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3화 (63/75)
  • 20. 모든 게 후회였다 (1)

    [점심은?]

    [먹었어요.]

    대답하고 나면 문자는 거기서 끝이었다. 당신은 먹었느냐 물었어야 했나, 고민하는 사이 업무 전화가 걸려 오고 회의가 진행되었다. 차라리 정신이 없는 게 나았다. 그렇지 않다면 온전히 핸드폰에만 신경이 전부 가 있었을 테니.

    릴레이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서영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태욱에게서 부재중 전화 1통. 그리고 짧은 문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얼마나?]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대화에 서영은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예전의 강태욱이 아니었지만 또 전혀 강태욱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이중적이고 모호한 문장이 마치 지금 그녀의 마음속을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이 먹었어요.]

    서영은 두 시간 만에 답장을 보냈다. 그가 곧장 읽은 듯 채팅창의 숫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기다렸지만 다음 말은 날아오지 않았다. 질문을 했어야 했나. 또 멍청한 반성이 들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이사님은 드셨냐.’고 보냈지만 이번엔 바로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렇게 그녀와 시시한 일상 문자를 주고받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인터넷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경제인 포럼에 그의 얼굴이 등장했다. 태욱이 유신건설의 확실한 대외용 홍보 모델이 된 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딜 가나 이슈맨이긴 하네.”

    앞자리의 가현이 혼잣말을 했다. 아무래도 서영과 같은 자료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유신건설의 외주 홍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당연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유신아트센터와 관련된 업무를 맡은 서영과 그녀가 자꾸 일이 겹치는 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강태욱이란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하든 홍보 일의 목적은 이슈를 만들어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대중에게 알리는 게 중요했고, 그 소스를 아주 두루두루 갖춘 사람이 태욱이었다.

    “아, 참. 아트센터 사보 특집 인터뷰, 내일이라고 했죠?”

    가현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서영은 맞는다며 짧게 대답했다. 태욱은 언제 밤이 새도록 몸을 섞었냐는 듯 자신의 이사실에서 완전한 포커페이스로 사전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영은 오랜만에 외부인으로서 유신건설에 방문하게 되었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는 옛 동료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서영은 재벌가 정략결혼이라는 현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인 된 옛 남자의 인터뷰까지 맡은 대단히 진취적인 여성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랬다. 그 속에 담긴 비웃음을 모르지 않았다. 얼마나 사는 게 팍팍했으면, 어쩜 저리도 미련을 떠는 걸까. 딱한 눈빛이 그녀의 등 뒤에 당연한 듯 따라붙었다.

    태욱은 그 시선을 홀로 감당하는 서영을 보호하지도,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철저하게 외주 홍보 대행사 담당자로서 대하며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란 것을 알았기에 서영은 오히려 고마웠다.

    그녀가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후 처음으로 단독으로 맡아 진행하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사적 감정으로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은림에게 태욱과의 인터뷰 일정을 보고하자 어쩐지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녀석이 그렇게 순순하게 받아 줬느냐는 물음이 두 번이나 이어졌다. 거기다 대고 다른 미련이 되어 주기로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저녁 배는 비워 놔요. 거기서 봅시다.]

    뒤늦게 태욱의 문자가 들어왔다. 그가 말하는 ‘거기’는 리조트의 끝 방이었다.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뜻이 분명했다. 마치 둘만의 암호처럼 ‘거기서 봅시다’란 문자를 주고받은 게 첫날 이후로도 여러 번이었으니. 차라리 몸만 섞는 게 편했다. 태욱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고, 옛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아, 윤 대리님. 오늘 저녁 회식 알죠?”

    “……네?”

    태욱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서영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 단톡에 올렸는데 못 보셨어요? 오늘 대표님 생일이라 겸사겸사 하기로 했잖아요.”

    서영이 속한 단체 채팅방에선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고, 오늘이 지훈의 생일이란 것 또한 깜박하고 있었다. 가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서영이 모르는 회사 채팅방이 또 하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태욱이었다. 이미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뒤늦게 회사 회식이 있다고 말하려니 핑계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솔직히 서영 역시 회식보다는 태욱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서영은 먼저 가현에게 불참 의사를 전했다. 그녀는 잠시 대표실 쪽을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부터 서영을 탐탁지 않아 하던 그녀가 지훈의 감정을 모를 리 없었다.

    “많이 급한 일이에요? 그런 거 아니면 잠깐 촛불 끄는 것만 보고 가면 안 돼요? 괜히 대리님만 문자 못 받았다고 하면 제 입장이 좀 그래서요.”

    정말 이토록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실수한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서영은 가현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 건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건 민 대리님 입장이고요.”

    “아…….”

    가현은 그제야 무엇이 먼저인지 깨닫게 되었다. 홍보 쪽 일을 하게 되면서 눈치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는데 자꾸만 서영의 앞에선 그 눈치보단 자존심이 앞섰다. 유신의 지인으로부터 들은 그녀의 소문과 두 대표들이 데려온 낙하산이란 첫인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함께하게 되자, 서영은 생각과 달리 일적인 부분에서 가현과 스타일이 맞았다. 잘한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이가 못하는 걸 일부러 드러내 자신을 높이는 법도 없었다. 그 대신 그녀가 고수하는 선을 어겼을 땐 단호하게 행동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살 것만 같은 그녀가 의외의 모습을 보일 때가 바로 이때였다.

    “전달 못 한 건 제 실수예요. 죄송해요.”

    결국 가현이 사과했다. 서영은 곧 괜찮다며 이해해 주었고,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개인 문자를 활용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더 이상 뒷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유신건설의 손태욱 이사도 지앤지마케팅 서지훈 대표도 그녀의 이런 외유내강적인 모습 때문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걸까. 한 번씩 서영을 오랫동안 관찰할 때면 가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질 때가 있었다.

    “하이! 여러분,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나요?”

    서영에게 빠진 또 한 명이 있다는 것을 깜박했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인물이 등장했다. 지선은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든 채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당연한 것처럼 서영에게 꽂혀 있었다.

    “어떻게…….”

    서영이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사히 회복하고 조리원을 나왔다는 소식은 가장 먼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바깥 외출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하고 딱딱하기만 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지선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푸근하고 밝게 바뀌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나오셔도 돼요?”

    서영이 지선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잠깐은 괜찮아. 갑자기 출산해서 팀원들 고생시킨 것 같아 너무 미안해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오늘 서 대표 생일 축하 파티 겸 회식도 있다기에 훈재오리 씨한테 애교 좀 피웠지. 하하.”

    이렇게 지선까지 등장하고 나니 서영은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손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표정은 밝게 입꼬리를 올려야만 했다.

    “나까지 왔는데 오늘은 빠지는 사람 없기? 오케이?”

    잠시 서영에게 시선을 준 가현이 웃음을 감추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서영은 그녀에게 잘못을 따지고 정색한 게 부끄러워졌다. 인생은 언제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대표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와아아아.”

    변두리 작은 식당의 방 한 칸을 빌려 조촐하게 치러진 지훈의 생일 파티는 또 다른 대표의 등장으로 더욱 왁자지껄했다. 서영도 엉겁결에 지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했다. 태욱에게는 이실직고하며 급하게 회식이 생겼다는 문자를 남겼다. 곧장 괜찮다는 답장이 날아왔다.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면 어쩌냐고 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너무 순순했다. 그게 또 그녀의 기분을 가라앉게 할 줄은 몰랐다.

    “모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지앤지를 위하여.”

    “위하여!”

    모두 술잔을 들어 맞부딪치고 시원하게 잔에 든 술을 비워 냈다. 서영도 뺄 수 없어 원샷을 하고 보니 오랜만에 마신 술이 달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영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지선이 말을 붙이려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어느새 다른 직원들에게 휩싸인 지선은 콜라가 담긴 잔을 수십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런 지선을 보자 서영은 또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생일 선물은 없어?”

    앞자리에 앉은 지훈이 불쑥 물어 왔다. 태욱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이후 개인적인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 그였다. 서영도 그게 편했기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지훈과는 이렇게밖에 지낼 수 없는 사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늘 생일이신 걸 깜박했어요.”

    미안하다며 웃자 지훈도 멋쩍게 따라 웃어 버렸다.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내 눈치는 보지 마.”

    지훈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네 감정이잖아. 그걸 어떻게 하겠어, 내가.”

    쓸쓸하게 웃는 그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서영은 다시 꼭 쥐고 있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태욱에게선 그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게 이렇게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일 줄은 몰랐다. 서영은 무엇에 씐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그녀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선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영은 선약이 있었다며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긴 후 가게를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와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리조트로 가 달라는 말을 하고 태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 흘러나왔다.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태욱인 줄 알고 화면을 확인하자 어머니였다. 서영은 화면만 바라본 채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무음으로 돌린 후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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