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71화 (71/75)
  • 22.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 (1)

    필성의 장례는 조용하게 치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지른 죄가 그의 죽음마저 초라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이럴 줄 그는 알았을까. 태욱은 상주의 역할을 하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인국은 끝내 본인의 의사로 가석방 신청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자리는 아들 철민이 대신했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마당에 한때 맏며느리였다고 미연이 얼굴을 내비칠 이유도 없었다. 정애 역시 태욱이 올 필요가 없다고 나서서 말릴 일이었다. 결국 자식들 중 은림만이 온전하게 아버지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태욱이 나타난 순간부터 장례식장은 졸지에 삼엄한 경비를 받아야 했다. 어쨌든 그는 필성이 돌연사한 일의 유일한 증인이자 증거인 셈이니 경찰에서도 사실 확인을 위해 그를 데려가야만 했다. 철민이 만들어 놓은 지뢰에 대중들의 목소리, 거기다 한동안 자취를 감춘 행동까지.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어느 쪽으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인네가 그렇게 꼴 보기 싫었나 보지.”

    핏발 선 눈으로 철민이 시비를 걸었다.

    “누가 보면 죽을 때까지 기다린 줄 알겠어?”

    태욱은 대답 없이 철민을 바라봤다. 피로한 눈과 떨리는 손을 보니 아무래도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유린의 과거사에 관한 서류를 보내면서 미연과 관계된 이들의 탈세 증거를 동봉했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상대의 목을 죄고 있는 손을 놓을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

    그렇다면 누가 이긴 걸까. 태욱은 이 승부가 모두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낸 증거물을 확인한 철민이 반격을 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어떤 행동이라도 취했을 것이라 여겼다. 그가 아는 손철민은 분명 그랬다. 한 끝을 내다보지 못해 중요한 순간, 밥그릇을 놓치고 마는 영원한 2인자.

    건양의 지 회장은 장례식장에 도착해 철민이 아닌 태욱을 비밀리에 만났다. 철민을 바라보며 태욱은 동정의 눈빛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리도 멍청한가. 그가 회사를 비운 시간이 얼마인데. 그가 가져가라고 내어 준 회장 자리를 자신의 손으로 내쳐 버리는 인간이라면 애초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네가 죽였지?”

    끝내 철민은 태욱의 멱살을 잡았다.

    “…….”

    “뭐야? 너희들, 왜 이래!”

    휴게실에서 나오던 은림이 재빨리 다가가 두 사람을 말렸다. 태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은림은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누구 하나 제대로 자란 인간이 없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돈이 가져다준 축복 따윈 끝없는 욕심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태욱아, 진실을 말해 봐. 그날 어떻게 된 건지.”

    이젠 바로잡아야 했다. 그게 그녀 혼자만의 노력일지라도. 필성이 저지른 일들이 그의 죽음으로 정당화될 순 없었다. 태욱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를 죄로 대갚음했다고 편을 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날의 진실이 철민의 추측대로라면 태욱 또한 그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만 이 지옥 같은 전쟁을 제대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태욱아.”

    은림이 한 번 더 그를 불렀지만 태욱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으론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태욱이 더 아픈 손가락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은림은 답답했다. 이럴수록 그에게 더 불리하다는 걸 모를까.

    “거봐, 이렇게 말 못 하는 거 보면 몰라요?”

    철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도 이제야 태욱이 범인이란 걸 실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입을 다물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쓰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렇게 확신하며 돌아서는 순간, 철민은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창수를 발견했다. 예의를 갖춰 인사한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세 사람 앞에 서자 철민은 창수의 모든 것이 거슬렸다.

    “……늦었습니다.”

    창수는 세 사람이 모이는 날을 기다린 것 같았다. 조용히 가방 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은림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전에 철민이 서류를 빼앗아 가 확인했다.

    “뒤늦게…… 발견한 유서입니다.”

    하하하. 철민이 폭소를 터트리자 장례식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은림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고, 태욱은 그저 멍하니 벽 쪽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손태욱 이사님이 쓰러지신 회장님을 발견하고 별채로 구급차를 부른 건 119에 신고가 접수된 시간과 CCTV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습니다. 평소 드시고 계시던 그 약물이 뇌출혈의 원인이었고, 서랍장에서 약통 또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회장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걸로 추측됩니다. ……죄송합니다.”

    “이 새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흥분한 철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들어 창수에게 던졌다.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맥주병이 깨지고, 미처 피하지 못한 창수의 얼굴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다. 놀란 경호원들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와 우선 철민의 몸부터 붙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강태욱이 이러라고 시켰어? 너희들 짜고 이러는 거 내가 다 알아! 돈에 미친 새끼들. 그 노인네가 스스로 죽었다고? 뭐라는 거야, 지금. 길 가던 사람도 다 웃어. 얼마나 독한 인간인데, 자기 목숨을…….”

    창수에게 향해 있던 철민의 시선이 태욱에게로 옮겨 갔다.

    “그래서 숨었어? 이렇게 완벽한 알리바이 만들어서 뒤통수치려고? 와……. 너도 진짜 대단한 새끼다. 그래, 진실은 죽은 사람만 알겠지. 복수가 이렇게 무서운 건 줄 이제 알았네. 내가 졌어, 강태욱.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봐. 얼마나 대단하게 하는지 한번 보자.”

    철민은 경호원들의 제지를 제 손으로 뿌리치고 스스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은림은 구급상자를 가져와 다친 창수를 살폈고, 그는 치료를 마친 뒤 은림과 태욱에게 또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유신건설의 부실시공으로 인해 터널 사고가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자료의 맨 밑에는 필성과 창수의 이름이 책임자로 적혀 있었다.

    “회장님은 떠나셨으니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창수는 이미 결말을 예상한 듯 덤덤하게 고했다. 은림은 창수에게서 시선을 돌렸고, 태욱의 눈동자는 여전히 창수에게 꽂혀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기나긴 상처와 억울함, 울분과 회한들이 쌓여 있는 그 터널 너머엔 시시함만이 남아 있었다. 태욱은 고개를 돌려 빛바랜 서류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 ○

    물건들이 처박히듯 상자 안에 두서없이 담겼다. 철민은 완벽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며칠째 미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완전한 그의 편일까.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나고 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눈앞에 명패가 보이자 참았던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잠긴 서랍을 열어 서류들을 꺼내던 그는 그것들을 상자 안에 내동댕이치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류는 모두 태욱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만큼 관심을 가질까. 스스로의 미련한 자격지심에 신물이 나 그는 속까지 역해지는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원샷하고 고개를 들자 집무실 정면 티브이 화면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죄수복을 입은 지유린이 포승줄에 손이 묶인 채 엄청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죄송합니다.’만 연발했다. 철민은 코미디보다도 더 재미있는 상황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지우라고 종용했으나 유린은 말을 듣지 않고 잠적했다. 그리고 며칠 후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었다. 음주 뺑소니 사망 사고와 더불어 운전자를 바꿔치기한 범인 도피 죄까지 적용되어 실형이 유력해 보였다. 철민은 경찰에게 양팔이 결박된 채 포토 라인에 서 있는 유린의 아랫배로 눈을 내리다 아예 티브이 화면을 꺼 버렸다.

    “걱정 마요.”

    철민이 외국 지사로 발령받으며 비워 뒀던 이사실 입구로 누군가 들어섰다.

    “애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태욱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철민은 녀석을 노려봤다. 그가 건넨 말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 이해한 건 몸속으로 점점 퍼져 나가고 있는 알코올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게 누굴 병신으로 아나. 그가 몇 번이고 친자 검사를 했고, 확인서까지 받아 보았다. 거짓말일 리가 없었다.

    “형은…… 아직까지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너, 이 새끼…….”

    철민이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믿지 않았지만 아니라 부정하지도 못했다. 돌이켜 보면 결국 모든 게 태욱의 말대로 되었다. 자신은 늘 스스로가 만든 함정에 빠졌고, 녀석의 그늘 아래에서 어쭙잖은 복수심만 키웠다. 뭐가 달랐던 걸까. 무엇이 그를 평생 동안 패배감에 휩싸이도록 만든 것인가.

    “날 이기려 했던 거. 그 목표가 잘못된 겁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태욱은 천천히 걸어와 철민의 앞에 섰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철민의 책상 위로 떨어뜨렸다. 철민은 얼른 그것을 집어 들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게…….”

    “지유린 사건 증거물. 지 회장이 나한테 보낸 거야. 형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한자리 차지하고 앉은 양반들, 얼마나 비겁하고 잔인한지 형도 겪어 봤으니 알 거 아닌가? 있던 죄도 없애고, 없던 죄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인데 이런 가짜 확인서쯤은 손쉽게 만들어 내지 않겠어? 이건 형도 잘하는 짓이잖아.”

    태욱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그래, 애야 그렇다 치고. 그럼…… 너랑 나랑 저울질하려고 자기 딸을 감방에 처넣었다는 소리야? 그걸 나한테 믿으라는 거야?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그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자식보다도,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게 생기면…… 무서운 괴물로 변하는 거야. 어차피 사고만 치는 막내딸, 저렇게 해서라도 제정신 차리도록 만드는 게 그 집안 룰이라면 할 말 없지. 이해하려고 하지 마요.”

    책상에 놓인 명패를 쓸어 내며 말하던 태욱이 행동을 멈추고 철민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것부터가……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누가 이긴 것인가. 애초에 그 물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태욱은 깨달았다. 필성이 몰아넣은 싸움터 안에서 미친 말처럼 자라나면서 그는 제정신으로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평범하게 웃을 줄 몰랐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았던 걸까. 자신의 뿌리까지 내려놓고 선택한 삶이 그때는 최선이라는 것을. 끝내 스스로를 내려놓은 죽음까지 받아들이진 못해도 태욱은 이제 아버지를 꿈에서 만나도 예전처럼 원망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 잘못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내 자신에게 주는 아주 가혹한 벌이 아닐까. 태욱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태욱이 사무실을 빠져나간 뒤 철민은 어둠이 찾아온 창가 앞에 섰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위스키를 한 번에 입 속으로 털어 넣고선 핸드폰을 꺼냈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상대방에게서 대답이 날아왔다.

    “진행시켜.”

    그는 간단하게 말하고 다시 창을 바라봤다. 노을이 내린 하늘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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