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른 새벽,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던 윤주가 우뚝 멈춰서 뒤를 홱 돌았다. 거기엔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은 이강이 그녀와 발소리까지 맞춰 걷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그 역시 걸음을 멈추고 딴청을 했다. 가는 눈으로 이강을 쳐다보던 윤주가 그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어디까지 따라올 건데요?”
“나 진짜 호텔에 있기 싫어서 그래요. 2주, 딱 2주만 좀 신세 지게 해줘요.”
“나 이강 씨 이름 말고 아는 거 하나도 없어요.”
윤주의 말에 가방을 뒤적이던 그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내 여권. 그리고 그 안에 다른 신분증도 있어요. 이거면 신분 보증되지 않을까요?”
“하아, 미치겠다.”
누군가에게 집을 공개하는 건 윤주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윤주는 그 누구도 집에 데려와 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땐 아르바이트다 뭐다 집에 초대할 정도로 친한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동혁과 연애할 때도 집까지 배웅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집은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었다.
“정말 돈이 없는 거면 내가 카드 빌려줄게요. 그러면 되죠?”
“진짜 야박하다.”
“도대체 호텔이 왜 그렇게 싫은 건데요?”
“어릴 때부터 집 떠나서 생활을 많이 했어요. 학교 다닐 땐 기숙사에 있었고 일할 땐 호텔에서 주로 머물렀죠. 호텔이라면 신물이 나요.”
이강을 만나고 처음으로 그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나오면 알면서도 윤주의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나는 철들고 그 누구도 우리 집에 데려가 본 적 없어요.”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한 거군요. 정말 무례했네요. 걱정 마요, 나 하나 지낼 곳은 많을 거예요.”
이강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신이 조금만 더 우기면 윤주가 받아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까지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와 꼭 같이 붙어있고 싶었지만 말이다.
“호텔로 가는 거 아니에요?”
“내 걱정은 말아요. 얼른 가요, 출근 늦겠다.”
윤주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하고도 신사적으로 물러나 주는 이강을 물끄러미 봤다. 잘은 모르지만 이 남자는 믿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비이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어요, 나 여전히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꺼림칙하고 무섭기도 한데 한 번도 안 해본 일 해보려구요. 우리 집 낡고 좁을 텐데 괜찮겠어요?”
“진짜? 나 윤주 씨 집에 데리고 가려고?”
윤주의 한 마디에 이강의 얼굴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완전히 활짝 피었다. 그 밝고 환한 표정이 너무 어이없는 윤주에게 이강이 손을 내밀었고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그 손을 잡았다.
이상하다, 이 남자 정말 아는 거라곤 이름 하나밖에 없는데 자꾸만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누군가를 알고 받아들이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그녀답지 않은 짓이었다.
“동네가 아주 조용하네요. 정말 사람 사는 동네 같군요.”
“어디는 사람 사는 동네 아닌가?”
“내 말은, 진짜 사람이 사는 동네, 뭐랄까 사람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곳?”
“환상이에요. 못 사는 동네에 대한 동화 같은 환상.”
“아닌데, 그런 거.”
나지막한 담장들, 거기에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 야트막한 동네 오르막을 오르는 이강이 윤주와 꼭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그의 기분이 오랜만에 아주 편하고 즐거웠다.
“여기예요. 들어와요.”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살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의 집은 작은 마당이 딸린 파란 대문 단층집이었다. 단독주택인 것도 좋았고 낡은 것도 상관없었지만 집에 들어가다 본 텅 빈 마당은 신경이 쓰였다.
그건 집안도 마찬가지였는데 딱 필요한 것들을 빼고는 장식이나 색깔을 가진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저 방을 쓰면 돼요. 침대는 없고 이불은 새로 사야 해요. 근처 마트 알려줄 테니까 혼자 쇼핑할 수 있죠? 필요한 건 스마트폰에서 찾아보고, 난 출근 준비해야 해서.”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철책이라도 세워놓은 것처럼 집에 들어온 윤주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강을 낯설게 대했다.
하지만 작은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나무 마루의 촉감을 느끼고 있던 이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요, 정말로.”
“뭐.”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하는 이강에게 어깨만 들썩해 보인 윤주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옷장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침대에 던지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던 윤주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큰 숨을 들이쉬었다.
“미친 짓을 한 거야. 미친 짓을.”
어쩌다 저 낯선 남자를 집안까지 들였을까?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쫓아낼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윤주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싸워서 이길 거 같았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윤주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어젯밤의 일을 증명이라도 하듯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온몸을 강타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 얼룩덜룩 남은 자국을 보던 윤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남자였다.
빠르게 출근 준비를 끝낸 윤주가 방에서 나왔다. 오늘도 무채색의 세미 정장 차림이었지만 어제와 달리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 스카프 옷이랑 좀 안 어울리는데요.”
“알아요.”
“차라리 빼 버리는 게…… 아, 내가 다시 예쁘게 매줄게요.”
풀어헤친 스카프 아래, 그녀의 목에 자신이 남긴 여러 개의 붉은 키스 마크를 확인한 이강은 얼른 다시 매주려 했지만 윤주가 그 손등을 살짝 때리고 스스로 묶었다.
“나 출근해요. 퇴근은 언제 할지 몰라요. 내 집에서 나갈 때까지 당신 여권은 인질이에요. 그럼.”
자신의 할 말을 마친 윤주가 현관을 나섰고 이강이 그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랐다.
“왜요?”
“배웅하려고요.”
“됐거든요. 말썽 피우지 말아요.”
“내가 무슨 강아집니까? 모닝 키스는, 안 바랄게요. 그만 째려보고 얼른 가요.”
“아, 맞다. 카드 여기 있어요. 이거로 쇼핑하면 돼요.”
“이건 됐어요.”
“돈 없다면서요. 한국은 집세만 비싼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비싸요. 나 이제 가요.”
이강은 자신의 주머니에 카드를 넣어주는 윤주를 가볍게 안았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굴지만 속은 따뜻한 여자였다.
“정말 고마워요.”
윤주는 잠깐 눈을 감았다. 진심이 느껴지는 고맙다는 말도, 든든하게 안아주는 품도 뭐랄까, 만족스러운 느낌을 줬던 거 같다. 윤주는 살짝 그의 어깨를 밀고 나와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대문을 나왔다.
누군가 걸어가는 자신의 등을 봐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잘 다녀와요. 차 조심하고, 일찍 와요!”
그녀의 낭만은 오래가지 못했다. 긴 팔을 흔들며 골목이 떠나가라 인사하는 이강을 모른 척 거의 뛰다시피 골목을 벗어나고 말았다.
* * *
혼자 남은 이강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을 둘러보는 이강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하나였다.
‘삭막함.’
세월과 사람의 손때는 어디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 집은 윤주의 동선을 그릴 수도 있을 만큼 사람의 흔적이 묻은 곳이 한정적이었다.
현관에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길, 주방의 커피머신과 토스터, 그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에 공간은 그녀의 손길은 물론 눈길도 받지 못하고 어둡게 죽어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사연일까?”
아주 밝고 해맑은 여자가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웃음에는 항상 그늘 한 움큼이 존재하니까, 그래서 더 끌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의 모든 걸 차단하듯 늦은 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실의 두꺼운 커튼들, 작은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집 안, 그보다 더 적막한 공기, 작은 장식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앉은뱅이 테이블까지 모두 죽어있는 느낌이었다.
이강의 시선이 주방 식탁으로 향했다. 4인 테이블에 달랑 하나뿐인 의자, 저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강이 자신이 딛고 선 마루로 시선을 내렸다. 윤기를 잃은 나무 바닥은 음침함을 더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건 바꾸면 되고, 욕은 좀 먹으면 되고.”
이강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을 가리고 있던 거실의 커튼을 확 걷어 젖혔다. 얼굴로 들어오는 햇살을 잠시 만끽하던 이강은 집 곳곳을 자세히 살폈다.
이 집엔 없어도 뭐가 너무 없다.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윤주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이 없고 마당도 있으면서 꽃도, 화초도, 나무도 없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볼까? 마루에는 좀 화사한 색의 러그를 깔고, 쿠션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앉을 식탁 의자도 필요하고, 또 뭐가 있나? 작은 액자를 하나 걸어둘까? 차라리 인테리어를 다시 하면, 그 여자 날 진짜 죽이려 들 거 같은데.”
이강은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거실, 주방, 욕실까지 꼼꼼히 보며 메모를 마친 이강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 몇 개도 추가했다.
“와, 대단하다. 숟가락, 젓가락도 전부 한 개씩이네. 여러 가지로 자극하는 여자야. 아주 기분이 좋아졌어.”
이강은 바지 뒷주머니에 든 지갑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한국에 도착한 지 겨우 30시간 남짓, 할 일이 생겨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아주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