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7화 (67/75)
  • 21. 아프면서 행복했어 (2)

    서영이 다시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동안 영희는 딸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만 가득한 집 안 분위기에 석완은 아내와 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 쪽도 손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지나왔는지 알았고, 그 역시 그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나 남은 딸까지 아픈 전쟁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마냥 지켜볼 부모는 없었다. 하지만 서영의 말처럼 전쟁이 벌어진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특히나 딸이 마음에 품은 남자는 어찌 보면 또 한 명의 피해자였다.

    구원받지 못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겠다는 걸 말리는 아내 영희를 보는 것도 그에겐 고역이었다. 늘 딸을 과보호하며 절대 시집 같은 건 보내지 않을 것이라 엄포를 놓았지만 그 누구보다 서영의 행복을 바라고 응원하는 사람이 그였다.

    그 하나뿐인 소원을 지금 딸은 어느 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결말을 내겠다고 하는데 뭘 어쩌겠는가. 보내 주는 수밖에. 서영이 그 남자를 잊지 못해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걸 지켜보는 것도 그에겐 벌이었다.

    “다 쌌으면 가자.”

    석완이 서영의 곁으로 다가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빠.”

    “태워 줄게. 그래야…… 아빠도 산다.”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지 서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 어머니에게 쏟아 낸 말들이 뾰족한 작살이 되어 부모님의 가슴에 꽂혔다는 걸 모른다면 그녀는 윤서영이 아니었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담담하게 딸을 보내 주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에도 똑같은 피가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떠나야 했다. 벗어나야 했고, 이겨 내고 행복해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 먼저 나가 계세요. 엄마한테 인사하고 갈게요.”

    서영이 짐을 아버지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완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관으로 나갔다. 그가 마당을 벗어나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서영은 거실로 나왔다. 영희는 또 그녀를 위해 김밥을 싸고 있었다. 매번 반복되는 그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서영은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고 영희의 앞으로 다가갔다. 부엌 식탁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봤다. 영희는 여전히 서영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김밥만 말았다.

    “엄마.”

    “…….”

    “이영희 여사님.”

    영희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서영은 영희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살가운 딸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철들지 못한 그녀는 그렇게 거리를 두었으면서도 그 정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만 생각했다.

    “사실은 나…… 이 김밥 먹으면 꼭 체했어.”

    몰랐던 이야기에 영희가 눈을 크게 떴다.

    “뭐? 왜 말을 안…….”

    “엄마한테는 이게 잘못을 비는 거잖아. 엄마가 엄마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럴 때가 많았으니까 이해했어. 근데, 또…… 이제는 엄마가 김밥을 그만 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김밥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어.”

    “…….”

    “그리고…… 엄마, 몰랐지? 소미도 김밥 별로 안 좋아했어. 어릴 때 엄마가 김밥 싸 주면 먹기 싫다고 다 나 주고 그랬어. 그러니까…… 김밥은 오늘까지만 싸. 그러자, 우리.”

    이제야 듣게 된 진실에 영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딸에게 행동의 이유를 들켜 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정말 서영의 말대로 그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그게 살아 있는 큰딸에게 또 다른 짐이 되는 줄도 모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그 긴 시간들을 견뎠는데 결국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멍청한 반성이 들기도 했다.

    “알았어. 앞으로 김밥 먹고 싶다는 소리만 해. 절대 안 싸 줄 테니까.”

    영희는 툴툴대면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서영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도시락 통을 꺼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담아낸 마지막 김밥을 서영에게 들려 주었다.

    “넌 먹지 말고, 아빠 다 줘. 네 아빠는 좋아해, 김밥.”

    “응. 그럴게.”

    서영은 도시락 통이 담긴 가방을 들고 현관 앞에 섰다. 영희가 다가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엄마의 품이 가슴을 또 한 번 울컥하게 만들었다. 이런 품조차 내려놓았던 어떤 남자가 생각나자 눈물이 제멋대로 솟아올랐다.

    “태욱이라고 했던가. 그놈 찾으면 꼭 데려와. 알았지?”

    “……응.”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채 서영은 돌아섰다. 마당을 나서자 여전히 석류나무가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나뭇잎이 세차게 흩날리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 ◆ ○

    서울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곧장 리조트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역시나 방 안엔 서늘한 공기만 가득했다. 그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은림이 그녀보다 더 먼저 알았겠지. 며칠은 서영처럼 정신이 나간 상태로 전화를 걸어 오던 은림도 그녀가 인천 집으로 붙잡혀 내려간 것을 알게 된 뒤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은림도 모두 알았으리라. 어쩌면 서영이 불씨가 되어 태욱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서영은 더 이상 죄책감 같은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미안했고, 미웠으며,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어머니를 홀로 만나 태욱이 겪었을 상황들이 저절로 눈에 그려졌다.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겠지. 죄송하다 말하곤 그 어떤 변명 같은 것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태욱은 그런 남자였다. 지위와 자리에 맞게 가면을 썼을 땐 누구보다 냉철하고 차가웠으나 그녀와 함께 있거나 서영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받아들이고 책임지려 했다. 얄미운 농담을 하며 그녀를 놀릴 때도 많았으나 서영이 싫다고 하면 언제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텅 빈 리조트 안에서 서영은 또 한 번 태욱을 그리워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야경도 혼자서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 어쩜 이리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걸까. 정말 그녀에게서 떠나 버리고 싶었던 걸까. 그 최악만은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서영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찾을 곳이 없다고 해도 어디든 돌아다녀야 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서영은 황급하게 화면을 확인했다. 기다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관장님.”

    ― 서영 씨, 지금 좀 만날 수 있어요?

    은림의 목소리가 태욱이 사라진 그날처럼, 감출 수 없이 떨려 왔다.

    아트센터에 도착해 은림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훈재였다. 그는 서영에게 짧게 목 인사를 건넸다. 서영만큼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주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훈재일 것이다.

    처음 태욱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었을 때 훈재는 화가 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게조차 연락하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느냐고.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면서 그는 또 한 번 강태욱이란 인간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했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가. 어떻게 이리도 자신을 못살게 구는지.

    애 아빠가 된 친구를 위해서라도 제발 연락하라는 음성 메시지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남겼다. 하지만 핸드폰마저 이사실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놓고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피가 아래로 모조리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래전 태욱의 아버지를 잃었던 은림을 볼 때면 더욱더 그 위험한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서 와요. 인천에선…… 오늘 올라온 거예요?”

    은림이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간단한 안부를 물었지만 지금 그녀가 신경 쓰는 건 그게 아닐 것이다. 서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 근처에 앉았다.

    “혹시, 연락 온 거라도 있나요?”

    질문은 은림이 아니라 서영에게서 먼저 튀어나왔다. 그녀의 질문에 은림도, 훈재도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 희망처럼 서영을 불러왔지만 그녀도 그들과 마찬가지라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뜻이 될지도 몰랐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훈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그 녀석 명의로 되어 있는 건물과 주식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어요. 누가 어디서 하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가 없어요. 이미 완벽하게…… 사라지기 전에 처리해 놓고 떠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손 회장님이 쓰러진 것과 연관 지어서 기사가 보도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손철민 이사 쪽에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은데, 맞는지 아닌지는 이 녀석이 나타나야 알 수 있는 거니까…… 하아.”

    서영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의 완벽주의가 이렇게 발휘된다고. 거짓말이었다. 누가, 멋대로, 뭘 정리한단 말인가. 서영은 울음을 참기 위해 가까스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그럴 리 없어요. 그 사람, 저한테 분명 내일 보자고 했어요. 인터뷰 날 보자고 말하고…… 그렇게…….”

    서영은 훈재가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서류들을 가져와 읽어 내려갔다.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라면 알아채야 했다. 그가 분명 찾아 달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라 확신했다. 서영은 눈물을 훔치며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 순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 이 주소, 뭐예요?”

    서영이 훈재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훈재는 서영의 손에서 서류를 가져가 확인했다. 그제야 그는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거, 그 녀석이 따로 사 둔 부지일 겁니다.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그때 집 지어서 이사한다고 땅을 보러 다닐 때라…….”

    서영은 훈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은림이 따라 일어났지만 서영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렇게 꿈에 나오던 장면이었는데. 서영은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줄곧 그녀에게 단서를 보내오고 있었다. 서영은 눈물을 닦아 내며 아트센터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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