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73화 (73/75)
  • 22.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 (3)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태욱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선은 얼른 예쁜 조카 보게 해 달라고 말하며 그의 얼굴이 붉어지도록 만들었다.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하나뿐인 친구의 와이프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둘도 없는 지인이라면 그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맞았다.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트 안에 들어가 계셔야 해요. 러브가 나고, 내가 러브다. 사랑 이즈 전부. 오케이?

    “오……케이.”

    태욱은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얼른 대답했다. 안심이 되었는지 지선은 그제야 통화를 종료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솔직히 태욱도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청혼. 그 단어를 생각하고, 머리를 굴리다가 지선에게까지 코칭을 받게 된 건 모두 훈재 녀석의 프러포즈 에피소드를 전해 들은 때문이었다. 선수를 뺏겼다고 두고두고 억울해하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박훈재가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욱이었기에 지선의 아이디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아…….”

    그래도 하트 촛불에 LED 플랜카드는 너무하지 않나. 명색이 건설회사 이사인데. 태욱은 자신이 꾸며 놓고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손발은 이미 벚꽃 잎으로 ‘LOVE’를 만들 때부터 오그라든 지 오래였다.

    사실 이 모든 걸 주문한 것도 그였다. 남들처럼 평범한 프러포즈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청혼하는지 지선에게 먼저 물었다. 그렇다고 또 너무 흔한 건 싫었다. 좋은 작전이 없겠냐고 묻자 지선은 탁월한 아이디어를 내어 그들의 프러포즈를 이중 비밀 작전으로 진행하게 만들었다.

    서영이 먼저 청혼하겠다고 마음먹도록 분위기를 만든 후, 그 현장에 태욱이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서영이 두 배로 감동할 수 있을 것이라 지선은 예상했다. 태욱도 그 편이 더 극적이고, 영화 같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꽃다발과 청혼 반지를 든 채 하트 촛불이 켜진 꽃길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이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태욱은 서영에게 건넬 말을 연습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업무 때문에 수없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떨지 않았던 그이건만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뛰었다. 그 순간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비서 주한이었다.

    “접니다. 보고하세요.”

    ― 네. 지금 택시 타고 계획 장소로 가시는 중입니다.

    “주변은? 이상한 낌새는 없습니까?”

    ― 네, 별다른 특이점은 없습니다. 그리고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손철민 이사 쪽에서 건양 지 회장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업체까지 동원한 걸로 봐선 큰 소란이 예상됩니다.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었나. 태욱은 그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예상되는 수순이었다. 결국 철민의 목적은 태욱이 아니라 필성의 자리였으니까. 그곳을 제 발로 걷어찬 태욱의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수했을 것이고, 마지막 기회를 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철민이 안타까우면서도 태욱은 그를 온전한 제 편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럼, 도착 5분 전에 문자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전화를 끊고 태욱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필성이 붙인 인물인데 어째서 주한을 믿고 서영의 경호까지 맡기게 된 것일까.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도 또렷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필성에게로 전달되는 태욱에 관한 보고가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급기야 창수가 서영의 어머니를 만났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전달해 온 사람도 다름 아닌 주한이었다. 그때 태욱이 곧장 이영희 여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반대의 뜻을 듣긴 했지만 주한 덕분에 너무 늦지 않게 누구의 죄든 모든 것을 사죄하고 자신이 서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태욱은 서영을 완전히 보내 주고 다시 붙잡을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되돌아본다.

    [도착 5분 전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문자가 도착했다. 태욱은 다시 긴장한 태도로 꽃다발을 들고 하트 촛불 안에 섰다. 멀리서부터 계단을 오르는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소리가 여러 개였다. 그 순간, 현관 비밀번호가 눌리고 문이 열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트로 꽃길을 만들…… 태, 욱아?”

    문을 연 사람은 은림이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던 서영이 양손에 잔뜩 들고 있던 포장 봉투를 떨어뜨렸다. 태욱의 얼굴은 곧장 흙빛으로 변했다.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상황이었다. 지선도 언급하지 않았고, 주한 역시 보고가 없었다.

    “태욱아, 뭐 해? 꽃밭에 서서. 푸하하.”

    상황이 어찌 됐든 웃긴 건 웃겼다. 은림이 일단 웃어 버렸다.

    “그만 웃죠?”

    태욱이 날카롭게 노려봐도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미안. 미안해, 태욱아. 네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를 이렇게 망칠 의도는 없었다. 하하하. 나는 서영 씨가 도와 달라고 해서 빌라까지 달려온 죄밖에 없어. 근데, 하하하. 천하의 강태욱도 프러포즈는 오글거려야 제맛인 거지?”

    “……관, 관장님.”

    이 상황을 미안해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태욱의 표정을 보고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영은 그가 지선과 짠 후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절대 은림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프러포즈는 원래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인데. 서영은 또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뭐 하고 섰어? 얼른 이리 와.”

    태욱이 꽃다발을 바닥에 던져 놓고 서영부터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고모는 상황 파악 됐으면 나가 주시죠.”

    태욱은 야멸차게 등을 밀며 은림을 쫓아냈다. 닫힌 문 너머에서 여전히 쩌렁쩌렁한 은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야, 나는 증인 할게. 너 프러포즈하는 거 너무 보고 싶다. 이왕이면 영상 촬영도 하면 좋잖아. 내가 찍어 줄게. 어? 태욱아, 문 좀 열어 봐.”

    진짜 고모만 아니면. 태욱은 깊은 화를 한숨으로 쏟아 내며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영 또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꽃밭은 좀 심하지 않아요?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그 뒷감당을 하는 건 그녀도 힘이 들었으니까.

    “무력을 사용해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며 태욱이 주한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주한에게서 여러 번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남겨졌지만 긴장한 태욱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당할 그가 아니었다.

    “야, 강태욱! 너, 진짜 이럴 거지!”

    빌라 아래에서 은림이 큰 소리로 5층을 향해 소리쳤다. 그 옆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은림의 입을 막고 그녀를 둘러멨다.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던 서영은 놀라서 입을 막았다. 은림은 그저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것뿐인데 어쩐지 방해꾼이 되어 쫓겨나는 것 같았다.

    “진짜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해요?”

    은림을 짐짝처럼 태운 주한의 차가 떠나자 서영이 태욱을 바라봤다.

    “너는?”

    이제야 태욱은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서영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아…… 이사님. 그게…….”

    왜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서영은 태욱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직 방 안엔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청혼 반지 케이스는 그의 바지 주머니를 불뚝 솟아오르게 만들며 제 존재감을 당당하게 뽐냈다.

    “내가 언제까지 이사님이야?”

    그건 왜 갑자기 걸고넘어지는지. 서영이 조용히 눈을 맞추고 태욱을 노려봤다.

    “이제야 좀 보네.”

    태욱이 다행이라며 웃었다. 어쩐지 둘 다 청혼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고 마치 첫 키스를 나누는 연인처럼 떨렸다. 그가 이런 준비를 하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서영은 감사했다. 지선의 부추김을 받아 얼떨결에 청혼할 생각을 했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마음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와 연애만 할 것인가. 그것도 싫었다. 서영은 태욱을 닮은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족을 이루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의 끝에는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윤서영.”

    태욱이 생각에 빠진 서영의 뺨을 붙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나랑 결혼할래요?”

    폼은 태욱이 잡고 말은 서영에게서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태욱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훈재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맨입으로?”

    “아.”

    서영이 뒤늦게 자신이 사 온 청혼 반지를 가지러 가려고 하자 태욱이 그녀를 더 꽉 붙잡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심술부리는 건가. 서영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놔줘요.”

    “반지는 나도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냐고 물으려니 태욱이 서영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팔을 좀 더 당겼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니, 아예 서영이 태욱에게 매달린 꼴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알게 된 서영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잠깐 부딪쳤다 떨어지던 입술이 어김없이 거칠게 삼켜졌다. 오랜만의 키스이기도 했고, 청혼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또 달랐다.

    “으앗. 잠깐, 잠깐만요.”

    그 순간 태욱이 서영을 안아 올렸다. 곧장 이럴 수 있나. 그가 하려고 했던 말도 듣지 못했는데. 서영은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그의 태도가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태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 달려들었다. 솔직히 그의 몸이 그리웠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둘둘 만 이불을 같이 덮어쓴 채 두 사람은 베란다 앞에 앉았다. 어느새 동이 트기 직전인 새벽이 찾아왔고, 창밖은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 이후부터 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기 집은 언제 지어요?”

    서영이 궁금해 물었다.

    “언제든지 내가 짓고 싶으면.”

    태욱이 또 얄밉게 대답했다.

    “집 다 지으면 나랑 같이 살래?”

    쿵.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심장이 반응해 버렸다. 서영은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 좀 더 태욱의 품에 기댔다. 그리고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싫어요.”

    “……뭐?”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짓기 전에 살 거야.”

    하. 이렇게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 이거지? 태욱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밤새 괴롭혔으면서도 그는 성에 차지 않았다. 서영이 부은 입술이 아프다며 그를 밀어 내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근데 나 진짜 마음에 걸리는 거 있어요.”

    서영이 가까스로 그에게서 빠져나와 말했다.

    “뭔데?”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를 품에 가두고 태욱이 되물었다.

    “그때 메모에 뭐라고 썼어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뭐였을 것 같아?”

    그가 묻자 서영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사랑해?”

    “드디어 그 말을 들어 보는군.”

    서영이 노려보자 태욱이 웃어 버렸다.

    “고마워……. 그렇게 썼어. 그 말이 하고 싶었거든. 너를 만나서 나란 놈이 웃을 수 있고, 편히 잘 수 있고, 조금이라도 여유란 걸 알게 됐으니까. 또 뭐가 문제인지도 깨달았고. 사랑이란 게 뭔지도 알았고, 그리고 또 미치도록 행복했어. 그래서 아주 고마웠어.”

    그의 고백에 저절로 눈물이 차오르고 말았다. 서영이 울음을 머금은 채 웃었다.

    “앞으로 더 행복할 거예요.”

    “그래. 그럴 거야.”

    태욱이 다시 서영의 뺨을 끌어와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이번엔 서영도 피하지 않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밖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생겨 버렸으니까. 당연한 수순처럼 태욱이 서영을 번쩍 들어 올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열어 둔 문으로 봄과 여름 사이의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이미 벚꽃은 졌다. 이제 뜨거운 여름이 시작된다는 걸 예고하는 것이겠지. 그것이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운 날이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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