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4화 (4/44)

4.

1개월 후.

할 일을 마친 윤주는 탕비실 창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과 어디론가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윤주의 눈은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게끔 만들어.’

‘특별해, 아주.’

불쑥 그녀의 머릿속에 끼어든 이강의 말에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처럼 이렇게 불쑥불쑥 그녀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그를 떠올릴 때면 그와 함께 보냈던 그 하룻밤이 연상 작용으로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몸은 자동적으로 뜨거워졌다.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 바라보던 눈길, 따뜻한 입술과 자신의 몸속에서 요동치던 그의 분신까지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열에 들뜬 표정의 윤주가 어느새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온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멍하니 뭐해?”

“편집장님 오셨어요?”

“너 미국에서 무슨 일 있었지? 솔직하게 말해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거짓말 같지만 속아줄게.”

파고드는 것 같은 편집장, 나정의 눈길을 피한 윤주는 얼른 커피 한 잔을 만들어 건넸다. 커피를 받아드는 나정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결국 커리어 폐간한단다.”

“그렇게 되는군요.”

“남의 얘기 같지 않아. 물론 잡지 판매율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20년도 더 된 잡지를 어떻게 폐간까지 시키니? 사람들 정말 너무한다.”

“열 내지 마세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소득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버티겠어요.”

“어머, 얘 말 냉정하게 하는 거 봐. 너 우리 잡지 폐간돼도 그렇게 말하겠다.”

“폐간되지 않게 열심히 뛰어야죠. 그래서 말인데 여름 특집호에 이벤트 하나 해요.”

“생각한 거 있어?”

“아직 구체적인 거 아닌데, 우리 화보 촬영할 때 동영상도 같이 찍잖아요. 일반 릴리즈 영상 말고 잡지 구독 독자들만 볼 수 있는 길게 만든 특별 편집 영상을 하나 더 만들어보자는 거죠. 회원 가입하고 정기구독 독자 인증하고 하나의 기기에서만 재생할 수 있게 해서 최대한 공유되는 거 막고. 어때요?”

“좋은 생각이다. 역시 서윤주, 넋 나가 있는 거 같더니 일은 하네.”

“돈 벌어야죠. 말 나온 김에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인터뷰 섭외 약속 있어요.”

“오케이, 방금 말한 거 내일모레까지 구체적인 기획안 만들어 오고.”

윤주는 알았다고 손을 휘휘 흔들고 탕비실을 나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오래 지켜봐 준 거다.

이강을 만난 후 지금까지 편집장인 나정의 말대로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 다시 정신 차리고 현실에 발붙여야 한다.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은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팀장님, 어디 가세요?”

“섭외 미팅. 끝내고 바로 퇴근할 거니까 내일 보자. 막내, 총무과에 결재 서류 넘겨주는 거 잊지 말고.”

“넵, 이번에는 꼭 넘기겠습니다.”

“역시 짬밥이 좋긴 하네요. 이렇게 막, 이른 퇴근도 하시고.”

윤주는 뒤에서 들리는 빈정거리는 소리에 가방을 싸던 손을 멈추고 돌아섰다. 거기엔 화려한 복장의 선애가 커피를 마시며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부러우면 너도 일을 잘해. 지난번처럼 원고 체크 하나 못해서 우리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일을 시키려고 해도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선배!”

윤주의 가감 없는 말에 선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기수 후배인 선애가 언제부턴가 계속 이죽거렸었다.

알면서도 불편해서 그냥 모른 척 내버려뒀는데 이젠 그러기가 싫어졌다. 이것도 이강을 만나고 난 후의 변화였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더 쓸쓸해지고 화가 나고 가끔은 참는 게 익숙한 자신 스스로에게도 좀 짜증이 났다.

불편한 마음에 서둘러 사무실을 떠났는데 하필이면 로비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을 만났다. 윤주는 자신을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동혁에게 꾸벅 인사했다.

“어디 가니?”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윤주야.”

“죄송합니다. 미팅시간이 다 돼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더, 마른 것 같다.”

“일개 사원에게 그런 걱정은 좀 지나치신 거 같은데요, 그럼.”

윤주는 묵례를 하고 얼른 그를 지나쳐 걸었다. 그는 여전히 윤주만 보면 아픈 얼굴을 했고 윤주는 그게 세상 싫었다.

이젠 미움도, 분노도, 그리움도, 미련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혼자만의 과거로 돌아가곤 했다.

“정말 여길 그만둬야 하나.”

윤주는 얼른 그 마음을 비웠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벌써 8년이다.

자신의 젊음을 다 바쳐 쌓은 커리언데 겨우 남자 하나 때문에 포기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윤주는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회사 문을 나섰다.

* * *

커피 한 잔을 사든 이강은 강남대로의 한 건물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빌딩은 높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활기차고 세련돼 보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와본 한국은 무척이나 많이 변해있었고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시간을 확인한 이강이 자신을 멍하니 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여자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부끄러운 듯 얼른 그 자리를 떴고 혼자 남은 이강의 웃음이 더 커졌다.

“재미있네.”

이강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했다. 빈티지 청바지에 낡아 보이는 카키색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넉넉한 사이즈의 베이지색 면 재킷을 걸쳐 입었다. 어깨에 걸친 진한 갈색의 낡은 가죽 백팩까지 멋을 내지 않았지만 굉장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거기다 190센티 정도 되는 큰 키에 넓은 어깨, 살짝 마른 몸, 긴 다리, 촌스러울 수 있는 파일럿 선글라스까지 멋지게 소화하는 얼굴까지 한 마디로 완벽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리 많이 모여들어도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건 딱 하나, 그를 이곳까지 결국 오게 만든 ‘서윤주’라는 여자였다.

“나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윤주가 눈앞에 나타났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의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통 넓은 정장 바지에 심플한 셔츠, 거기에 감색의 스트라이프 재킷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 게 무척이나 도시적인 모습이었다. 길었던 머리를 어깨 길이까지 자른 건 좀 아쉬웠다.

“힘든가?”

윤주를 지켜보던 이강의 미간이 좁혀졌다. 침대 위에서의 열정적이고 달뜬 표정을 짓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을 더 야위었고 더 무표정해져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빈 잔을 쓰레기통에 던진 이강이 성큼 윤주 앞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강렬한 햇빛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윤주가 눈앞에 드리우는 그늘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녕.”

“…….”

“5월밖에 안 됐는데 한국은 엄청 덥네요.”

“……당신.”

“이제 기억이 난 걸 보니 내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나 봐요.”

“여길 어떻게 왔어요? 날 어떻게 찾은 거예요?”

“여긴 비행기 타고 왔고 당신은 이걸 보고 찾았죠. 그렇게 가버리고 되게 허무했는데 방에 이게 떨어져 있더군요.”

윤주는 이강의 손에 들린 손때가 잔뜩 묻은 자신의 명함을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떨군 명함 한 장이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단다.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멍해진 윤주는 말 한 마디 꺼내기 힘들었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아, 맞다. 약속이 있어서…….”

“그럼 같이 가요.”

“나 일하러 가는 거예요.”

“윤주 씨는 일해요, 나는 옆에서 기다릴게요. 커피 한 잔만 사주면 조용히 있을게요.”

당황스러운 윤주는 우왕좌왕할 뿐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자신을 쫓아오겠단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고 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윤주야, 무슨 일 있어?”

동혁의 목소리에 윤주가 화들짝 놀랐다. 지금 저 남자 하나도 벅차 죽겠는데 동혁이 더 보태고 나섰다. 동혁은 경계가 가득한 시선으로 윤주 앞에 선 이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누구십니까? 우리 윤주와는 무슨 사이…….”

‘우리, 윤주?’

동혁의 호칭에 이강의 얼굴이 파삭 굳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웃음기가 싹 빠진 이강의 얼굴을 꽤나 시니컬하고 예민해 보였다.

불쾌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동혁을 빤히 보던 이강이 윤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동혁보다 더 불쾌하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저건 절대 호의적인 사람을 향한 반응이 아니었다.

“윤주 씨, 누굽니까?”

“내가 물었습니다. 내 말에 먼저 대답하시죠.”

동혁이 신경질적인 대답에 이강이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윤주 씨와 난 꽤 깊은 사이인데, 그렇죠 윤주 씨?”

그 말 한 마디에 윤주와 동혁이 동시에 굳었다.

동혁은 불쾌했고 윤주는 화들짝 놀랐다.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윤주는 얼른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 들어가시죠. 저는 이…….”

“이강이에요, 내 이름.”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귀에 작게 속삭이는 이강과 윤주의 모습이 무척이나 에로틱했고 무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불쾌감을 느낀 동혁이 한 걸음 다가갔지만 윤주가 조금 빨랐다.

“내 질문에…….”

“사장님! 저와 제…… 친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윤주야, 서윤주.”

윤주는 뭔가 말하려는 이강의 손목을 잡고 급하게 그 자리를 떴고 동혁의 부름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 남자가 계속 부르는데, 이렇게 가도 됩니까? 저 사람, 사장이라면서.”

“조용히 따라와요.”

윤주는 좀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을 놀라게 만들고 당황시킨 이 남자와 동혁까지 마주치게 된 이 상황이 화가 났다. 이강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걷던 윤주가 갑자기 멈춰서며 그의 손목을 던지듯 놔버렸다

“도대체 뭐예요?”

“뭐가요?”

“왜 날 찾아왔어요? 뭘 원하는 거예요? 혹시 또 섹스하자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단순히 섹스가 목적이었다면 다른 여자를 찾았겠죠.”

“그럼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온 건데요? 우리, 그날 그 시간으로 끝난 거 아니에요?”

“윤주 씨는 내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까?”

“…….”

“나는 그날 이후, 한순간도 윤주 씨를 잊은 적이 없어요. 여기까지 오는 거 나도 안 쉬웠어요. 윤주 씨가 여기까지 온 날 거북해하면 어쩌지, 벌써 다 잊었으면 안 되는데, 걱정 엄청 많았는데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나도 큰 결심하고 온 거예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왔어요.”

이강은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강조해 보였고 윤주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윤주는 자신이 화가 난 것이 눈앞에 이강 때문인지, 여전히 연인인 척 나서는 동혁 때문인지 아님 자신 때문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났습니까? 내가 사과할게요.”

“그쪽, 아니, 이강 씨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이 상황이 좀 당황스러워서 그래요. 나한테 잠깐 시간을 좀 줄래요?”

“그렇게 해요. 윤주 씨가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근데 한국 사람 아니에요? 이름이 이강이라면서요. 그럼 성은요?”

“일단은 송?”

“일단은?”

“약속 있다면서요, 늦은 거 아니에요?”

“맞다, 약속!”

윤주는 다시 이강의 손목을 잡고 길가로 가 택시를 잡았다. 천천히 걸어갈 생각으로 일찍 나왔는데 엉뚱한 데 다 써버렸다. 택시에 타자마자 가방을 열어 태블릿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매니저를 먼저 만나는 거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한 최근의 사건이나 행적 정도는 알고 가야 했다.

윤주는 매니저와 일에 대해 집중했고 이강은 그런 윤주에게 집중했다.

“서 기자님,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야말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긍정적인 대답, 기다려도 되는 거죠?”

“걱정 마세요. 지난번에 같이 했던 촬영이나 인터뷰 반응이 좋아서 일정만 맞으면 싫다고는 안 할 거예요.”

“하시겠다고만 하면 일정은 저희가 맞춰야죠. 연락 주세요.”

상대방과 인사를 끝내고 헤어진 윤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자신의 물건을 정리한 윤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방해한 존재가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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