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칼코마니-1화 (1/44)

1.

“타요.”

약하게 내리는 빗속, 셔츠로 머리를 가리고 멍하니 서 있던 윤주는 제 앞에 미끄러지듯 서는 트럭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 보이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빗줄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외국에서 듣는 익숙한 언어에 살짝 반가운 마음 반, 거부감 반이었다.

“곧 폭우가 쏟아질 겁니다. 최소한 4시간은 걸어야 작은 타운에 도착하는데, 걸어갈 겁니까?”

점점 더 강해지는 빗줄기, 까마득하게 뻗어있는 굴곡진 도로와 그 옆에 삭막한 황톳길. 그곳을 보던 윤주가 자동차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차를 타고 나서야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는 갈색의 조금 긴 고수머리, 그 아래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 거무스름해 보이는 짧은 수염까지 남자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천만에요.”

윤주의 인사에 남자가 수건 하나를 건넸다. 젖은 셔츠를 갈무리하던 윤주는 거절하려던 마음을 접고 젖은 머리와 어깨를 닦았다.

“여기는 비가 자주 안 오는 대신 한 번 오면 뇌우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죠. 그 폭우가 몇 날 며칠 지속될 때도 있어요.”

“이번에도 그럴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남자의 매끈하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목소리까지 좋은데 라는 생각을 하던 윤주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고 일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휴대전화는 무용지물이죠.”

남자 말대로 휴대전화는 수신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일행과 떨어졌으니 일단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초조해하는 사이 가볍게 내리던 비는 시야가 가려질 정도로 장대비로 바뀌어있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뇌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자연재해의 힘이 코앞에 펼쳐지자 어깨가 잘게 떨릴 정도로 그녀는 두려움이 일었다.

“중요한 일입니까?”

“일 때문에 일행들과 떨어졌어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 좀 곤란하네요.”

운전석의 이강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힐긋 바라봤다.

조용한 여자였다. 여자들 특유의 호들갑이 없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무척이나 여리고 우아한 몸의 선과 심연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가 그를 매료시켰다.

그녀를 차에 태운 건 무척이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모습에 매료돼 평상시에 하지 않던 친절을 베풀었다.

“일행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라스베이거스에요.”

“오늘 안으로 가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어요. 아마 3시간은 더 가야 해요.”

“그럼 실례할게요.”

윤주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며칠째 바쁜 일정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머리가 좀 멍했다.

오늘 일정은 어그러졌고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도대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계획하고 몇 달 동안 준비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당일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힘이 쭉 빠졌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시종일관 침묵만 맴도는 가운데 이강이 말한 시간보다 조금 더 지나 마을에 도착했다.

말만 타운이지 주유소 하나, 작은 모텔 한 개, 작은 식료품 가게와 식당 두어 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시골 동네였다.

동네가 보이자 윤주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여전히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숙소에 가면 전화는 쓸 수 있을 겁니다.”

“핸드폰이 무용지물이라니, 어디 먼 과거에 와있는 기분이네요.”

“여기가 그런 매력이 있죠. 조금은 동떨어진, 그래서 내가 너무 잘 보이는.”

무심한 목소리로 툭 던진 말이 윤주의 마음에 쿡 박혔다.

‘내가 너무 잘 보이는 곳……, 그래서 이곳에 있는 며칠이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윤주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을 때 차에서 내린 이강이 우산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산을 받친 이강이 조수석 문을 열고 윤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끄러울 정도의 빗소리가 점점 귀에서 멀어지고 윤주는 뭔가에 홀린 듯 이강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이강은 당연하게 그녀를 우산 안으로,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윤주는 온전히 자신을 감싸는 것 같은 그의 품 안에서 굉장히 오랜만에 안도를 느꼈다.

“어서 들어가요.”

이강의 안내로 들어간 모텔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비에 한 대밖에 없는 공중전화에 길게 줄을 늘어선 상태였다.

“이 사람들 모두 여기에 머무르는 건가요?”

“절반쯤은? 방을 잡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머물든지 아니면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할 겁니다.”

“그렇군요.”

“난 이미 여기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괜찮다면 내 방에 지내요. 아니면 머물만한 곳을 알아봐 줄게요.”

곤란한 표정의 윤주가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과 자신의 몰골을 번갈아 훑어봤다.

“전화할 수 있을 때까지만 신세 좀 질게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윤주를 로비에 두고 잠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윤주는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함에 자신의 몸을 감쌌다.

다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당황스럽고 힘들어하는 감정들이 느껴졌다. 윤주는 그 모든 걸 피해 사람들과 떨어져 로비 구석의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무서울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언제 봤더라, 물끄러미 보던 윤주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고 거친 빗줄기는 금세 그녀의 손이며 옷을 적셔왔다.

“시원해.”

미소를 지은 윤주가 빗물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중학교 땐가, 미친 듯 폭우가 쏟아져 종아리까지 빠지는 물웅덩이를 지나 집에 걸어온 적이 있었다.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집에 도착했을 땐 뜨거운 김치찌개를 끓여놓은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억에 빠져 행복한 생각을 하고 있는 윤주의 눈에 빗속으로 무턱대고 뛰어드는 꼬마가 보였다.

“어, 저러면 안 되는데…….”

그 꼬마는 어린 시절 윤주처럼 빗속을 첨벙대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물웅덩이에 발을 구르고 물장구를 치고, 말리러 나온 엄마에게 물 폭탄을 터트리고는 좋다고 웃었다.

그러자 아빠가 나와 꼬마를 목말을 태우고 신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빠는 일부러 물웅덩이에 뛰어들어 비를 피해 있는 엄마에게 물을 튀겼고 같이 장난치며 웃는 가족의 웃음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그녀에게까지 들리는 거 같았다.

“……부럽다.”

그녀에게로 걸어오던 이강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낯선 가족을 보며 웃는 그녀의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마치 그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천천히 다가간 그가 윤주 옆에 섰다.

“여기 사람들은 비를 피하지 않아요. 귀한 비를 감사히 즐기는 거죠.”

“행복해 보여요.”

“그럼 같이 해봐요.”

고민하는 윤주의 얼굴을 보던 이강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얼굴을 적시던 빗방울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윤주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방울, 잠시 멍한 얼굴로 윤주를 보던 꼬마들이 이내 그녀에게 물을 튀기며 뛰어들었다.

윤주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이강의 귀에까지 들렸다.

아무 걱정 없이 신나게 뛰며 아이들과 노는 윤주는 새벽에 막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꼭 축제 같군요. 발이 묶여서 계속 초조했는데 저 아가씨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여자친구?

―아뇨, 근데 참 아름다운 사람이네요.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죠. 놓치지 말아요. 저런 사람을 놓쳤다간 평생 후회할 거예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이강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 노부인은 자리를 떴지만 이강의 시선은 윤주에게서 벗어날 줄 몰랐다.

침착하고 조용하고 조금은 냉정해 보이던 윤주의 웃음은 그 어떤 때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강이 손가락 액자를 만들어 윤주를 틀에 가뒀다. 카메라에 찍히는 것처럼 아이와 손을 잡고 빗속을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마음에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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