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회사에 도착한 윤주는 집에 있는 이강 때문에 도저히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자신의 집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게 그녀를 엄청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 팀장, 서 팀장, 서윤주!”
“네, 편집장님!”
“나하고 얘기 좀 할까?”
“알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의 윤주가 먼저 홱 나가버리는 나정을 얼른 따라 나갔다. 잠깐 멍하니 있었다고 뭐라고 할 나정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일로 업무를 방해받았다는 게 짜증이 났다.
“편집장님, 죄송해요. 제가 좀…….”
“나한테 솔직하게 말할래, 아님 사장실로 올라갈래?”
“네? 그게 무슨…….”
“아침 댓바람부터 동혁이 전화 오고 난리 났어. 어제 어떤 남자가 회사까지 너 찾아왔다며?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꼬치꼬치 묻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 얼버무리든 쏘아붙이든 하지. 너 출근하면 사장실로 보내라고 난리 치는 거 간신히 죽여 놓고 왔으니까 얼른 말해.”
“진짜.”
“그러니까, 걔는 왜 장가까지 간 놈이 저 지랄인지 모르겠다만, 네가 같이 사라졌다는 남자는 나도 엄청 궁금하거든?”
윤주는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랬다.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그게 선배, 나도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이름밖에 없어요. 아, 그리고 외국인이에요.”
“날 좀 이해시켜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윤주는 최대한 이강과 있었던 모든 일들을 솔직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같이 잠을 잤다는 건 빼고 말이다.
“오 마이 갓! 그러니까 미국 촬영 갔을 때 처음 만났고 지금 그 남자가 너희 집에 있다고? 철옹성 같은 그 집 담을 넘었단 말이지?”
“선배, 누가 들어요, 좀 조용히.”
웃음기 가득한 나정이 두 손을 입을 가리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대학 때부터 캠퍼스 커플로 5년 동안 동혁과 뻑적지근하게 연애를 했던 윤주는 그와 헤어진 후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윤주가 연애와 담쌓고 사는 게 동혁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빌미를 제공한 건 사실이었다.
“잘생겼어? 몸매는 어때? 키가 작아도 비율이 좋으면 되는데. 옷 입는 센스는 있어? 외국인이면…….”
“국적은 이태리인데 한국 사람처럼 생겼어요. 우리말도 잘하고 이름도 한국 이름이고, 어떤 사연인지는 저도 몰라요.”
“혹시 도둑놈이나 강도일 가능성은?”
“2억짜리 시계를 차고 도둑질하는 도둑은 없겠죠? 옷이며 신발이며 전부 명품이던데. 그것도 상표 없는 완전 럭셔리.”
“어머, 얘 봐라. 직업도 뭣도 모른다며 견적은 뽑았어?”
“직업병이에요. 그런 것부터 보이는데 어떻게 해요?”
“아무튼 난 찬성. 동혁이는 내가 알아서 커버 칠 테니까 넌 그 남자랑 잘해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근데 언니, 그 사람 좀 이상해. 내 속에 뭔가를 막 허물어버려. 이러면 안 되는 거지?”
나정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윤주를 꼭 안아줬다.
자기 절제가 습관이 된 윤주, 그런 윤주를 흔드는 남자가 무조건 좋은 사람일 거라는 보증은 없지만 일단은 무조건 찬성이다.
“괜찮아. 허물어져도 되고 흔들려도 돼. 너도 사람인데, 네 벌건 속살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지.”
윤주가 크게 숨을 내쉬면서 나정에게 편히 기댔다. 대학 때부터 벌써 10여 년을 보아온 사람이다. 윤주의 사정과 상처를 너무 잘 알아서 가끔은 피하고도 싶지만 나정은 엄마 이상의 의미로 윤주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선배.”
“이왕 그렇게 된 거 확 자버려. 너는 욕구가 없어?”
“선배!”
“어머, 너무 지나치게 발끈하니까 더 의심스럽다. 남자는 남자고 일은 해야지? 기획안 올리는 거 잊지 마.”
나정은 얼른 윤주와 떨어졌다. 나정은 사무실로 돌아가며 지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신동혁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회를 쳐 먹든, 끓여 먹든 할 테니까. 너는 그 남자나 꼭 잡아.”
나정은 정말로 윤주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이젠 그녀도 행복해질 때도 됐으니까, 아마 윤주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 * *
언제 퇴근할지 모르겠다고 했던 윤주는 칼퇴를 감행했다.
이강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본다는 걸 잊어버려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더 초조하고 걱정되고 산만해서 더 이상 회사에 있을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열려던 윤주는 손을 멈칫했다. 대문에 알지 못하는 붉은색의 도어록이 달려있었다. 손에 들린 열쇠와 도어록을 번갈아 보던 윤주는 어쩔 수 없이 벨을 눌렀고 금세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까지 일사천리였다.
활짝 열린 대문 안에는 과하게 흥이 난 이강이 열렬하게 그녀를 반겼다.
“윤주 씨, 어서 와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열쇠가…….”
“얘기는 나중에, 나 좀 급해서.”
이강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갔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따르던 윤주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또 한 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생경했다. 분명히 자신의 집이었는데 모든 게 생경했다. 부엌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정겨운 소리들, 현관 앞에 깔려 있는 낯선 발 매트와 마루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러그, 나풀거리는 베이지색 레이스 커튼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황당한 얼굴의 윤주가 마치 자기 집인 듯 편안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이강을 멍하니 봤다.
“거기 서서 뭐 해요? 저녁 다 됐어요. 빨리 손만 닦고 와요.”
“이게 다 뭐예요?”
“아, 내 거 사면서 같이 샀어요. 오늘 마트 갔었거든요. 참, 이 옷 어때요? 집에서 편하게 입으려고 샀어요. 원 플러스 원이더라고요.”
“아니, 저기요…….”
“그리고 냉장고가 그게 뭐예요? 나는 무슨 채소 건조긴 줄. 굶어 죽을 수 없어서 내 저녁 만드는 김에 윤주 씨 것도 같이 만들었어요.”
“자, 잠깐만요…….”
“얘기는 나중에, 오늘은 특식으로 스테이크 구웠어요. 식으면 맛없으니까 서둘러요.”
황당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윤주를 욕실로 밀어넣은 이강은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황당하고, 당황한 것 같았지만 화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무난히 잘 넘어간 것 같았다.
“이 음식 먹고 기분 좋아지면 좋겠다.
이강은 자신이 만든 알맞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 신선한 해물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와 각종 치즈를 넣은 샐러드가 그녀의 마음에 들길 바랐다.
욕실에서 손을 닦던 윤주가 세면대를 잡고 숨을 골랐다. 강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멍함이 사라지며 마음속에 있던 진짜 감정인 불편함과 짜증이 확 치솟아 올랐다.
아무리 집에서 머물라고 했어도 이 정도로 선을 넘어버릴 줄 몰랐다.
“짜증나.”
며칠이나 있겠다고, 제멋대로 자신의 공간을 침범해버린 이강이 정말 불쾌했다. 그런데 제대로 화도 못 내고 쫓기듯 욕실로 들어 와버렸다.
이 순발력 떨어지는 성격, 가끔은 진짜 마음에 안 든다. 신경질적으로 세수를 끝낸 윤주가 전열을 가다듬듯 큰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윤주가 욕실에서 나왔다. 반가운 얼굴로 잘 차려진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강을 한 번 봐주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저기 윤주 씨…….”
이강은 얼른 그녀의 방 앞으로 가서 노크했지만 윤주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노크가 몇 번 이어진 후에야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윤주가 문을 열었다.
“저녁 안 먹어요? 나 배고픈데.”
“많이 드세요, 제 몫까지.”
“아니, 저기…….”
“그리고 앞으로 이런 무례는 사양할게요. 난 이제부터 자야겠으니까 최대한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계셔주세요.”
자신의 말을 다 한 윤주는 매정하게도 문을 탁 닫아버렸고 이강은 한 마디도 못 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화가, 많이 났네.”
곤란한 표정의 이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싶었고 그저 집을 조금 밝고 포근하게 바꾸면 그녀가 지금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 더 편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해봐야 저 완고한 윤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을 거 같았다.
“미안해요, 내 멋대로 굴어서. 그렇다고 밥까지 안 먹는 건 좀 유치한 짓인데. 저녁 너무 늦게 먹으면 건강에도 안 좋고. 그래도 사다 놓은 건 안 치울 거예요. 윤주 씨 몫은 식탁에 둘게요.”
이강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사과했고 할 말도 했고, 둘이 맛있게 먹으려고 만들어 놓은 음식이 좀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강은 윤주 몫의 음식을 덜어 식탁 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자기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