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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원하는 나에게-72화 (72/75)
  • 22.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 (2)

    “밥은? 고기가 왜 없어? 나 안 보고 싶어?”

    태욱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욱은 핸드폰을 든 채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 몰골이 상해 있어 이젠 정신을 좀 차린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 여전했다.

    “누가 있으면 어때? ……그래. 마음대로 시켜도 돼. 그러라고 붙인 거야. 근데 너무 붙어 있진 말고.”

    은림은 아예 포기하며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런 사적인 통화는 나가서 받으라고 엄포를 놓아야 했지만 지금 있는 장소가 태욱의 집무실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 질투야. 지금 맘 같아선 내 옆에 끼고서 일…….”

    “야야, 그만! 저기, 서영 씨! 그만 좀 끊어 주세요!”

    결국 훈재가 항복하듯 태욱의 핸드폰 쪽으로 소리쳤다. 그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던 서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태욱은 황당한 얼굴로 맞은편의 친구를 노려봤다.

    “보면 어쩔 건데? 나도 쌓인 거 많으니까 이것부터 처리하고 얘기하자.”

    그렇게 나온다면 태욱도 할 말은 없었다. 작게 웃음을 흘린 그는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들에 집중했다. 지금 벌어진 상황에서 제일 머리가 아픈 은림이 이마를 짚고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아 있었다. 태욱이 닭 털을 날려도 그녀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뭘 고민해요?”

    태욱이 간단하게 말하며 은림을 바라봤다.

    “남 일이라 이거지?”

    은림이 태욱을 향해 날카롭게 눈을 떴다. 태욱의 입가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았다. 은림은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원하던 자리 아닌가. 평생 품어 왔던 복수심을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보상받으려던 녀석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웃고 있다니.

    “내가 볼 땐 고모도 아트센터 해낸 거 보면 아예 감이 없진 않아요. 나도 옆에 있을 거고. 박 변도 잘 도와줄 겁니다. 정 안 되겠으면 전문 CEO를 쓰는 것도 방법일 거예요.”

    필성이 남긴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한동안 유신건설 사내 채팅방이 떠들썩했다. 태욱도, 철민도 아닌 은림이라니. 후계자의 후보군에도 없던 인물이었다. 태욱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조부의 마지막 선택도 그는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다.

    한때는 그 양반을 이겨 보려 했고, 이해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모두 의미 없는 짓들이었다. 복수라는 핑계에 감춰진 욕심일 뿐이었고, 그걸 필성 또한 모르지 않았으니 그를 이용했을 것이다.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너한테 넘길 수도 있다는 건 왜 고려 안 하는 건데?”

    은림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이 큰 회사를 떠맡는 것도 우스웠고, 그러고 싶다는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필성에게서 유산을 받는 것조차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다. 이미 그녀의 몫으로 아트센터와 리조트를 받았다. 그 이상을 원할 만큼 필성과 그녀의 관계가 돈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 관장님 생각에 나도 동의해. 현재 상황에서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은 너야. 직원들도 그걸 원하고. 죽어도 회장이 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건데?”

    훈재 역시 태욱의 지금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필성까지 떠나 버렸으니 허무함이 드는 것은 이해하는 바이지만 잠조차 반납하고 몸 바쳐 지켜 온 유신을 완벽하게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 손으로 놓아 버리는 건 그가 아는 강태욱답지가 않았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철민과 피 터지는 싸움을 한 것 아닌가. 마지막까지 철민에게 패배감을 안겨 주며 물러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 때문이었는지. 언제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훈재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질 이유가 없어졌어.”

    태욱은 짧게 답했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두렵기도 하고. 그 자리에 앉는 순간, 많은 걸 포기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사는 인생이 얼마나 외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아. 내가 가진 게 얼마나 있다고. 그것마저 포기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속마음을 다 내비친 태욱의 진지한 고백에 두 사람은 더 이상 강요할 수가 없었다.

    “행복해지고 싶어.”

    훈재는 친구의 말을 듣자 울컥하고 말았다. 그건 은림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실 안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만 놓여 있는 태욱다워 은림의 입가엔 편안한 웃음이 번졌다.

    행복해지고 싶다니. 태욱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새언니 정애가 늘 바라던 것이었다. 태욱이가 행복이란 감정을 알았다면 좋겠다고. 은림은 이제 오빠 인주의 꿈을 꿔도 전처럼 막막할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그녀가 지금보다 더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해도 아버지의 회사를 잘 지켜 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게 그녀가 필성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였기 때문이다.

    ○ ◆ ○

    “……오리야. 까꿍! 이모, 해 봐.”

    “자기, 바라는 게 많다. 아직 엄마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응접 트레이에 서영이 사 온 케이크와 음료 세 잔을 담아 내오던 지선이 참지 못하는 성격답게 가만히 넘어가지 못하고 한 소리를 했다. 서영은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서 트레이를 건네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회사는 어떻게 할 거야?”

    지선이 묻자 서영은 얼른 대답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요.”

    “유신으로 갈 줄 알았더니?”

    간다고 해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지선이 물었다.

    “그 정도로 의리 없진 않아요.”

    서영은 미안한 웃음을 흘리다 지선이 가져온 커피 잔을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선에게서 대답이 곧장 날아왔다.

    “저기 잘생긴 비서님도 한 잔 드려야 할 거 아니야?”

    “아…….”

    서영이 괜찮다고 했지만 주한은 기어이 지선의 집 안까지 들어와 그녀를 경호했다. 그렇다고 편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을 지키듯 현관에 놓인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것도 지선이 억지를 부려 가능한 일이었다. 비서보다 보디가드가 더 잘 어울리는 주한을 보며 지선은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곧 오리를 보며 제정신을 차렸다.

    “이렇게까지 과보호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주한의 몫으로 내려 온 커피를 그의 손에 쥐여 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지선은 여전히 자신의 아들에게 빠져 있는 서영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있겠죠. 근데, 안 물었어요.”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태욱이 이러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을 듣게 된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서영이 바라는 건 그저 그가 없는 지옥 같은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참, 거기도 쉽지 않은 인생이야.”

    서영은 공감했지만 남 얘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태욱이 처한 삶이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그와 헤어질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서영은 이미 뼈아프게 경험하고 깨달았다. 그런 태욱의 삶까지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러자 모든 게 편안해졌다.

    “그래도 좀 괘씸한 건 있잖아. 정작 본인은 감쪽같이 사라져서 사람 마음고생 시키고. 내가 그때 오리 아빠 얼굴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니다. 잘 돌아왔으니 됐지, 뭐.”

    훈재가 어땠을지 서영도 그려졌다. 그녀 또한 은림과 훈재에게 제대로 상황을 보고하지 않고 그와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당시엔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의 행방을 알리면 태욱이 곧장 경찰에 붙잡혀 갈 것만 같았다. 서영은 그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했다.

    “저도 공범이에요.”

    “그래. 아주 눈물 나는 사랑이야.”

    지선의 농담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웃는 걸 아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오리도 같이 웃었다. 서영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오리를 내려다봤다. ‘수호’라는 진짜 이름이 생기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오리란 태명이 더 좋았다. 옆에 선 이가 태욱인지도 모른 채 태명의 뜻을 설명해 주던 예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예뻐?”

    “네. 완전 천사 같아요.”

    서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자기도 청혼해.”

    “네?”

    지선의 갑작스러운 말에 서영은 정신을 차리듯 시선을 들었다.

    “뭘 놀래? 결혼 안 할 거야? 이렇게까지 전 국민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됐는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영화보다 더한 현실이 되어 온라인을 달궜다. 태욱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 그리고 두 사람에겐 잘못이 없다는 가슴 아픈 사연까지 더해지며 곤두박질치던 유신건설의 주가가 조금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신 거예요?”

    서영이 멀찍이 있는 주한의 눈치까지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연 결혼 발표를 한 지선은 여태껏 프러포즈에 관한 이야기만은 그녀에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내가 소주 두 병 먹이고 자는 그이 손에 반지 끼워 버렸어.”

    “네?”

    지선은 그날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철저한 작전이었다? 그 인간, 아니, 오리 아버지가 또 얼마나 빈틈없는 계획주의자인 줄 알아? 나 모르게 반지 맞추고 청혼 낭독서까지 작성해 놨더라고. 근데 나도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내가 먼저 해 버리고 싶은 거야. 두고두고 우려먹으려고. 그래서 그날 바로 반지 맞춰서 만나자고 했지.”

    남의 프러포즈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 몰랐다. 서영은 갑자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가 청혼하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술 먹자니까 싫대. 내일 아주 맑은 정신으로 할 일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나 혼자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지. 회사 부장 얘기를 하면서 눈물도 조금 보이고.”

    지선이 연기였다는 것처럼 찡긋 눈짓을 보였다.

    “그러니까 옆에 앉아서 위로를 해 주는 거야. 내가 오늘은 같이 취해 주면 안 되냐고 했지. 망설이더라. 그래서 이때다 싶어 볼에 뽀뽀를 해 줬지. 내가 밖에선 절대 애정 표현을 안 했거든. 그랬더니 정신을 못 차리면서 술을 마시는데 두 병에 게임 끝. 그 틈을 타서 반지 끼우고 택시에 태워서 우리 집으로 끌고 갔지. 새벽에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손에 끼워져 있는 게 뭐냐고 묻는 거야.”

    서영은 당황해하는 훈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청혼 반지라고 했어.”

    “그게…… 끝이에요?”

    “그럼 무슨 말을 더 해?”

    “아…….”

    “자기도 먼저 해 버려. 나한테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지선이 주한의 눈치를 살피며 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계획을 듣고 있으니 서영은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게 먹힐 남자가 아닐 것 같으면서도 또 한 번쯤은 그에게 놀랄 만한 이벤트를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다.

    “알겠지? 그럼, 일단 화장실부터 가.”

    지선의 지령을 받은 서영이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핸드폰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넣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한을 따돌린 지선은 서영을 얼른 집 밖으로 내보내며 파이팅을 외쳤다. 서영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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