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5화 (5/44)

5.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강이 너무 평온해 보여서 얄미울 정도였다. 입을 삐죽인 윤주는 가방을 챙겨 그에게 다가가 책에 집중한 그의 의자를 발로 툭툭 쳤다. 그러자 환히 웃으며 그녀를 보는 이강이었다.

“다 끝났어요?”

“네.”

“마침 지루하던 참인데 잘 됐다. 우리 밥 먹을래요? 나 진짜 배고픈데.”

“그러죠.”

“음, 소개시켜 주고 싶은 한식 있어요? 참고로 나는 내장류는 안 좋아해요.”

“그거 내 최애 음식인데. 곱창, 대창, 막창, 내장탕 등등.”

윤주의 삐딱한 말에 이강이 턱을 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이 길게 이어지자 민망해진 건 도리어 윤주 쪽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배고프다면서 내가 음식으로 보여요?”

“뭐랄까, 내 상상과 많이 달라서. 그래서 계속, 오래 만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그때도 그러더니, 사람을 보면서 상상을 많이 하나 봐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내가 어떤 상상들을 했는지 궁금해요?”

“아뇨! 밥이나 먹으러 가요.”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의 손을 피해 윤주가 먼저 그 자리를 떠났다.

상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와 나눴던 잠자리가 자꾸 떠올라 난감했다. 분명 그런 말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런 상상이 되는지, 마치 그와 관계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아랫배가 아릿하니 뭉쳐왔다.

* * *

푸짐한 저녁과 차까지 마신 후에도 이강은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윤주는 이만 자리를 정리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어디서 묵어요?”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긴 한데 숙소는 아직 안 정했어요.”

“숙소도 안 정하고 왔다고요?”

“스튜디오 겸 숙소 하나를 렌트했는데 입주 날짜가 안 맞았어요. 한 2주쯤? 다른 곳에 신세를 져야 해요.”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오는 이강을 피해 윤주가 몸을 돌렸다. 원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이강의 태도에 윤주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 신세를 나한테 지려고요?”

“안 될까요?”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요? 난 그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꺼운 마음으로 도와줬는데.”

“내가 무장 강도나 연쇄 살인마로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요.”

“난 그렇게 보여요?”

“만약 그쪽이 무슨 짓을 한다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하하, 그게 윤주 씨가 나에 대해 하는 상상인가요?”

참 매끄럽게 대화를 잘 이끌어 가는 남자였다. 지금도 직접적으로 표현해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먼저 의사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글쎄요, 이번엔 윤주 씨가 상상해 봐요.”

“관둬요. 이만 일어나죠.”

“진짜 여기서 헤어지자구요? 와, 나 되게 섭섭한데. 윤주 씨 하나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돈도 거의 다 썼어요. 스튜디오 렌트가 엄청 비싸더라고요. 한국 물가가 이렇게 비싼지 몰랐어요. 방금 밥값도 내가 냈는데.”

이강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냥 엄지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손등을 쓰다듬는 수준이었지만 그 간단한 동작에서 느껴지는 의도는 하나였다. 거기다 저 노골적인 시선이라니, 윤주는 너무 직접적이라 헛웃음까지 나오려 했다.

“그때, 그 밤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어요.”

“그게 당신의 또 다른 상상인가요?”

“그것도 포함, 또 다른 많은 것들이 여기 있죠. 안 되나요?”

이강은 제 머리를 가리키며 건드리기만 하던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잡았다. 자신의 손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손을 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함께 있고 싶어요.”

이강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단순히 같이 자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지만 그것 역시 배제할 순 없었다. 그녀와 함께 보낸 그 밤이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고 쉽게 잊을 수 없었으니까.

윤주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가 주는 감각은 너무나 생생하고 잊을 수 없었던 그 밤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 역시 그 밤은 원나잇으로 가볍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감정적 유대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밤, 그 밤은 오랜만에 윤주를 여자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윤주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았고 그녀의 허락을 읽은 이강이 바로 손을 잡아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꼭 잡았다. 그러는 동안 이강의 시선은 줄곧 윤주에게 향해 있었고 그녀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멀지 않은 호텔로 향했고 방을 체크인하려는 그를 밀어내고 제 카드를 내밀었다.

윤주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즉흥적이고 조심성이 없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윤주의 등 뒤에서 이강이 웃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돈 없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카드를 내미는 이 여자는 순진한 걸까, 바보 같은 걸까?

체크인이 끝나고 돌아선 윤주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이강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가요.”

그의 따뜻하지만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마치 소유하듯 그녀를 안다시피 한 이강은 윤주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머리카락에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윤주는 온몸이 찌릿 울리며 마음까지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랑도 아닌데…….’

포옹 한 번, 가벼운 입맞춤에 사랑을 떠올린 윤주는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 의미 없어요.”

윤주의 건조한 말에 이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했다.

‘이 여자 역시 흔들리는 거다.’

자신이 윤주에게 흔들렸던 것만큼 그녀 역시 자신에게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더 깊게 안는 이강이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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