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75화 (75/75)

태욱이 외국 출장을 떠난 지 일주일째였다. 괜찮다며 잘 있을 수 있다고 씩씩하게 그를 보냈는데 곧 가슴 안에서 모든 게 휩쓸려 나간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지선은 훈재가 출장을 가면 휘파람부터 내불었다. 남편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서영과 함께 머리를 맞댔는데 그때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는 훈재에게 절대 알려 줄 수가 없었다.

― 시간이 왜 이렇게 잘 가?

주말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온 지선이 대뜸 울분을 토했다. 이번 출장은 태욱과 훈재가 같이 떠났다. 지선은 오리를 친정과 시댁에 공평하게 며칠씩 맡기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야 가정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전 너무 안 가는데요?”

― 하하하. 큰일이네. 아직도 그렇게 좋아?

지선이 놀려도 상관없었다. 이제 감정을 감출 이유도 없으니.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줄 알았던 태욱과 서영은 역시나 석완과 영희의 벽에 부딪쳤다. 태욱이 인천 집 마당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들어가 그들이 몰랐던 그간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고개 숙여 사죄했으나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모두 못난 어른들의 잘못일 뿐 태욱의 죄가 아니라며 석완은 오히려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하지만 서영과의 결혼을 쉽게 허락해 주지는 않았다. 아직 제대로 만나 보지도 않았을 텐데 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연애와 결혼은 다른 것이라고. 무슨 연유이건 간에 이별까지 선택한 두 사람이었기에 신뢰를 잃은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같이 살아 봐. 그러고 나서 결정해.’

영희의 마지막 결론에 석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이 집안의 권력이 이영희 여사에게 기울어져 있다고 해도 상의도 없이 이럴 수 있느냐며 불만 섞인 눈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말했으면 허락해 줄 거였어요? 영희가 뻔뻔하게 묻자 석완은 시선을 피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아직 딸을 결혼시킬 마음도 먹지 못했는데 동거라니. 옛날 사람인 석완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희는 그런 남편을 알기에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딱 1년만 살아 보고 그때도 너무 좋아 죽겠으면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태욱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번엔 서영이 태욱을 바라봤다. 그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인가. 태욱은 그런 서영을 설득했다. 청혼까지 허락한 마당에 결혼식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끼리는 그냥 결혼한 것으로 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말이다.

역시나 말 잘하는 남자를 이길 순 없었다. 서영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내막이 있었다.

정애는 서영이 알려 준 연락처로 영희에게 조심스럽게 연락을 넣었다. 진실이 무엇이고 상황이 어찌 됐든 모든 발단은 유신이었고, 그녀의 남편 또한 관여된 일이었으니 정애 또한 머리를 숙여 사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희는 남편 석완에게는 말하지 않고 정애를 만났다. 자신이 커피숍에 들어서자 곧장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이는 중년의 여인을 보는 순간 영희는 조금이나마 불안이 남아 있던 서영과 태욱의 관계를 처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정애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여느 재벌들의 모습과는 완전하게 달랐다. 오히려 그녀보다도 더 속세의 욕망이 묻지 않은 사람 같았다.

정애는 서영을 태욱의 곁에 있게 해 주어 감사하다고, 영희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영희는 솔직해졌다. 처음엔 반대했다고. 태욱에게 모진 말도 건넸다고, 정애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행복하다면 부모가 막을 수는 없지 않겠냐며 그녀가 먼저 둘의 결혼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적극적인 영희의 제안에 정애는 오히려 한발 물러섰다.

필성의 죽음과 터널 사고, 거기에 따른 태욱의 사생활까지. 태욱을 만나지 않았다면 서영이 감당할 필요가 없었을 관심이 조금은 사그라졌을 때, 천천히 식을 올리는 것이 어떠냐는 뜻이었다. 어차피 결혼식은 형식일 뿐이고, 서영과 태욱이 함께 살면 그게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며 정애는 서영의 가족이 굳이 타인의 수군거림까지 감당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영희도 뒤늦게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결혼이 동거로 바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식도 올리기 전에 양가의 동의하에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태욱이 사 둔 빌라는 순식간에 둘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는데,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태욱은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서영이 매일 동네 나무들을 내려다보던 베란다. 그 위치만 바뀌지 않게 공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서영은 아침 루틴대로 언제나처럼 베란다에 앉아 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지선의 전화를 받았다. 계절은 또 여러 번 색을 바꾸며 봄으로 향하고 있었다.

― 아니. 안 들어도 다 알아.

지선은 닭살은 딱 질색이라며 잘라 말했다.

“음……. 제가 대표님 부부 싸움 할 때마다…….”

―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들어. 듣는다고. 하여튼 강태욱이랑 같이 살더니 점점 닮아 가.

지선의 투덜거림에 서영은 잠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못된 것들만 먼저 배운다고, 태욱과 같이 살면서 서영은 좀 더 능글맞아졌고 어쩔 땐 그보다 더 사악해지기도 했다. 태욱이 예전 윤서영은 어디 간 것이냐고 황당해하면 서영은 그거 다 작전이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그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 자 자, 옆에 토할 봉지도 갖다 놨어. 들을 준비 됐다고.

예전의 서영이었다면 지선의 농담에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겠지만, 이제는 그녀가 한술 더 떠 뻔뻔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이상해요. 그 사람이…… 점점 더 좋아져요.”

― 얼씨구, 야단났네.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릴까요?”

― 하지 말란다고 안 해?

서영이 맞는다며 웃었다. 지선은 맘껏 하라며 아예 부추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부터 찾는 손이 좋아요. 넥타이 매 줄 때마다 내 얼굴만 뚫어지게 보는 것도 좋고, 야근하고 들어와서 자고 있는 내 이마에 뽀뽀하는 입술도요. 제사 때문에 인천 다녀와야 할 때면 혼자 잘 수 있다고 해 놓고 1분에 한 번씩 문자하는 것도요. 그리고…….”

― 어, 혹시 자기 강태욱 씨가 첫사랑인가?

불쑥 날아온 지선의 물음에 서영은 간단히 대답했다.

“네.”

― 어, 그래.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 나 진짜 입덧할 때처럼 속이 안 좋아. 미안.

지선이 급하게 사과했다. 서영도 뒤늦게 너무했나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정작 당사자인 태욱에겐 할 수 없었다. 하나 정도 말하고 나면 곧장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직행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반응은 모두 몸을 섞는 일로 마무리되었다. 서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때를 상상하며 혼자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계속 속이 안 좋으세요? 혹시 둘째…….”

― 어, 오리 깼다. 나중에 통화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지선이 급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서영은 아쉬운 마음에 핸드폰 화면만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또 뭘 하지. 태욱과 같이 살지 않았을 땐 어떻게 하루를 보냈던 걸까. 그것이 신기할 정도로 지금의 서영에겐 태욱이 없는 시간들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이불 빨래나 할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그리고 잡념을 없애는 데는 집안일이 최고였다. 이미 며칠 전에 빨아 놓은 이불들이 침대 위에 있지만 게스트 룸에 있는 것들도 이참에 빨아 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서영은 얼른 베란다를 나서 몸을 움직였다.

태욱이 없을 때만 쓰는 큰 고무 대야를 꺼내 와 벚꽃나무들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놓고 물을 받았다. 모두 고가의 세련된 살림살이들로만 채워진 공간이었지만 한 번씩 튀는 물건이 나타났다. 그건 모두 서영이 이전 집에서 버리지 못해 가져온 것들이었다.

“와,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밖을 내려다보며 서영이 읊조렸다. 이런 날에 태욱과 함께 있지 못하다니. 또다시 아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아 그녀는 얼른 물을 받은 고무 대야 안에 이불을 넣고 세제를 풀었다. 그러고는 그 안으로 사뿐히 들어섰다.

발로 이불을 꼭꼭 밟는 기분이 최고였다. 그래서 서영은 언제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이불부터 빨았다. 큰 이불을 하루 종일 밟고 빨아 베란다에 걸어 놓고 말리면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일들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지친 몸이 노곤해져 단잠에 빠져드는 행운도 맛봤다.

오늘도 그러리라. 태욱이 없는 동안 그녀는 거의 불면증에 가깝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그의 병이 옮은 건가.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태욱은 서영과 함께 살며 이전보다 잠을 잘 자게 되었다. 특히나 매일 밤 침대에서 벌이는 일이 그를 단잠에 빠지도록 한다는 아주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나 잠 좀 자야 할 것 같은데?’

태욱은 몸을 섞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게 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서영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도 그와의 잠자리는 최고의 명약이었다. 그를 끌어안고 잔 이후로 나쁜 꿈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랬는데, 고작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서영은 시든 꽃처럼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주 쓸쓸해져 버렸다. 날 왜 이렇게 만들었어. 그에게 갑작스레 화를 내 버릴까 봐 더 꼭꼭 이불을 밟았다. 그러다 창밖을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익숙한 차가 건물 앞에 세워져 있었다. 서영은 여전히 발을 움직이며 차를 바라봤다. 거짓말. 똑같은 차종이 이 동네에 또 있는가 보네.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면 잠을 너무 못 자서 헛것이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서영은 고개를 들고 규칙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뽀득뽀득. 그러다 다시 밖을 내려다보자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이건 꿈일 수가 없었다.

서영은 그대로 고무 대야를 빠져나와 현관 쪽으로 뛰었다. 자신의 발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곧장 계단을 뛰어 내려가 태욱에게 안기고 싶었다. 눈물은 왜 차오르는 걸까. 뭔가 감정 호르몬에 이상이 생긴 것만 같았다.

“나 왔어.”

1층 현관까지 뛰어 내려와 그가 맞는지 확인하듯 우뚝 멈춰 선 서영을 보고 태욱이 두 팔을 벌려 안을 준비를 했다. 서영이 익숙하게 뛰어올라 그에게 안기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악……!”

실내화 안에서 발이 미끄러지며 서영의 몸이 붕 떠올랐다. 놀란 태욱이 민첩하게 그녀를 안아 들지 않았다면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칠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괜찮아?”

“아……. 미안해요.”

서영은 그에게 안긴 채로 민망한 얼굴을 했다.

“안 다쳤으면 됐어.”

태욱에게서 안도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불시에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작전을 짰다. 출장 기간을 줄이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서영이 알면 기함을 할 것이다. 출장 내내 그와 같은 스케줄을 소화한 훈재는 비행기에서 뻗어 버렸다. 대신 그 대가로 은림에게 보너스 청구서를 올리기로 했다. 다시 말해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영뿐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태욱은 서영을 안은 채로 집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뜨거워진 서영이 그의 품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태욱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안 괜찮아.”

유별나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늦었다면 서영이 다쳤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곁에 있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거품이 묻은 발로 뛰어 내려왔겠는가. 태욱은 서영을 안은 채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그 공간의 절반을 욕조로 만들었다. 서영은 조금 어이없어했지만 태욱은 이곳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는 것이 로망이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있는 건 필수 조건이었다. 그 뜻을 전하자 서영에게 처음으로 ‘응큼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가. 그럼, 그런 놈인가 보지.’

자신을 객관화하듯 태욱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감정을 속이고 아닌 걸 맞는 척 살아 봤자 돌아오는 것은 자괴감뿐이지 않던가. 내가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태욱은 서영이 그렇다 하면 그렇다고 믿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

“근데, 왜 갑자기 온 거예요? 어제까지도 그런 말 없었잖아요.”

태욱이 서영을 욕조에 앉혀 놓고 그녀의 미끄러운 발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재킷은 벗어서 대충 옆에 두고 와이셔츠까지 걷어 올렸다. 넥타이를 셔츠 앞쪽의 주머니 꽂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꿈에 자꾸 나와서.”

“또 꿈꿨어요?”

서영이 한순간에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 하여튼 놀리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꿈을 꾸기나 했을까. 하지만 서영은 태욱이 꿈을 꿨다고 하면 자신의 일처럼 걱정했다.

‘또 아버님이 나오셨어요? 왜 그러시지. 요즘 당신 너무 무리해서 그래요. 내 꿈에도 나와 주시면 좋을 텐데. 그럼 당신 아주 잘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손 꼭 잡아 드릴 거예요. 언제 그럴 수 있을까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서영이 그런 말을 해 주면 태욱은 그녀를 가슴으로 꼭 끌어안았다. 네 마음만으로 나는 행복해. 아버지도 다 아실 거야. 꿈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어. 영원히 내 옆에만 있어 줘. 그래 주라, 윤서영. 마지막은 언제나 그의 사랑 고백이었다.

“농담.”

태욱이 곧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자 서영은 그를 노려본다. 꼭 고치지 못하는 병처럼 한 번씩 그녀를 놀려 댈 때가 있었다. 그것 역시 이 남자의 사랑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서영은 거기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나 버렸다.

“잠은 좀 잤어요?”

서영은 거뭇하게 그림자가 진 태욱의 눈가를 쓸어 내며 물었다.

“엄청 잘 잤지.”

태욱은 서영의 발을 다 씻은 후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 냈다.

“이것도 거짓말이죠?”

두 번은 안 속는다, 그런 표정으로 서영이 태욱을 바라봤다. 태욱은 다른 말이 필요했다.

“당신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치. 서영은 입을 삐쭉였다. 이 남자가 도망가는 수법을 이제는 잘 알았다.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하면 그녀가 걱정할 것을 알기에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 배려하는 마음까지 닿아 버린 가슴이 먹먹하게 울려왔다.

“뭐, 당신이 출장 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나는 잘 지냈어요.”

서영이 일부러 크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오. 그렇군.”

태욱은 발을 다 씻긴 서영을 안아 올리며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진짜 괜찮아요.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그래?”

그가 그녀를 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되물었다. 서영은 태욱이 뭔가 서운함을 느낀다는 걸 알아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대로 옷도 갈아입지 못한 남자를 더 이상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보낸 뒤 끝도 없는 허전함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내가 하는 사랑이 성숙하지 못한 투정으로 변할까 봐 겁난다고. 이제 당신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데, 당신이 나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정말 지선의 말처럼 첫사랑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서영은 모든 감정들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태욱이 그녀를 내려 두고 돌아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또 가슴 끝이 아파 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설명이 되는 감정일까.

태욱이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는 동안 서영은 점심을 준비했다.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주방으로 들어와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언제나처럼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묻는 것만으로도 서영은 만족했다.

출장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늘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었고, 그녀의 핸드폰으로 오리의 재롱이 담긴 동영상과 사진을 살펴보며 함께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같이 보기로 한 영화 한 편을 켜고 한 몸인 듯 소파에 붙어 앉았다.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던 그가 스르륵 잠드는, 모든 것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일상이었다.

“오늘 왔습니다. 다시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두 사람 모두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서재에서 업무 관련 통화를 하고 있는 태욱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주방에 있는 서영의 귀에까지 들어오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출장에서 돌아왔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태욱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은림이 유신의 대표로 결정되면서 그의 역할이 이전보다 더 커질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태욱은 회장 자리 따윈 이제 관심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은림을 비롯해 모두가 아쉬워했다.

그건 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잠조차 반납하며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를 지켜보며 짝사랑한 5년의 시간이 그 증명이었다. 유신을 가장 잘 이끌어 갈 사람이 태욱임을 알기에 은림도 그를 놓지 못했다.

“하……. 진짜,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끊어요.”

태욱이 핸드폰을 던져 놓고 서재 방을 빠져나왔다. 서영이 이미 모든 걸 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식탁에 다가와 앉으며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2박 3일 정도만 다녀올게.”

서영은 찌개를 식탁 중앙에 놓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다녀오는 건 괜찮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요.”

태욱이 알았다며 웃었다. 식사는 시작됐지만 어쩐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걸 두 사람 모두 모른 척했다. 태욱이 서영의 밥그릇에 다정히 고기반찬을 올려 주었다. 변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서영은 그렇게 또 내일이면 지난 일주일처럼 힘겹게 감당해야 할 그의 빈자리를 애써 모른 척했다.

“……자요?”

서영은 여느 날보다 천천히 샤워를 하고 먼저 침실로 들어선 그의 곁에 누웠다. 그는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습관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익숙한 손이 잠옷 속으로 파고들어 서영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미안해요.”

서영은 불쑥 사과를 건넸다. 태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그가 싹싹 빌어야 할지도 몰랐다.

“당신한테…… 어른인 척 굴었어요.”

그녀를 끝으로 내몰아 감정을 쏟아 내게 만드는 나쁜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윤서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받고 싶어 했다. 철없는 아이가 된 것처럼 그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태욱이 눈을 떠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왜요?”

묻는 서영의 눈가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그가 그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내며 입술을 맞췄다. 서영은 또 웃음이 났다. 뭐가 그리도 어려워서. 솔직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마음과 달리 행동은 쉽지가 않았다. 연습이 필요한 것이겠지.

“우리, 속마음 털어놓는 게임 할까요?”

서영은 한 번씩 엉뚱한 행동을 했다. 그래, 해 보지 뭐. 간단히 답한 태욱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잠옷 안에 감춰진 부드러운 속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나부터 할게요. 당신 출장 가고, 하루도 제대로 못 잤어요.”

자유롭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 눕혀 눈 아래를 살펴본다. 서영은 심각한 그의 눈빛에 잠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당신은?”

“나야 이제 너 없으면 못 자는 거 알잖아.”

뭘 묻느냐는 답이었다. 서영 또한 태욱이 했던 것처럼 그의 눈가를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당신이 없어서 모든 게 다 시시했어요. 보고 싶은데 빨리 안 와서 욕하면서 이불 빨래 했어요.”

발에 거품이 묻어 있던 게 그것 때문이었느냐며 태욱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또?”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난 윤서영의 모든 게 다 좋아서 문제야.”

하여간 말로는 못 이기는 남자였다.

“뭐가…… 좋은데요?”

그게 또 듣고 싶은 게 서영의 마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거. 아직도 내 넥타이 매 주면서 빨갛게 뺨을 붉히는 것도 좋고, 또 뭐가 있더라.”

서영은 잠자코 듣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야근하고 들어왔을 때 내가 이마에 뽀뽀할 수 있도록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것도 좋고…….”

“잠깐. 이거……, 대표님한테 들은 거죠?”

“나도 얻어들은 거야.”

“어떻게?”

태욱이 서영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대표 요즘 육아 브이로그 한다며? 그것 때문에 오리 동영상을 찍는데 당신이랑 스피커폰으로 대화하는 게 담겼더라고. 그걸 모르고 훈재한테 보냈고, 그 녀석은 오리 자랑 하겠다고 나한테 보여 줘서 내가 듣게 된 거지.”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서영은 더욱 부끄러워졌다.

“근데, 왜 이 대표한테는 쉽게 하는 말들이 나한텐 어려운 거야?”

생각하니 또 이유 모를 화가 난다며 태욱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그게…… 당신한텐, 암튼 부끄럽고 힘들어요. 나도 노력하고 있어요.”

서영이 이해해 달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 또한 귀엽기만 한 태욱은 서영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말하기 힘든 게 있어.”

“응? 뭔데요?”

궁금하다며 서영이 말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널 만지고…….”

그가 서영의 잠옷 안으로 다시 손을 넣었다. 어째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 서영의 얼굴은 야릇하게 타오르고 말았다. 태욱은 그녀를 한 팔로 끌어당겨 안으며 아주 큰 비밀인 양 읊조렸다.

“네가 울면서…… 못 하겠다 소리칠 만큼, 밤새 안고 싶다는 건…….”

“…….”

“절대 말 못 해.”

그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드러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태욱의 눈빛이 순식간에 색을 달리했다. 서영은 마치 누군가 숨길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그녀의 흥분을 알아챈 듯 태욱이 서영의 아랫배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아니, 우리 그런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그게 내 진심이야.”

태욱이 귓가에 대고 간단히 말했다. 말은 단정했으나 행동은 완전히 반대였다. 그의 손이 이번엔 서영의 아래로 불쑥 침범했다. 흣. 신음을 터뜨린 서영은 태욱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자신이 더 음탕해진 것 같아 태욱을 밀어 보려 했지만 곧장 그의 완력에 의해 아래에 깔려 버렸다.

“…….”

“…….”

“윤서영, 사랑해.”

태욱이 잠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백했다. 그러고는 길게 입을 맞췄다. 이러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나. 서영은 포기하듯 그에게 몸을 맡겼다. 서로를 향한 진심을 허기진 입맞춤으로 채웠다. 그가 내일 다시 떠나야 한다고 해도, 오늘은 서로를 안고 또 안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 길길, 둘은 한마음으로 빌었다.

○ ◆ ○

“뭐 해? 밥 먹다가 자는 거야?”

서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고개가 내려간 걸 뒤늦게 알아챘다. 태욱이 동틀 때까지 그녀를 괴롭힐 줄은 몰랐다. 잠은 똑같이 자지 못했는데 왜 그에게서만 그런 체력이 나오는 건지. 손수 아침까지 차려 놓은 그가 그녀를 침실에서 안고 나와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는 더 자도 된다고 했지만 서영이 반대했다. 이대로 잠에 빠져 있다가 그를 보낼 순 없었다.

“안 자요. 눈 감고 아주 중요한 생각 하는 중이에요.”

서영의 대답에 식탁으로 다가온 태욱이 그녀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서영이 귀여운 행동을 할 때마다 보이는 그의 버릇이었다.

“무슨 생각 했는데?”

그가 옆에 앉으며 모른 척 물었다.

“당신 없을 때 뭐 해야 시간이 빨리 갈까, 그 생각.”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으니 서영도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또 마음에 들었는지 태욱은 그녀의 입에 짧게 키스를 했다. 서영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더군다나 그녀는 지금 중요한 전화까지 기다리고 있어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전화는 왜 자꾸 봐?”

그가 단번에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고 묻자 서영은 아닌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잠을 깨야만 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잔뜩 사 둔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꺼냈다. 그의 앞에 가져다 놓고 퍼먹으며 잠을 깰 생각이었다.

“어……. 너무 얼었다.”

정말 아이스크림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서영이 수저로 쾅쾅 쳐 내도 단단히 얼어 버린 아이스크림은 그녀에게 아주 소량만 먹는 것을 허락했다. 그때 태욱이 자신의 두 손으로 아이스크림 통을 감쌌다. 이렇게라도 녹여 주겠다는 뜻인 거다.

“하지 마요. 손 시려요.”

“입이 더 시린데?”

하여간, 말로는 못 이기는 남자였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면이 있었다. 서영은 그의 손 안에서 녹는 아이스크림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그때 때마침 전화가 울렸고 서영은 얼른 그것을 들고 서재 방으로 달려갔다.

“네네. ……정말요? 진짜죠? 네네, 얼른 준비할게요.”

윤서영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재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서영이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 당신 따라가도 괜찮아요? 대표님이 휴가 주셨어요. 어제 말해 두긴 했는데, 안 될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그래도 너무 따라가고 싶어서……. 진짜, 방해 안 할게요. 그냥, 옆에만. 아니, 저 멀리서 보기만 할게요. 그것도 힘들…….”

태욱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맞춰 왔다. 금방 입술을 떨어뜨릴 줄 알았는데 곧 진한 키스로 변해 버렸다. 간신히 숨을 몰아쉰 태욱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곤 곧장 침대로 직행하는 그를 서영이 말려 봤지만 쉽지 않았다.

“금방 끝낼게.”

“아니, 나 짐도 싸야…….”

“거기서 사 줄게. 아님, 내 꺼 입어.”

정말 못 말리는 남자였다. 순식간에 애써 입은 잠옷이 벗겨지고, 목을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가슴에 닿는 순간이었다. 빵빵! 크게 클랙슨이 울렸다. 마치 그들을 부르는 신호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위 없는 태욱은 자신의 옷까지 벗어 던지려 했다. 그때 돌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사님, 계십니까! 태욱아! 강태욱!”

멀리서도 또렷이 들리는 훈재의 목소리였다. 서영은 화들짝 놀라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금 지선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단 말인가. 지선은 이미 훈재의 출장 때문에 휴가를 쓴 상태였다. 이렇게 또다시 독박 유아를 연장할 수 없다며 자신도 따라갈 작정이니 출장지에서 혼자 있을 시간은 걱정 말라는 말까지 더해 주었다. 고맙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그들을 같이 태워 가겠다는 뜻일 줄은 몰랐다.

태욱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일어서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뭐야?”

그가 문을 열자 훈재가 오리를 안고 서 있었다. 애초부터 그의 보복을 차단하겠다는 아주 계산적이고 머리 좋은 작전이었다. 훈재의 잔머리는 이런 상황에서 특히나 잘 발휘되었다.

“오리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무서운 아저씨.”

훈재는 안고 있는 오리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오리의 이름은 ‘박수호’라고 지었지만 모두들 아직까지는 수호 대신 오리라고 불렀다. 오리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야만 웃으며 돌아봐 주었다.

오리는 태욱의 뒤에 선 사람을 알아보고 짧은 두 팔을 뻗어 안아 달라 표현했다.

“안녕하세요, 제수씨.”

“안녕하셨어요.”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서영이 얼른 태욱의 뒤에 섰다.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오리는 거의 반쯤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 서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우리 오리가 서영 씨를 진짜 좋아하네요. 여전히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훈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아빠인 그보다도 서영이 더 많이 오리를 안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 품과 향기에 익숙해진 오리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니에요. 좋아해 줘서 제가 더 고맙죠.”

얼른 오리를 넘겨받은 서영이 제 품에 조심스레 안았다.

“아고고, 우리 오리 왔어! 그래, 이모지! 여기가, 이모 집이에요.”

서영은 오리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녀석을 달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욱이 다시 훈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으로 그가 친구를 노려봤다.

“다 같이 가자고.”

“어디를?”

태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출장이지. 서영 씨가 너 따라가겠다고 해서 우리 마누라, 그러니까 이지선 여사님도 짐을 싸셨어. 이렇게 또 독박 육아 하는 건 죽어도 안 된다고. 뭐, 올해는 휴가도 제대로 못 갔잖아. 그래서 나도 데려가려고. 네가 이해 좀 해라.”

각자 가족을 데려가는데 그가 뭐라 할 텐가. 하지만 오리네 식구들이 함께 간다면 서영과 그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 것은 분명했다. 떨어지기 싫어서 출장까지 따라가겠다는 여자인데 상황이 참 쉽지 않았다.

“저 짐 다 쌌어요. 이제 가요!”

서영은 오리를 안고서 어느새 짐까지 쌌다. 가방이 단출한 걸 보니 태욱의 말대로 없는 건 출장지에서 살 생각인 듯했다. 차에서 기다리는 지선이 여러 번 클랙슨을 울려 집에 있는 사람들을 재촉했다. 태욱은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서영의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훈재는 오리가 태어나면서 차를 대형 SUV로 바꿨다. 오리를 가운데 좌석의 카시트에 앉히고 그 뒷자리에 서영과 태욱이 앉아서 공항까지 향하는 게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이나 언제나처럼 생각대로 될 리가 없었다. 오리는 서영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카시트에 간신히 앉히긴 했으나, 서영이 잡고 있는 손을 놓으려고 하면 목 놓아 울어 버렸다.

“미안한데, 자기가 오리 옆에 앉아야겠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에 지선은 당사자인 서영이 아닌 태욱을 바라보며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태욱은 감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일 뒷좌석에 털썩 앉은 그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오리를 향한 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리야, 오늘은 진짜 안 돼. 이모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같이 탔거든. 이모는 그 사람 옆에 앉아서 가고 싶어. 그래도 괜찮을까?”

오리가 그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놀랍게도 녀석의 눈물이 그쳐졌다. 서영은 고맙다며 녀석의 볼에 뽀뽀를 하고선 태욱이 있는 뒷좌석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서영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태욱은 그저 얼음이 된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리 아빠, 난 봉지 챙겼는데. 당신은 괜찮겠어?”

뒷자리의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선이 훈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저랬나.”

“절대. 네버.”

지선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치? 저보다는 심할 수 없다고 본다.”

옛 기억을 조작하듯 지워 버린 오리 부부가 나누는 이야기는 듣지 않은 채 태욱과 서영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욱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도 모르게 서영의 볼에 길게 뽀뽀를 할 때도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요. 제정신으로 돌아온 서영이 낮게 경고를 해도 태욱은 그저 웃었다.

“그거 알아?”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뭘요?”

서영이 그와 함께 밖을 보며 물었다.

“내가 윤서영을…… 당신 생각보다 더 빨리 마음에 담았다는 거.”

“……응? 지금 뭐라고 했어요?”

놀란 얼굴로 서영이 묻자 태욱이 또 눈꼬리를 내리며 한 마리 대형견처럼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같이 녹아 버렸다.

서영은 그의 웃음이 좋았다. 그녀의 앞에서만 풀어지고 온전해지는 이 남자의 행동들. 어쩔 때는 그 모습마저 아팠고, 이제는 그것을 보지 못하면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사랑일까. 아직은 그 감정의 전부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으로도 충분했다. 창밖의 날씨는 너무 좋았고, 그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한 남자가 그녀의 곁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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