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1화 (61/75)
  • 19. 이렇게 끝도 없는 걸 (2)

    “오랜만이네요. 서 팀장, 아니, 이제…… 서 대표인가.”

    먼저 말을 건넨 건 태욱이었다. 그의 등장에 지훈은 서영에게서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자신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이자에겐 아주 쉬운 거구나. 그토록 떠들썩한 이별을 하고 몇 개월씩이나 은둔 생활을 할 만큼 아파했으면서 또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 게 대단하다면 대단해 보였다. 서영이 하는 사랑은 도대체 그가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 태욱의 인사에도 서영을 한 번 더 내려다보던 지훈이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유신 출신이니 손태욱의 일상이야 연예인들 소식처럼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을 것이다. 굳이 묻는 의도야 뻔했다. 느닷없이 제 영역에 나타난 데 대한 불쾌함의 표시겠지. 표정에서 모든 것이 읽혔고, 그래서 태욱은 더욱 서영을 데리러 이곳으로 오고 싶었다.

    약속 장소를 문자로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그런 여자였다. 잠깐 한숨을 돌리면 상황이 리셋되도록 만들었다. 그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고, 사랑을 경멸하게 만들었으며, 끝내는 그가 패배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도록 했다. 줄다리기는 단 한 번도 팽팽했던 적이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애초부터 줄을 잡고 있지 않았으니.

    “서 대표 눈에는 어떻게 보여요?”

    태욱이 웃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할 때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이미 지훈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태욱은 분위기로 사람을 압도했고, 그럴 때면 이유도 없이 한발 물러나게 됐다.

    한때는 태욱이 가진 아우라를 닮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태욱만의 능력이었고, 지훈은 따라 해 봤자 그처럼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지훈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후 유신을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리면서 낮아진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잊고 있던 자격지심이 이 순간에 또다시 발동할 줄은 몰랐다.

    “좋아 보이시네요. 어쩐지.”

    지훈이 흐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 봤어요. 다시 심장 뛸 일이 생겨서.”

    태욱의 대답에 서영의 고개가 들렸다. 두 사람의 기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간단한 인사 정도 나누지 못할 사이도 아니었고, 어쨌든 일로도 얽혀 있었다. 지훈이 유치하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도 있었고, 태욱 역시 이 상황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었다.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야?”

    서영과 눈을 맞추며 태욱이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아.”

    그제야 그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영은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이제 태욱의 일행이 되어 버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으로 이끌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태욱이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지훈이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러 놓은 덕분에 세 사람이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서영이 태욱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그가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든 한다며?”

    “이사님.”

    “유치해도 참아.”

    태욱은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서영을 회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내가 원래 그런 놈이야. 윤서영은 그런 놈한테 잘못 걸린 거고.”

    태욱의 차 앞에 도착하자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올 새도 없이 서영은 태욱의 손길에 떠밀려 차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이 무슨 상상을 하든 그건 두 번째 문제였다. 서영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당당한 선포 안에는 이런 일도 당연히 포함되는 게 맞았다. 태욱과 함께 리조트에 도착해,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비를 지나, 그가 잡아 놓은 VIP 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태욱이 익숙하게 룸 카드를 꺼내 도어록 앞에 가져다 댔다. 띠리릭. 문이 열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영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녀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태욱을 바라봤다.

    “……왜? 이건, 도저히 못 하겠습니까?”

    물음 속엔 웃음이 스며 있었지만 그는 이미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그가 지쳐 있다는 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알아챘다.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달려올 남자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정한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나타났다는 건 그때까지 참지 못할 정도로 힘든 이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요?”

    “…….”

    태욱이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사님.”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하나?”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뭐든 하겠다고 했지, 예전처럼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전제는 없었다. 태욱의 되물음이 그걸 깨닫게 해 주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그저 서로의 감정을 털어 내는 것뿐이다. 미련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시간을 벌어 주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하지 않았나. 서영도 자신의 행동에 되레 웃음이 났다.

    “죄송해요.”

    상황 파악은 빨라야 했으니까. 서영은 더 지체하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철컥. 무거운 출입문이 닫히고 한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서영의 눈앞엔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생각해 보니 리조트 오픈식 날도 그는 이 방에 머물렀었다. 그땐 정신이 없어 창가 쪽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태욱을 만났고, 차가운 그의 태도에 도망치듯 호텔방을 벗어난 기억밖에 없었다.

    “오픈식 날, 내가 했던 말 기억납니까?”

    태욱은 서영보다 앞서 걸어 들어가 창가 앞에 섰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모두 집어넣은 채 야경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지만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모두 서영의 눈에만 읽히는 감정들이었기에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 야경에 반해서 리조트를 짓겠다고 생각하신 거요.”

    서영이 대답하자 태욱이 뒤쪽을 돌아봤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그가 웃자 서영은 언제나처럼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랬나. 왜 그 기억으로 남았지. 머릿속 회로가 꼬인 기분이었다. 솔직히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나타났고, 그녀가 바라볼 수 있도록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이 야경에 반한 건 맞아요.”

    그가 수긍하듯 말을 내놓고는 돌아서 서영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소파 팔걸이에 허벅지가 걸리자 그가 또 웃어 버렸다. 태욱이 천천히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그러고는 서영과 나란히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심장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지만 서영은 동요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재미로 이런 장난을 하는 사람이니까. 예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시선을 창가 쪽으로 돌렸다.

    “잘 지으셨어요. 누구라도 이 방에 오면…… 행복해질 거예요.”

    그가 탁월한 안목과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진 남자라는 건 입사 초부터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앞서긴 했어도 그에 못지않게 존경심 또한 컸다. 전설로 내려오는 그의 일화들을 듣다 보면 괜히 그녀가 뿌듯해지기도 했으니까. 태욱은 그때와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행이네. ……딱 한 사람만 만족하면 됐거든.”

    야경을 내려다보며 태욱이 덤덤하게 고백했다.

    “…….”

    서영은 그 어떤 말로도 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녀란 말을 듣게 되면, 그렇다면, 또 얼마만큼의 죄책감이 그녀를 덮쳐 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으니. 서영은 무거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마르다. 물 좀 마셔야겠…….”

    태욱이 서영의 팔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앉아 있어.”

    툭, 한마디를 던지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태욱은 익숙한 걸음으로 냉장고 쪽으로 향했고, 생수병을 하나 꺼냈다.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 간단한 행동이었다. 서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이별은 어느 누구나 다 하는 것인데. 그녀에겐 왜 이토록 크게 다가오는지. 뭘 얼마나 큰 죄를 지어서 이 남자를 좋아하면서도 가질 수 없다는 생각뿐인지. 서영은 혼란스러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사님.”

    “……왜? 못 견디겠어?”

    그가 생수병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읽은 것처럼. 그의 뒷모습만 보였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영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럼 예전이랑 같을 줄 알았나?”

    태욱이 돌아서 서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지금 그에게선 더 이상 장난 같은 표정은 없었다. 서영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코너가 있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앞뒤 모르고 덤비는 건 여전해, 윤서영.”

    부딪쳤다고 생각한 순간, 커다란 손이 벽과 그녀의 머리 사이를 안전하게 막았다. 동시에 그와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져 버렸다. 서영은 눈물이 차올랐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고모님이 부탁했어요.”

    결국 자신은 이런 도피성 말밖에 내뱉지 못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

    “당신, 걱정하는 마음 아니까. 미련이라도 되어 달라고 했어요. 나는 당신한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겁도 없이 뭐든 하겠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미안해요.”

    이런 말들이 결국엔 태욱을 더욱 아프게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서영은 자신을 지키는 게 먼저인 사람이었고, 상처에 학습된 사고들이 때론 더할 수 없이 그녀를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상했어. 윤서영은 동정에 약하니까.”

    태욱이 웃으며 대답했다. 눈물보다 더 아픈 웃음이었기에 서영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괜찮아.”

    태욱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서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죄책감이라도 붙잡고 있지, 뭐.”

    천천히 입술이 맞물렸다. 서영은 그를 밀어 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너무 따뜻하고 절박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눈 감지 마.”

    태욱이 명령하듯 말했다. 서영은 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그래야……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지.”

    그가 벌하듯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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