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6화 (66/75)
  • 21. 아프면서 행복했어 (1)

    짙게 선팅된 차 안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재빠르게 올라탔다. 그러곤 가져온 서류를 품에서 꺼내 뒷좌석으로 넘겼다. 날카로운 손길로 서류를 받아 든 상대가 거칠게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곧 서류는 발판에 처박혀 버린다.

    “미친 새끼.”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미친놈만 아니라면 말이다. 철민은 비밀리에 출국해 부모님의 이혼 절차를 진행하며 자신 쪽으로 표를 보낼 사람들을 계산했다. 유린이 임신을 하면서 어쩌면 승산이 있을 게임이었다. 다 무너져 가는 회사인 줄 알았으나 지 회장이 구린 방식으로 빼돌린 지분이 상당했다.

    그것을 미끼로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태욱이 유린과 자신의 관계를 터뜨릴 것이란 건 철민도 예상한 바였다. 그러라고 유린을 이용했고, 태욱은 제 발로 그가 쳐 놓은 덫에 빠져들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니 당연했다. 필성도 그런 태욱과 힘겨루기를 하느라 헛된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그가 기다려 온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었고, 두 사람이 맞붙게 되었을 때 방아쇠를 당기면 되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상황은 예상보다 더 그의 편이었다. 필성이 쓰러졌고, 이제 걸림돌이 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익명으로 날아온 봉투 하나가 또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철민은 발 아래로 떨어진 사건 기록지를 내려다봤다.

    “이미 증거는 모두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당시에 사건을 의뢰받은 변호사가 따로 빼돌린 단서들이 그쪽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신변 정리를 끝낸 뒤 외국으로 출국한 걸로 보입니다.”

    비서의 말에 철민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가 무섭게 노려보자 비서는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미리 알아내 보고하라고 분에 넘치는 돈을 주고 앞자리에 앉혔다. 태욱의 동선을 파악하라고 한 게 여자를 만나는 파파라치 사진이나 찍어 오라는 의미인 줄 알았던 건가. 멍청한 새끼. 철민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하…… 미친년.”

    그는 발 아래 흩어져 있는 사진 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유린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음주 뺑소니가 뭐 자랑이라고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할까. 부모나 자식이나 똑같이 멍청해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놈을 매수해 운전자만 바꿔치기하면 뭐 하나. 그때 일 자체를 없애 버리듯 작은 단서조차도 남지 않게 모조리 불태웠어야지. 그가 뒤늦게 머리를 굴려 봐도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입건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두가 유린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편에 선 주주들도 여론에 따라 마음을 바꿀 수도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고, 선택해야 했다.

    “영감 쓰러진 건, 그 새끼가 범인인 것처럼 단서 흘리고 있지?”

    “네. 계속 작업 중입니다.”

    비서의 확답을 받은 철민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유린이 전화를 받았고, 들뜬 목소리로 내려가겠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철민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와 사진을 주운 뒤 차분히 봉투에 집어넣어 내용물을 감추었다. 그러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유린과의 밀회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봤다. 어느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보란 듯이 둘 사이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던 때도 있었다. 태욱의 미친 짓이 절정에 다다랐을 땐 알 수 없는 희열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강태욱이 파 놓은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자 허무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 언제나 끝이라 생각한 순간, 태욱은 그에게 하나를 더 내던졌다. 그는 절대 태욱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럴 수밖에 있는 이유를 이제는 그도 알고 있었다. 태욱은 정말 끝이 와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모든 걸 내던졌으니까. 제 자신까지도.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걸까. 철민의 미간이 점점 더 깊이 패어 갔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결승선을 지나기 전까진 누가 왕의 자리를 차지할지 알 수 없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창문을 내려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유린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엇갈렸으면 어쩌려고.”

    감동한 목소리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왜 이 여자를 선택했을까. 철민은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머리가 차가워지며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유린은 눈치도 없이 철민이 앉은 뒷좌석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려 했다.

    “옆으로 타.”

    그가 차갑게 말하자 유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 뒤쪽으로 돌아 철민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러곤 운전석에 비서가 앉아 있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달라붙으려 하자 철민은 제지하려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나가 있어.”

    그의 한마디에 재빠르게 앞좌석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때까지도 철민이 접근하지 못하게 손으로 막자 유린은 그제야 마음이 상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풀었다.

    그동안 만났던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의 감정의 기복을 모두 받아 줄 스타일이 아니란 걸 알기에 더 조심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철민이었으면 좋겠다고 결론을 냈을 때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리기도 했다. 태욱을 향해 비웃음을 놓던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무슨 일 있어요? 다 원하는 대로 잘 풀리고 있잖아요. 당신 할아버지, 저렇게 누워 있다 죽을 거고. 손태욱은 행방불명이고. 그사이 주인 없는 유신은 당신 게 될 거고. 우리 미래는 완벽한데…….”

    “지워.”

    철민은 유린의 말을 막고 짧게 일갈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기, 지우라고.”

    그는 동요 없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의사를 똑똑히 전했다.

    ○ ◆ ○

    태욱이 해맑게 웃었다. 그녀가 만든 비빔면이 매워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으면서도 맛있다며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벅차올랐다. 서영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짧게 입을 맞췄다. 태욱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서영은 술래잡기라도 하듯 베란다로 도망쳤고, 그는 기어코 따라와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붙잡았다. 몸이 가까이 밀착되자 서영은 긴장해 딸꾹질을 시작했다.

    태욱은 또 꼬리를 내린 대형견처럼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서로를 붙잡고 입을 맞추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의 입술 사이로 벚꽃 잎이 한 장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서영이 가까스로 그에게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자 베란다 아래로 벚꽃 잎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태욱이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무들을 같이 감상했다. 그가 ‘고마워.’ 하고 말하는 순간, 서영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지금 있는 곳을 확인했다. 꿈이었나. 땀이 배어 나와 손안이 축축했다. 이렇게 행복한 꿈을 꿨는데 악몽이라 느꼈던 걸까. 모든 게 거짓말 같아 얼굴을 쓸어 냈다.

    일주일째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졌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인천으로 내려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기간도 그만큼이었다. 회사에는 어쩔 수 없이 병가를 냈다. 지선이 전화를 걸어 왔지만 서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이해할까. 지금 그녀의 상황을.

    태욱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직원을 거느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없으면 유신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 어떻게 아직까지도 찾지를 못하나. 경찰은 그의 행적을 추적 중이라고 했지만 더 이상 공식적인 발표는 하지 않았다. 금세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났지만, 연일 주가가 하락세를 치는 것으로 태욱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서영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을 뿐, 다른 건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발을 묶어 버린 부모님을 원망하는 것도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을 때에나 가능했다. 서영은 어머니 영희의 발악을 그저 지켜보았고 순순히 따랐다. 언제나처럼. 착하고 소중한 딸 윤서영이니까.

    목이 말라 일어난 서영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 벽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영희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뭐 줄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영에게로 다가왔다. 열린 냉장고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어머니의 얼굴을 비췄다. 눈가에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생을 잃었을 때와 비슷했다. 서영의 기억으론 그랬다.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가자 서영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버렸다.

    그녀는 어머니를 마주 바라봤다.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러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죽었으면 어떻게 해?”

    서영의 입에서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이 영희의 심장을 바짝 조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딸의 어깨를 급하게 붙잡았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넌…… 너는, 그런 생각 할 것 없어.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이 엄마 잘못이니까, 그러니까 너는…….”

    “우리는 언제까지 저 석류나무만 보고 있어야 해?”

    서영은 또 다른 말로 영희의 심장을 찢었다.

    “…….”

    “엄마. 소미가 죽은 건…… 그 사람 탓이 아니야. 그 사람이 그 일을 벌인 게 아니잖아. 그리고 뭐 때문에 우리 소미가 죽었는지 다 알면 어때서? 진짜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

    “우리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또 이렇게 숨어? 그렇게 참고 또 참느라 내가 너무 아프면,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을 또 잃으면, 그땐…… 어떻게 해?”

    말이라도 뱉으면 속이 시원해진다는 걸 이제야 알아 버렸다. 서영은 태욱에게 미안한 것투성이였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그가 조금이라도 상처받았다면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가 용서할 수 없다 해도 모든 걸 털어놓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겁나서, 무서워서. 그래 놓고선 또 그 사람 놓지 못해서 안아 달라고 했어. 다시 만나는 게 좋았고,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미칠 것같이 아프면서도 행복했어. 엄마, 내가 그 사람을, 그만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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