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9화 (69/75)
  • 21. 아프면서 행복했어 (4)

    “언제까지 쳐다볼 거야?”

    랜턴 불빛 아래에서 태욱이 컵라면을 두 개째 먹었다. 그 모습을 서영이 가만히 지켜봤다. 식탁이 없어 맨바닥에 빈 상자를 놓고 식탁 대용으로 썼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둘은 붙어 앉았다.

    서영은 몸을 접고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고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먹자는 말에도 고개만 저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태욱이 갖은 사과를 했지만 그의 차가웠던 태도가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인지 눈가가 여전히 젖어 있었다.

    태욱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라면을 먹는 거였다. 서영이 그것만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다시 울어 버릴 것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인지 안다. 얼굴이 상해 있겠지. 며칠째 수염을 깎지 않았고, 입고 있는 옷마저 평소의 태욱과는 거리가 멀어 있었으니. 그가 보기에도 지금 자신은 엉망이었다.

    “씻는 건…… 어떻게 해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서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물만 다시 나오게 해 달라고 했어. 뭐, 씻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만.”

    태욱이 멋쩍다는 듯 자신의 수염을 한 손으로 쓸었다. 늘 각 잡힌 슈트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던 남자였다. 살던 오피스텔 역시 먼지 한 톨조차 없이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던 걸 분명 기억했다. 서영은 정말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녀가 웃자 태욱은 이유도 모르면서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왜 웃어요?”

    “네가 웃으니까.”

    또 강아지 같은 웃음. 서영은 가슴이 찌르르, 타 버리고 만다. 언제나 설레던 웃음이었는데 이젠 통증처럼 아픈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 묻고 싶은 말이 백 가지도 넘었지만 그걸 묻는다고 해서 달라질까 싶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태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안 물어?”

    “…….”

    “사람들이 떠드는 일.”

    덤덤하게 다 먹은 컵라면 그릇을 치우며 태욱은 남의 일처럼 말했다. 필성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태욱이라고 해도 서영은 달라질 게 없었다. 만약 그가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 또한 그녀가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들이라 여겼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가 사라진 이후부터 완전하게 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진실이 뭐든, 난 당신 편이에요.”

    “…….”

    “난 당신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요.”

    서영 또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태도에 태욱은 웃음이 났다. 이렇게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무엇을 더 증명해야 할까. 그녀의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질투심에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못살게 군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일 당장 경찰서 가도 괜찮겠어?”

    태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놀란 서영은 따라 몸을 일으켰다. 다 괜찮다,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면서 당장이라도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겠다는 그의 행동에 덜컥 겁부터 났다. 서영은 뒤돌아서서 봉투에 쓰레기를 넣고 있는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태욱은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 아직은 안 돼요.”

    장난이 지나쳤다. 태욱은 곧장 반성했다. 윤서영을 놀리는 게 이젠 그만의 자연스러운 표현 방식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얼른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안았다. 서로를 꽉 붙잡은 채 심장 소리를 들었다. 키스를 퍼붓고 끝도 없이 몸을 탐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대로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족되는 듯한 충만한 감정도 들었다.

    “내가 널 두고 어디를 가.”

    태욱이 안심할 수 있도록 확답을 내놓았다.

    “……진짜죠?”

    서영은 믿을 수 없어 또 한 번 물었다.

    “응. 진짜야.”

    태욱은 번쩍 그녀를 안아 침대 쪽으로 향했다. 서영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이러는 게 당연한 수순임에도 매번 부끄럽고,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태욱은 발개진 서영의 볼을 바라보며 얄밉게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잠깐 누워서 쉬라고.”

    그가 침대에 서영을 내려놓았다. 하여튼 아무렇지 않게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놓는 건 여전했다. 괘씸해 노려보자 태욱이 짧게 입맞춤을 해 버린다. 서영은 또 스르르 마음이 녹고 말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

    “네?”

    안심한 순간,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서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가란다고 가진 않을 거고, 나도 보내기 싫으니까. 필요한 것들 좀 사 와야 할 거 아니야. 요 밑에 마트는 빨리 문 닫아서 지금 가야…….”

    서영은 태욱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와락 그를 안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

    “당신만 있으면 돼.”

    서영은 태욱의 옷을 꽉 붙잡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또 이렇게 그녀에게 불안감과 상처를 남겨 버린 걸까. 태욱은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더 꽉 안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은 꼭 붙어 잠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꿈속으로 찾아오지 않는 단잠이었다. 서영이 태욱의 품으로 파고들수록 그의 표정이 따듯하게 밝아졌다. 서로 주고받는 체온이 서공간의 서늘한 공기마저 잊게 만들었다.

    ○ ◆ ○

    세 번째 소원이요. 그게 뭐야? 당신 연극에 따라 주는 대신 소원 세 가지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그랬나. 그 마지막 소원 아직 안 썼어요. 그걸 지금 쓰겠다고? 네. 그래, 그렇게 아껴 둔 소원이 뭔데? 들어나 보자.

    “경주 두 장 주세요.”

    표를 끊고 값을 치른 서영이 뒤를 돌아봤다.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태욱이 사라졌을까 봐 초조한 시선으로 발을 동동거렸다. 태욱은 안심하라는 듯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느긋한 표정으로 서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터미널 안에 놓인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했지만 쉽진 않았다. 유신건설 사건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룬 코너였다. 필성의 현재 상태와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일. 터널 사고의 책임 시공사에서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벌였던 갖은 비리들로 인해 당시 사고의 유가족들이 다시 언론에 아픈 과거를 꺼내 올리는 모습까지. 뒤늦게 밝혀진 내막에 대중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그 손 회장을 쓰러지게 만든 인물로 떠오른 손태욱 이사의 비밀 연애에 얽힌 안타까운 사연이 커뮤니티에 떠돌면서 동정 여론도 형성되었다. 철민이 계획한 시나리오에 그 부분까지 있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유력한 가해자가 되어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가요. 출출한데 간식거리 좀 살까요?”

    어느새 다가온 서영이 그에게 팔짱을 꼈다. 머리 아픈 이야기는 신경도 쓰지 말라는 것처럼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턱 아래에서 이리저리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장난스럽게 웃는 여자가 심장을 뜨겁게 했다. 태욱은 무장 해제 된 것처럼 웃었다.

    “호두과자 먹을까?”

    그의 말에 서영이 잠깐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젠 두 사람만의 추억으로 남은 간식이었다. 여기는 터미널이고, 그건 안 팔아요. 짧게 대꾸한 서영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서는 태욱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이건 기차 탈 때 먹는 거 아닌가?”

    태욱이 봉지 안에 든 간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우리가 같이 있는데.”

    그러면서 달걀 하나를 태욱의 머리에 가져다 댄 뒤 탁, 하고 깼다. 불시에 날아든 공격에 그가 서늘한 눈빛을 쐈지만 서영은 쫄지 않고 웃었다. 이제 그녀에게 뭐가 무서울까 싶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연락도 없이 일주일 동안 사라지면 여자는 더 이상 겁이 나는 게 없다는 걸 그녀가 몸소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집에는…… 연락 안 드려도 돼?”

    “이해하실 거예요. 괜찮아요.”

    서영과 다르게 태욱은 이제 무서운 게 생겨 버렸다. 그가 만난 서영의 어머니는 생각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었고, 서영이 부모님의 어떤 부분을 닮았는지 깨닫게 되기도 했다.

    “걱정하실…….”

    말을 맺기도 전에 깐 달걀이 입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맛있죠?”

    어쩌면 해답은 이미 서영의 행동에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걱정한들 어쩌겠는가. 사랑만큼 용감하고 대책이 없으며,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것도 없었다.

    “……좀 짠데?”

    태욱이 서영의 손을 내려다보며 장난을 쳤다. 당황한 서영이 버스에 오르기 직전 손을 씻었다고 강조했다. 그럼, 다행이고. 태욱이 얄밉게 대답하자 서영은 또 속았다며 그의 입에 껍질을 까 놓은 달걀 두 개를 더 넣어 버렸다. 캑캑, 목이 막혀 하는 그를 보고는 사이다를 딴 후, 그녀 혼자 시원하게 마셨다.

    “아, 맛있다.”

    서영의 복수에 태욱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겼다 생각하고 경계를 풀고 있던 그녀의 볼에 갑자기 그의 입술이 날아들었다. 놀란 서영은 주변을 둘러본 뒤 운전하는 버스 기사의 눈치를 봤다. 이럴 거냐며 그를 노려봐도 태욱은 반성 없이 더 대범하게 이번엔 입술 쪽으로 고개를 내리려 했다. 서영이 가까스로 손을 뻗어 막자 그는 뻔뻔하게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태욱의 시선이 창가로 옮겨지자 서영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일 오전의 고속버스 안은 그와 그녀, 버스 기사 셋뿐이었다. 이런 행운이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그들은 충분히 즐길 필요가 있었다. 태욱은 창밖으로 지나치는 들판을 보는 게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나도 이런 게 해 보고 싶었어.”

    한참을 창밖만 보던 태욱이 입을 열었다.

    “……응?”

    서영도 같이 밖을 구경하다가 그를 돌아봤다.

    “남들처럼 연애하는 거.”

    연애가 뭐 별거냐, 우리가 그전에 했던 건 연애가 아닌 것이냐, 따져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어쩐지 지금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가 모든 걸 내려놓고 서영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시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욱은 그녀와 있는 지금만이라도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윤서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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