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모든 게 후회였다 (2)
리조트에 도착한 서영은 그가 그녀의 몫으로 쥐여 준 룸 키를 들고 방문 앞에 섰다. 도어록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도시의 야경이 그녀를 맞았다. 그리고 넓은 창 앞에 서 있는 한 남자. 태욱이 거기에 있었다. 서영은 안도하며 그에게 걸어갔다.
“왜 여기 있어요?”
통유리 창에 비친 태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돌아서지 않고 잠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서영도 마찬가지였다. 안 된다. 알겠다. 그렇게 어그러진 약속이 아니었나. 이렇게 취소된 적 없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둘이 마주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말인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태욱이 그제야 뒤돌아서 서영을 마주 바라봤다.
“회식이…… 일찍, 끝났어요.”
“아.”
서영의 거짓말에 태욱이 짧게 대꾸했다.
“그래서 서 대표 생일 파티는 잘 했나?”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빛을 하자 태욱은 또다시 시시한 듯 웃었다.
“내가 미행 붙이고 있다는 거, 잊었어?”
아, 미행. 서영은 뒤늦은 깨달음에 작은 혼잣말을 내놓았다. 보호가 아니라 복수란 소리도 했었지. 그날의 날 선 말들이 되살아났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정말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상처를 받았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또 그만큼 그를 이해해 버렸다. 서영에게 태욱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족보다 소중하지 않다며 돌아섰지만, 그녀 자신보다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단 한 명의 존재였다.
“미행했다면서요.”
“…….”
“그럼 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를 이해한다고 해서 욕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기만을 바라고, 지금 시간으로도 만족했지만, 돌아서면 또 다른 마음이 들며 그에게 바라는 게 생겨 버렸다. 이런 것도 사랑인 걸까. 이리도 이기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잘못조차 모른 척하는 뻔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서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따지듯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태욱은 어이없는 웃음으로 받아쳤다.
“내가 올 줄 알았어요?”
서영이 물러나지 않고 물었다.
“…….”
태욱은 대답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눈빛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어 읽어 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서영은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예전엔 그랬지.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였어.”
그의 손이 서영의 뺨에 천천히 닿았다.
“이젠 모르겠어. 올 거라는 생각으로 기다린 건 아니니까. 그런데 또…… 안 왔다면, 억울했겠지. 아프겠지. 원망했겠지. 그렇다고…… 뭘 어쩌겠어, 내가.”
그가 희미하게 웃고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의 주머니에선 선명한 진동음이 울렸다. 약속하고 만났다고 한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 있었고, 아예 없던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매일 만나고 몸을 섞어도 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지 두 사람 모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안으면 그만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바보였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상황은 가짜 연극이나 하던 때와는 달랐다.
“이사님.”
서영이 한 발 더 다가서며 그를 불렀다.
“내일 인터뷰 때 봅시다.”
태욱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감정을 제거한 얼굴로 산뜻하게 말했다. 서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서 이곳으로 달려왔고, 그가 있었다. 하지만 태욱은 떠나야 했다. 그것을 또 그녀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운전……, 조심하세요.”
미련이 남은 채로 서영이 말했다.
“…….”
태욱은 대답 없이 잠깐 웃더니 차갑게 돌아섰다. 서영은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말도 했었다. 이것 또한 그가 원한 시나리오이겠지. 서영은 태욱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서 있기만 했다.
움직임이 없자 자동으로 켜졌던 불이 꺼져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멋진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태욱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서영은 울 수조차 없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별채로 창수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익숙하게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서자 지팡이를 짚은 채 창가를 바라보며 서 있는 필성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의 부름이었다. 필성의 뜻이 아닌 그 스스로 태욱을 선택하고 도움을 주고자 옆에 붙었을 때 어느 정도 마지막을 예상했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 늙은 노인은 30년의 인연을 단번에 끊어 냈다. 그 뜻은 분명할 것이다. 이제 그만 자신의 지난한 과거를 깔끔하게 삭제하고 싶은 거겠지. 거기에 걸림돌로 남은 건 산증인인 창수 자신뿐이었다.
“찾으셨습니까?”
창수의 뒤늦은 인사에 필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독기만은 살아 있던 늙은 노인의 눈빛이 오늘따라 지쳐 보였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인가. 이 끝없는 전쟁도 마무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원죄에서 벗어난 죄수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첫째가 이혼 서류를 보냈어.”
필성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인국과 미연이 모두 사인한 이혼 서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밀스럽게 한국으로 들어와 미연의 친정 사람들을 만나는 철민의 모습이 찍힌 파파라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을까. 아니다. 모든 걸 세 수 앞에서 내다보는 노련한 노인이 이 서류 하나로 흔들릴 사람인가. 인국이 태욱에 의해 철창에 갇힌 순간부터 미연 집안과의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봐야 했다. 이제껏 그를 기다리고 참아 온 미연과 철민이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넘어간 인간들 보고해.”
노인의 말투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건양이 그쪽에 붙으면 얼마나 건지는지 알아 와.”
꼬리를 내리고 있던 지유린의 아버지가 돌연 철민 쪽으로 돌아서게 된 이유야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었다. 태욱이 마지막으로 터뜨린 아이 아버지에 대한 진실은 손씨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 뿐만 아니라 건양의 이미지도 모두 말아먹은 상황을 만들어 냈다.
지 회장이 필성을 배신하고 철민의 외가 쪽에 붙어도 할 말이 없었다. 철민과 유린의 관계를 알게 된 지 회장이 필성을 찾아와 단 한 가지만 지켜 달라며 부탁한 것이 비밀 유지였다. 자신의 딸이 누구와 결혼하든 유신과 인연을 맺으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필성도 그러겠다고 흔쾌히 약조했다. 그 비밀을 지켜야 할 이유는 본인에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태욱이 한순간에 말아먹었다. 그것은 필성에 대한 완연한 도전이자 복수였다. 그럴 줄 몰랐었나. 창수에게도 보이는 것이 필성에게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태욱은 지금 복수에 미쳐 있는 상태였고, 필성은 그 미친 말을 데려와 기어이 왕의 자리에 올리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는 결국 끝장을 보겠다는 사람처럼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 하나를 꺼냈다.
“직접 만나서 건네도록 해.”
창수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서류들. 터널 공사에 관여된 건설사 중 유신만 빠져나왔던 일을 기어이 끄집어내려 하는 것이다. 제 손으로 비밀에 부쳐 덮어 놓고 이젠 손자의 불행을 위해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 이용하려 한다. 모두를 끝없는 고통 속에 빠뜨리도록 만들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집착은 결국 그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었고, 절대 고칠 수 없는 병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손 이사는 충분히 해냅니다.”
창수의 확신에 필성이 비웃음을 보였다.
“미친놈 옆에 있더니 그새 정이 들었나 보군.”
“회장님.”
필성이 고개를 들어 창수를 찌를 듯이 노려봤다. 그 눈빛은 30년 전 어느 날처럼 위험했고, 이성이 걷힌 상태였다. 그때는 말리지 못했다. 창수는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창수가 감정을 실어 물었다. 이제는 물을 수 있었다. 물어야 했다. 인주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단 한 마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으나 이제 그는 그때의 자신이 아니었다. 늙었고, 아팠으며, 또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지 않아도 결국 누구든 하겠지. 아니, 내가 하길 지금 그 녀석이 바라고 있지 않은가? 멈추게 하는 방법도 이것뿐이야.”
필성의 핑계는 그럴듯했다. 태욱의 불행을 원하는 인간들은 차고 넘쳤다. 철민부터도 점점 더 독이 올라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복수심을 일부러 만들어 낸 것도 태욱 본인이었다. 끝을 바라는 건 정말 다른 누구도 아닌 태욱일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창수는 마지막 물음 앞에 늘 필성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 녀석이…… 여자 하나에 붙잡혀서, 이 자리를 놓치면 그 뒷감당 할 자신이 있어? 자네도 이미 그걸 알고 손철민이 아니라 손태욱한테 붙은 게 아니야? 그리고 진실을 밝히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자네 아닌가?”
“…….”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게 자네 일이야.”
눈을 감고 너른 의자에 몸을 기댄 필성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돌아앉았다. 창수는 방을 나서는 대신 조금 더 그에게로 다가갔다.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는 선을 밟고 나아가듯 필성의 곁에 서서 눈을 감은 그를 내려다봤다
필성의 목을 조르는 자신을 생각한다. 발버둥 치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노인. 창수는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그려 본 그 장면을 떠올렸다. 그의 손이 필성의 가슴까지 올라갔다가 끝내 원하는 것을 움켜쥐지 못한 채 내려왔다. 창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걸어 나갔다. 그가 별채를 빠져나가는 순간, 필성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