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걸음을 뗄 때마다 눈앞이 하얘졌다. 어지러움까지 더해지는 걸 보니 이번 두통은 강도가 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손 회장이 본가로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뭘 더 해낼 수 있을까, 반문하면서도 그는 그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포기하는 게 필요했다. 잠은 애초부터 그의 인생에서 친해질 수 없는 욕구였다. 병처럼 불면증을 달고 살다 보니 얻어지는 건 시간이었고 남들보다 더 오래 깨어 있는 덕분에 해낼 수 있는 게 배가되었다.
“후…….”
태욱은 또 한 번 바늘도 찌르듯 관자놀이를 쑤시는 두통에 숨을 삼키고 내쉬었다. 복도에 선 채 두통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어차피 늦은 밤이었고 사무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다는 소리였다.
굳이 감출 것도 없었지만 먼저 약점을 내보일 필요도 없었다. 사내에서 이미 태욱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철인이었고, 인간이 아니라 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진지한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태욱은 잠시나마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였기에 지금의 모든 것을 이뤄 냈다는 걸 증명하리라.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아버지가 제 발로 떠난 손 회장의 곁에서 현재를 살아 냈다.
재벌가의 감춰 둔 손자. 그리고 후계자가 되기 위한 능력 검증. 모두가 진실을 알면 고개를 끄덕이고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으로 여길 사연. 그 주인공이 태욱 자신이었다. 그 또한 스스로가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태어나는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 내기 위해 정한 하나의 목표가 한 번씩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해져 그를 주저앉게 만들 때도 있었다. 머리가 뜨거운 물에 담긴 것처럼 끓어오르며 터져 버릴 것만 같을 땐 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반문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약을 먹으면 되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태욱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두 번째 서랍을 열자 두통약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중 제일 약효가 강한 약통을 집어 올렸으나 빈 통이었다. 나머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많은 약들을 어느새 다 집어 먹었던가. 이 정도면 약물 중독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탁, 서랍을 닫고 탕비실 쪽을 바라봤다. 사무실로 들어설 때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누군가 남아 있는 건가. 빽빽하게 붙어 있는 책상들을 훑어보는데 맨 끝 지점에서 작은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홍보 팀 신입 자리였던가. 태욱은 잠시 추측을 하다가 다시 두통이 몰려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탕비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내부는 조용했다. 아마도 마지막 퇴근자가 깜박하고 불을 끄지 않은 것 같았다. 태욱은 망설임 없이 상비약이 구비된 쪽으로 다가가 약을 꺼내고 입에 털어 넣었다. 물과 함께 약이 내려가는 순간에도 통증은 그의 머리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 하는 수 없이 태욱은 바닥에 주저앉아 냉장고에 기댔다.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자 그제야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프리지아 향에 감각이 곤두서고 말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눈을 뜨진 않았다. 언젠가 맡은 적 있는 냄새였다. 어릴 적, 세 식구가 함께 살았던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부터 퍼지던 섬유유연제 향기였다.
태욱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스르르 눈을 떴다.
“…….”
“…….”
테이블 아래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한 여자에게로 그의 시선이 정확히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의 눈동자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뒤흔들리는 게 보였다. 새로 들어온 신입이라며 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는 간신히 참아 냈다.
그러고는 여자와 대치하듯 눈싸움을 했다. 당연히 몸을 일으키고 상황을 변명할 줄 알았던 신입은 그대로 얼음이 된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해는 되었다. 이 여자도 지금 얼마나 황당할까. 이 회사에서 가장 잘난 놈이라던 상사가 두통약을 집어 먹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 얼마나 실망이 클까. 태욱은 시시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두통은 모조리 가셨다. 아무래도 상비약이 그에게 아주 잘 듣는 종류인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온 그는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집무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탕비실은 여전히 불이 켜진 채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벌컥 문을 열고 말을 걸어 볼까. 태욱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여자의 겁먹은 눈동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에선 진동음이 울렸다. 손 회장의 호출이었다. 태욱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입가가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 ◆ ○
“그 집 샌드위치 진짜 맛있죠?”
“너 간식으로 먹게 하나 더 살 걸 그랬나.”
“됐어요. 배불러요. 그리고 선배는 빵 종류 싫어하잖아요.”
“네가 먹고 싶으면…… 어,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1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원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에서 먼저 올라타 제일 뒷자리로 물러난 태욱이 얼굴만 익숙한 홍보 팀 남자 직원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숫자판을 올려다봤다. 금방 점심을 먹고 들어온 사람들에게선 갖가지 음식 냄새들이 섞여서 풍겨 왔다. 그런데 그 틈 사이를 비집고 기어이 그의 코를 자극하는 프리지아 향. 태욱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누군가를 찾아냈다. 이젠 어쩐지 익숙하게 다가오는 얼굴이었다.
‘윤서영’이라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탕비실 사건 다음 날 아침, 인사 팀에서 가져온 신입 평가 보고서가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이력과 외모. 거기다 이름도 흔하다면 흔했다. 태욱이 눈여겨볼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업무 평가는 입사 동기들보다 양호했으나 특출하게 뛰어난 건 아니었다.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은 태욱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정면으로 향하는 곳에 신입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두통을 앓을 때면 먼 곳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껏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눈빛을 교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팀장인 태욱을 대하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결국 분기별로 바뀌는 자리 배치도에서 그 위치는 늘 신입의 몫이었다. 그리고 갓 들어온 신입들은 곧 자신에게 맞는 부서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겨 갔고, 태욱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영은 달랐다. 신입 딱지를 떼고 홍보 팀으로 발령을 받았음에도 지금의 그 자리를 유지했다. 어쩌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그녀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어리숙하게 행동했다. 이리도 티가 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탕비실에서 마주친 일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의식하게 만든 것 같았다.
태욱은 조금 지나면 사라질 관심이라 여겼다. 그 시선을 신경 쓸 만큼 그는 한가하지 않았다. 한 달의 절반은 외근과 출장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근무 시간에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자리를 비울 때가 더 많았다. 그런 만큼 그에게 야근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러니까 서영은 그 이후로도 수시로 불쑥,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그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섬유유연제 향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관심이 간다는 건 이제껏 그가 살아온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회상)‘마음에 드는 여자 없어? 자꾸 눈에 들어오고, 생각나는…… 그런 사람.’
종종 갖는 술자리가 끝나 갈 무렵, 친구 훈재가 늘 건네는 물음을 태욱은 언제나 비웃어 버렸다. 생각나는 이와 사랑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어 붙이다니. 그것은 아무렇게나 정의 내릴 수 있는 흔한 마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핏줄을 버렸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그렇게 위대하고 고귀했으며 다른 어떤 것보다 신중해야 하는 큰 감정 덩어리였다.
태욱은 자꾸만 일 외적으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려면 멀었고, 손 회장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지금보다도 더 많은 결과물을 그의 눈앞에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태욱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들어 서영의 자리를 바라봤다.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선을 내리고 컴퓨터를 켜려는데 속이 쓰렸다. 아침, 점심 모두 걸렀나. 무엇이라도 입에 넣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오늘 저녁에 후문 앞에서 떡볶이 먹을까?”
“아, 그 파란 집이요?”
우연의 연속이었다. 탕비실 안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두 사람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정하게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는데 방해꾼처럼 태욱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장 얼어 버린 서영이 얼른 고개를 숙인 뒤 커피를 싱크대에 버리고선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순식간에 공간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남자 직원이 그에게 목 인사를 건넸다. 서 대리였던가. 서지훈. 그제야 이름과 얼굴이 매치가 되었다.
“두 사람이…… 친한가 보죠.”
지훈이 탕비실을 나서려 하는 순간 태욱이 커피머신에 컵을 올려놓고 물었다. 바쁜 팀장과 말을 제대로 섞어 본 적이 없었던 지훈은 조금 놀라서 그렇다, 짧게 대답했다. 뭔가 더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기에 어쩔 수 없이 대학교 후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랬군요.”
태욱이 언제 질문을 했냐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단답으로 받아쳤다. 민망해진 지훈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인사를 건네고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태욱은 커피머신에서 추출된 에스프레소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속이 쓰려 간식이라도 집어 먹으려 이곳에 들어왔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곧이어 작은 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조만간 사무실 자리 배치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타. 가는 길에 내려 줄게.”
본가를 빠져나와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은림의 스포츠카가 빵빵 크게 클랙슨을 울렸다. 지방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간단한 접촉 사고가 났다. 차를 수리점에 맡기며 대여할 생각도 했으나 하루 이틀이면 수리가 가능하다기에 번거로운 일을 만들기 싫어 잠시 뚜벅이를 자처했다.
그가 지내는 오피스텔은 회사에서 두 정거장 거리였기에 급박하게 외부 출장을 가는 경우가 아니면 크게 불편할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어찌 아는 것인지 아침부터 손 회장이 그를 호출했다. 이유는 허무하게도 같이 아침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본가로 넘어가 이른 아침부터 꾸역꾸역 밥알을 삼켰다. 어머니 정애는 늘 그 자리에서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태욱은 더욱더 수저를 힘차게 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출근 전, 소화제를 사 먹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버텨 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입을 연 사람은 은림뿐이었다. 화제는 언제나 태욱이었다. 본가에 자주 좀 들르라는 협박성 잔소리. 필성은 늦둥이 딸의 오지랖에 굳이 말을 보태지도, 그렇다고 태욱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필성은 평소와 같은 양의 밥을 먹고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정확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별채로 향하는 것을 본 태욱이 재킷을 챙겨 일어나자 정애는 기어이 준비해 둔 다과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것까지 먹게 되면 정말 오늘 아침 회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 태욱은 정애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바쁘다고 거절하곤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정애와 그가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외출 준비를 마친 은림은 어느새 차까지 몰고 나와 있었다. 아예 그를 태워 가기로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니 내려다보고 있어. 얼른.”
정애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란 추측은 당연했다. 태욱은 어쩔 수 없이 새빨간 스포츠카에 몸을 실었다. 곧 차가 거대한 모터 소리를 내며 동네 어귀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거기, 콘솔 박스 열어 봐. 소화제 있을 거야.”
은림은 태욱의 표정만 보아도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눈칫밥이 몇 년인데. 태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조수석 앞의 콘솔 박스를 열었다. 갖가지 약들이 즐비하게 들어 있었다. 이 집 안에서 살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새 잠은 좀 자니?”
태욱이 마시는 소화제 한 병과 알약을 꺼내자 은림이 연이어 물었다. 그의 불면증은 어머니 정애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그걸 고모인 은림이 모를 리 없었다. 유별난 두 여자의 관심이 아주 싫은 건 아니었지만 때론 부담이 되기도 했다.
“알아서 해요.”
“잘도.”
은림이 곧장 받아쳤다. 태욱은 소화제를 먹고는 흐리게 웃을 뿐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아? 그건 잘못된 인생이야. 어디 놀러도 좀 가고, 좋아하는 취미도 가지고, 마음 가는 사람도 만나고. 응? 그렇게 살아야…….”
“고모나 그렇게 하시죠.”
불쑥 이혼하고 다시 본가로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서로가 잔소리할 처지는 아니란 눈빛으로 태욱이 그녀를 바라봤다. 은림은 ‘하여튼 강태욱.’이라면서 ‘하하하’ 웃어 버렸다. 그 뒤로 차 안엔 정적이 흘렀다.
태욱은 소화제를 먹어도 가슴의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 창을 내렸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어째선지 그를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생각을 내려놓고 멍하니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던 태욱의 시선에 한 여자가 걸렸다.
“뭐야, 왜 갑자기 막히지? 앞에 사고 났나?”
회사 근처에서부터 차가 거북이걸음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 덕에 태욱은 작은 샌드위치 가게 앞에 줄을 선 서영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길게 늘어선 줄 뒤에서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며 빼꼼, 앞으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도 했다.
“난 여기서 내릴게요.”
“어?”
태욱이 가방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걸어가도 되는 거리니 차 안에서 시간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대충 인사를 건넨 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태욱을 향해 은림이 서운해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마침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뛰듯이 건너간 태욱이 샌드위치 가게에 다다랐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영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출근 시간에 늦을까 봐 연신 줄의 길이를 확인하며 남은 시간을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그 정도로 꼭 사 먹고 싶은 음식인 건가. 태욱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식은 그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양소로만 여겨 왔다. 제시간에 밥을 챙겨 먹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에게 일보다 우선인 건 없었다.
“아, 여기 서세요. 먼저 받으셔도 돼요.”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서 있던 서영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는 할아버지에게 선뜻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노인이 고맙다며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인사를 건넸다. 이러면서 제시간에 출근하길 바라는가. 태욱은 그녀가 하는 행동들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세계의 사람이잖아. 그래서 빠졌던 거 아닐까?’
어느 날인가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마신 은림이 태욱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추리했다. 그게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는 사랑으로 태어난 아주 귀한 사람이란 걸 굳이 가슴에 박히도록 세뇌시키고 싶었던 걸까.
태욱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신 일가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볕이 좋은 날, 집 안의 모든 침구들을 꺼내 발로 차곡차곡 밟으며 빨아 내야만 스트레스가 풀렸고, 새하얀 이불보가 보송보송하게 말라 가는 걸 보면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은림조차 정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누구는 그것을 사서 하는 고생이라 했으나 그녀 자신은 보람된 수고라고 여겼다.
‘태욱아. 사람은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야 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 제가 먹은 그릇은 스스로 치울 줄 알아야 해. 어떤 것도 당연한 건 없어. 열심히 노력해야 후회가 생기지 않아. 엄마는 항상 네가 노력해서 행복해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어릴 땐 어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일곱 살 이후 보고 자란 유신 일가의 모습들은 그 말들과 정반대였으니.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한 번씩은 어머니가 스스로 깨달은 인생의 정의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위험한 추측에 다다를 때도 있었다.
“어, 아빠. 나, 지금 출근 중이에요. 어디, 벌써 설악산이야?”
다행히 늦지 않게 샌드위치를 산 서영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통화를 시작했다. 태욱은 천천히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를 두며 따라 걸었다.
“규철이 아저씨는 스틱 사셨대요? 아하, 아빠랑 갔어요? 오, 맞아요. 그 브랜드 좋아요. 내가 첫 월급 탔을 때 사 드렸던 거잖아. ……응. 나? 이번 주말도 안 될 것 같아요. 일도 좀 남았고, 모처럼 이불 빨래도 해야 하고. ……누구? 남자 친구?”
서영이 놀란 듯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태욱도 따라서 발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이상하게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건가. 그게 지금 그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만, 그래도 뒷말의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파악하고 싶기도 했다.
“이불이 내 남친인데. 몰랐지, 아빠?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지. 하루라도 안 끌어안고 자면 큰일 나. 그래서 나 매일매일 행복하다? 하하하.”
서영이 멋쩍게 웃는 지점에서 태욱도 같이 웃고 말았다. 그게 소리로 나왔던 걸까. 그녀가 갑자기 핸드폰을 내리고 뒤쪽을 돌아보려고 했다. 태욱이 한발 빠르게 행동하며 건물 뒤로 숨었다. 뒤로 돌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다행히 다시 통화를 이어 가며 걸음을 옮겼다.
태욱은 잠시 뛰는 심장을 다스렸다.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그는 잠시 멍해졌다. 왜 심장이 뛰는 거지. 그리고 왜 스토커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뒤쫓고 있으며, 그 여자의 전화를 엿듣고 싶은 건데. 가장 문제는 그의 얼굴이었다. 태욱은 뒤늦게 건물 외벽 유리에 비친 모습을 발견했다. 상기된 표정의 강태욱이 거기 서 있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태욱은 그걸 본인에게 묻고 싶었다.
○ ◆ ○
“네? 자리 배치도, 말씀입니까?”
담당 직원이 재차 물었다. 태욱은 이미 결재가 넘어간 일을 다시 가져와 수정하거나 없던 일로 만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신중했고,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주 시시한 자리 문제로 일부러 내선 전화기를 들어 직원을 호출한 것이다.
“네. 다시 고치는 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는 오히려 되묻는 담당이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아, 아뇨. 바로 올리겠습니다.”
직원이 집무실에서 나가고 태욱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오전 내내 집중을 했던 터라 눈가를 풀어 주지 않으면 저녁쯤엔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의 자리에서 먼 곳을 내려다봤다.
서영이 보였고, 그녀는 정신없이 업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늘 그에게 시선이 닿아 있을 줄 알았는데 태욱이 고개를 들 때 눈이 마주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닿아 있는 것보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태욱이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영의 자리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예외 없이 서지훈이었다. 그녀의 파티션 위에 여유 있게 팔을 걸친 그는 간단한 농담을 건네는 것 같았다. 서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말에 맞장구치듯 웃어 주었다.
그러다 잊고 있었다는 듯 태욱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태욱은 피하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푸른색 와이셔츠를 입은 등이 둘의 시야를 막았다. 지훈이 서영의 책상 아래에 놓인 물건을 들어 올리느라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자연스레 눈빛 교환은 끝이 나 버렸다.
고개를 내린 태욱에게선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아침부터 계속해서 떠오르던 물음이 그를 유치하고 우스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다시 차갑게 표정을 지우고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안경을 꼈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손 회장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태욱은 지체하지 않고 재킷을 챙겼다. 바삐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를 눈치챘지만 무시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
○ ◆ ○
“진짜 결혼하시는 건가? 건양이면 도대체 팀장 집은 얼마나 빵빵…….”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직원의 목소리가 태욱의 귀에도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언제나처럼 차갑고 단정한 걸음으로 무리 속에 들어섰다. 그 안에 서영도 같이 끼여 있었다는 걸 엘리베이터가 신사업 팀이 위치한 층수에 도착해서야 알아챘다.
문이 열리고 태욱이 내리자 서영이 뒤에 따라붙었다. 아주 엄격하게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그게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났다.
지금 그의 상황이 그를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언제나처럼 손 회장에게 불려 가 회사 업무나 종용받을 줄 알았는데 불쑥 ‘결혼’이란 카드가 내밀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이미 혼인 날짜까지 잡혀 있었다. 정작 당사자의 의견 따윈 중요치 않은 철저히 이해타산에 의한 계약 같은 혼사였다.
‘싫습니다.’
그 한마디만 건네고 돌아섰는데 손 회장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단단히 벼른 일이란 소리였다.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태욱은 결혼의 당사자인 여자를 한 번 만났다. 그리고 제 뜻을 똑똑히 전했다. 여자는 그의 거절 이유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일을 겪은 것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오히려 신선하다는 감상을 내놓으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이미 태욱의 메일함에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밀애 여행을 다녀온 사진들이 수십 장 들어와 있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오만한 태도의 인간들을 경멸해 왔다. 아버지의 피를 쫓아 유신으로 기어들었으면서도 단 하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 가진 올바름이었다.
거기에 부합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사랑만이라도 그렇게 동화처럼 완성하고 싶은 그의 꿈을 짓밟듯 서서히 목을 죄어 오는 손 회장의 계략들이 역겹고 신물이 나 견들 수 없는 나날이었다.
회사에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휴식처럼 윤서영을 바라봤을 때, 언제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여자가 이제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게 그를 더 답답하게 만들고 때때로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한계에 다다른 순간은, 의외로 아주 쉽게 찾아왔다. 평소라면 1차가 끝나기도 전에 회식 자리에서 빠졌을 것이다. 옆자리의 직원이 그가 비운 술잔에 재빨리 술을 따르는 걸 바라보고 있다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서영과 지훈이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술잔을 독차지하듯 지훈이 연달아 술을 따라 주었고, 서영은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볼을 연신 쓸어 냈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서지훈이 슬쩍 웃는다. 태욱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다 심장 안에서 요동치는 무언가를 느껴야 했다.
“팀장님 오늘 잘 드시네요.”
술이 이리도 달았던가. 독주를 마시면 금세 뻗어 버리는 터라 태욱은 술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대체 무엇일까. 갑작스레 은림의 혀 차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잘못된 인생이야. ……마음 가는 사람도 만나고. 응? 그렇게 살아야…….’
태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주변인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숨 돌린다는 듯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태욱은 이렇게 빠져 주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으로 가게 옆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그때 손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태욱은 파혼의 자초지종을 똑똑히 설명하고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더는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더는.
담배를 끄기 위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눈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뺨은 달아오르고 눈은 붉게 물들인 채 젖은 입술을 질근 깨문 여자가 작게 웃었다. 그에게는 처음 보인 미소였다. 태욱은 심장 쪽이 뻐근해졌다. 우습게도 허리 아래에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 느껴야 했다.
“……가져 보고 싶어요.”
술에 취해, 흔들리는 눈빛으로, 순간의 감정처럼 서영이 고백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를 붙잡았다.
“아뇨. 그러니까…… 좋아했어서, 아니, 좋아해요. 결혼하신단 소리 듣자마자…… 후회했어요. 이런 말도 못 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니, 방금 그 소리를 들었어요. 파혼하신다고. 그러면…… 그런 거면, 고백은 할 수 있으니까…….”
“…….”
두서없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걸 알아챈 서영이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이렇게 선했던가. 선하다는 것은 또 어떻게 정의 내리 수 있는가. 그 기준을 잡는 것 또한 그가 아닌가. 태욱은 생각이 뒤엉켰다. 뒤늦게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그래서 감춰 둔 본심을 입 밖에 꺼낸 걸지도 모른다.
“나랑 자고 싶다는 소린가, 윤서영 대리?”
의도는 단순했다. 놀려 보고 싶기도 하고, 장난을 걸어 반응을 보고도 싶었다. 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가 부하 직원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란 건 안다. 하지만 그런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당황한 서영의 얼굴이 곧 하얗게 질리더니 뒤늦게 결심하듯 대답한다.
“……네. ……팀장님만 괜찮으시면요.”
술의 힘은 대단했다.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여자에게 잠자리를 운운하게 만들었으니. 뭐, 엄격히 말하자면 그가 부추긴 격이었다. 그 말을 뱉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그녀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 되었다.
무례한 것은 누구인가. 태욱은 피우던 담배를 아래에 던지고 구두로 비벼 껐다. 그러곤 늘 그래 왔듯 바르게 담배꽁초를 주워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의 행동을 초조한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는 서영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태욱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았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돌아서 회식 장소로 되돌아갔다. 서영을 등진 그의 입가엔 어쩐지 안도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