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8화 (68/75)
  • 21. 아프면서 행복했어 (3)

    택시에서 내린 후 서영은 빌라를 올려다봤다. 마음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공사 현장으로 변한 빌라에는 접근 금지라는 팻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 상태로 멈춰져 있었던 걸까. 그는 무엇을 꿈꾸며 여기에 집을 지으려 했던 걸까.

    서영이 이별을 고하고 나서의 일일 것이다. 저 혼자서 살겠다고 떠난 여자의 공간을 사들여서 제가 살 곳을 만들고자 했던 남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서영은 이제 태욱의 미련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헤어져도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걸 알려 줬냐고 그가 물었다. 이렇게 끝도 없는 걸. 그게 사랑이었다. 서영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 냈다. 들어갈 수 없도록 건물 주변을 가로막아 놓은 펜스를 넘어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늘 사람을 알아보고 켜지던 출입문 불이 작동하지 않았다. 어두운 사위만 그녀를 감쌌다. 무서웠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서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불을 밝혔다. 먼지와 쓰레기가 널려 있는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살던 5층에 다다르자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서영은 자신의 집 앞에 섰다. 아직 도어록이 달려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다. 숫자판 앞에서 고민 없이 옛날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암호가 풀리는 전자음이 이토록 절실한 안도감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문을 열자 조용한 적막이 그녀를 맞았다. 불빛 하나 없는 집 안이 그 안도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던 그녀의 어리석은 바람을 무참히 깨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대로 불도 없는 공간에 그가 숨어 있었다면 기뻤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은림이었다.

    ― 서영 씨, 어떻게 됐어요?

    “……여기도 아닌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은림은 목소리를 높였다.

    ― 그럼, 거기가 확실한가 보네. 누가 지방에서 태욱이를 봤다고 연락이 왔어요!

    “……진짜요?”

    가장 원하던 소식이었다. 서영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행이라고 외쳤다.

    ― 우린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인데, 서영 씨는 어떻게 할래요? 아님, 서울에서 기…….

    “저도 갈게요! 주소만 보내 주세요.”

    ― 그래요. 문자 남길게요.

    다급한 내용의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돌아서 문을 벗어나려던 서영은 스치듯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베란다 쪽에 남겨 두었던 그의 메모가 생각났다. 독한 마음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그걸 알아차리기 전에 얼른 그녀가 먼저 확인하고 가져가야 했다. 서영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 동작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거기에 붙어 있어야 할 메모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이후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영은 황급히 베란다 안으로 들어가 근처를 뒤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가 버린 걸까. 그가 전한 말이 무엇인지 보지도 못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나쁜 쪽으로만 추측하게 되었다.

    “……내가 떼서 버렸어.”

    환청인가. 서영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돌아서 집 안쪽을 바라보자 여전히 어두웠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베란다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귀신을 본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당신.”

    태욱이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쓴 채 후드 티를 입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범죄자라도 된 것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감춘 그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서영은 믿고 싶지 않았다.

    “똑똑하네, 윤서영.”

    마스크를 벗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여기 와 볼 생각을 하고.”

    태욱은 어제도 만난 것처럼 그녀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제 할 일을 했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작은 랜턴으로 집 안에 불을 밝힌 그는 익숙하게 마트 봉투를 열어 컵라면과 먹을거리를 펼쳐 놓았다. 캠핑용 냄비,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버너의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릴 때에서야 서영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어두워 확인하지 못했던 그녀의 침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버리듯 두고 간 이불까지. 정말 그는 그동안 여기서 생활했던 걸까. 서영은 목이 막히고 마음이 내려앉아 뛰듯이 태욱 앞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기, 아니, 내가…… 얼마나…… 사람이 왜 그래요?”

    그를 찾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복받친 감정이 소용돌이쳐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태욱은 서영을 잠시 내려다보다 조용히 그녀를 비껴갔다.

    “여기 있는 거 또 누가 알아?”

    그가 냉정하게 물었다.

    “아무도 몰라요. 나만 알아요.”

    서영은 얼른 대답했다.

    “그래. 그럼, 모른 척하고 가.”

    태욱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녀와는 제대로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무슨 마음인지 알았다. 이럴 줄 몰랐는가. 웃으며 그녀를 반기는 게 더 우스울 것이다. 서영은 눈치 없는 여자처럼 그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태욱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듯 다시 뒤돌아섰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태욱이 서늘하게 되물었다.

    “…….”

    서영이 대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대치하듯 서로를 마주했다. 각자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기에 둘 모두 한 걸음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너랑 숨바꼭질하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야.”

    “…….”

    “지금 상황이 어떤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

    “봤는데…… 여기 있는 걸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같이 있어요, 제발.”

    자존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태욱을 마음속에 품은 이후, 그녀는 늘 끌려다니는 입장이었고, 그건 헤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윤서영은 강태욱을 잊고 살 수 없다는 걸 체험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동생을 잃었던 예전보다 더 지옥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어.”

    진심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뱉은 말은 너무 아팠다. 서영은 입술을 깨물며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붙잡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몸을 피했다. 그녀를 마주하던 시선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가 그녀를 싸늘하게 외면한 채 감정 없이 말을 뱉었다.

    “……그래.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도, 너한테 하고 싶었던 복수라면 복수겠지. 다시 만난 것도 마찬가지야. 나처럼 아파 보길 바랐어. 근데…… 허무하더라. 이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말했잖아. 내 복수에 너 이용했다고. 원하는 대로 됐어. 그러니까…… 내 일에 상관하지 마.”

    야멸찼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살갗을 찢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마음인지 알면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영 역시 냉정해진 마음으로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알았어요. 나한텐 끈질기게 매달릴 자격조차 없다는 거 알아요.”

    스스로 정의 내린 말은 비수가 되어 그녀 자신의 가슴에 꽂혔다. 그럼에도 억울했다. 무엇이 이리도 서러운 것인지. 가슴속에 꽉꽉 들어찬 돌이 언제부턴가 내려가질 않았다. 다 풀어내고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할 말은 할게요. 안 그럼, 진짜…… 평생 당신한테 미련이 남을 테니까.”

    태욱에게선 반응이 없었지만 서영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헤어지자고 말한 거, 당신 어머니 때문 아니에요. 나는…… 착해야 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속은 거야.”

    “…….”

    “사실은 겁났어요. 당신이 모든 걸 걸고 나를 지키겠다고 했다는데…… 그게 무거웠고, 부담스러웠어요. 난 겁쟁이니까. 5년 동안 당신을 짝사랑했으면서도 진짜 당신을 몰랐던 거야. 자격이 없어서, 그래서 도망갔어요.”

    “…….”

    “근데,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마음도 당신이 사라지니까 다 우습게만 느껴졌어요. 나 때문인 것 같았어. 어이없겠지만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게 나라고 착각했어요.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침대 위에서 기듯이 기도하면서 용서를 빌었어. 당신한테 너무 미안했고, 당신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서영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꿋꿋이 고백했다.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든 건 줄 모르고 그랬어요.”

    “…….”

    “나만 생각해서 미안해요.”

    모두 쏟아 내고 나자 후련했다. 하지만 서영은 곧 이것 역시 태욱에겐 짐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로 인한 이기심까지 완전하게 버릴 수가 없었다. 뭐가 이래. 서영은 허무한 웃음이 났다.

    돌아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진절머리 나게 반복되는 도돌이표에 질릴 만도 했다. 그를 만나면 모든 게 동화처럼 풀릴 것이라 단정 지었던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며 뒤통수를 치는 것만 같았다.

    문을 닫고 나와 어두운 복도 가운데 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만 줄줄 흘러내렸다. 그를 찾았지만 결국 잃은 것과도 같았다. 모두 뒤늦게 깨달아 버린 그녀의 어리석음 때문이겠지. 또 한 번의 자책을 하고 만다. 서영은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발을 옮겼다.

    버너에 올려 둔 물이 시끄럽게 끓는 소리가 들렸다. 태욱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 넣었다. 배는 고팠다. 살아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조리 도구 안에 든 물을 남김없이 모두 다 넣은 후 숨을 고르던 그는 내팽개치듯 그릇을 내려놓았다.

    눈가로 뜨거운 기운이 몰렸다. 다가와 자신을 붙잡으려는 서영의 손길을 외면한 이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고해 성사 하듯 꺼내 놓은 말들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전 같았다면 모른 척 서영을 안아 버렸겠지. 그 순간만 생각하며 그녀를 그의 옆에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 피할 수 없는 진실. 끝내 터뜨려 버린 복수심이 그에게 욕심부리지 말아라, 그렇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리웠고, 보고 싶었으며,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태욱은 넋이 나간 채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자 거짓말처럼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아 내려 하고 있었다. 태욱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영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손을 올려 그녀의 눈가의 눈물을 훔쳐 냈다. 왜 이제 와 이러느냐며 서영이 얼굴 위의 손을 차갑게 털어 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못됐…….”

    더 듣지 않고 태욱이 서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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