 던졌다.

―아,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아무렴요. 그럼 저는 이만 공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형, 무사히 데리고 와. 꼭 데리고 와, 내 옆으로.

―……네, 알겠습니다.

안드레아의 절박함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한 쟝은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떠났다. 잠시 닫힌 사무실을 보던 쟝은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명은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라 도망가기 선수고, 한 명은 너무 소유욕이 강해 집착하고. 두 형제 사이에서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아주 쉬웠는데, 이거 오란 소리 같은데.

마음먹고 3년이나 추적을 피해 숨어있던 테오, 즉 이강은 수배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너무 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건 분명 자신에게 오라는 말이었다.

―드디어 돌아오고 싶어진 건가?

20년도 넘게 친구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와 만나기 위해 쟝은 걸음을 서둘렀다.

쟝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거기엔 주소 하나가 딸랑 적혀 있었고 확인해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하, 너무 너다워서 할 말이 없다. 간다, 가. 사람 부려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차는 쟝이 타자마자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