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0화 (60/75)
  • 19. 이렇게 끝도 없는 걸 (1)

    산에 다녀온 후, 태욱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 대신 유신건설 홍보 팀을 통해서 그의 인터뷰 일정을 전달받았다. 바쁜 사람이니 이해했고, 서영이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했으니 그의 행동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서영은 책상 위 달력을 들어 약속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손태욱 이사 인터뷰’라고 적었다. 지훈에게도 서면 보고가 들어갔고, 그는 덧붙이는 말 없이 잘 진행하라는 딱딱한 문자만 보내왔다. 모든 것이 그녀가 바란 대로 진행되고 있는데도 자꾸만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태욱과 산에서 마주치고, 휴게소에도 들러 밥을 나눠 먹고, 장난까지 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상은 바뀐 게 없었다. 서영이 욕심부려 산 간식들은 공평하게 반반씩 두 사람의 입에 들어갔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다.

    태욱의 얼굴이 전보다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알은체할 순 없었다. 그 이유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것 또한 그녀에 대한 그의 복수라면 받아들여야 했으니.

    운전하는 태욱을 대신해 그의 입에 호두과자를 직접 넣어 줬을 땐 ‘윤서영’이란 여자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지훈에게는 절대 허락될 수 없었던 그 일이 태욱에게는 당연했고, 그녀가 먼저 나서기도 했다. 그의 목이 막힐까 봐 커피까지 입 앞에 대령했을 땐 태욱이 잠시 어이없는 웃음을 보일 정도였으니.

    ‘이렇게 복수합니까? 먹고 죽으라고.’

    죽는다는 소리를 참 쉽게 한다며 그를 노려보았다. 죽이려면 목이 막히게 호두과자만 밀어 넣었지 왜 커피까지 주겠냐며 서운한 목소리로 변명을 하자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눈꼬리가 내려간 웃음을 지으며 모든 걸 잠재워 버렸다.

    다시는 그 웃음에 설레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랑이 아프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랑이 참 지독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것은 윤서영이 아니라 사랑인 것인가. 그 사랑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그녀의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뭐, 좋은 일 있어요?”

    “……네?”

    앞자리의 가현이 그녀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아니, 아까부터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 있길래요. 혹시, 그 기사 때문인가 해서요.”

    가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서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유신 출신인 서영을 못마땅해하며, 항상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태욱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 어딘가에서 전해 듣고선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유린의 속도위반 소식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었단 생각이 떠오르자 서영은 그녀의 말뜻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슨 기사요?”

    “아……. 몰라요?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그녀는 혼잣말을 하고선 서영의 채팅창에 기사 하나를 첨부해 전송했다.

    “오후에 나갈 기사래요. 원문을 만든 게 손태욱 이사 측근이라는 소문도 있고.”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서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욱이 만들려는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은림은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녀 또한 믿지 않았다. 태욱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걸 더욱 확신하게 됐다.

    서영은 얼른 기사를 클릭했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자 지유린의 사진이 떴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익숙한 인물이 붙어 있었다. 손철민 이사. 태욱의 사촌 형이었다. 이 사람과 지유린이 나란히 있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이의 친부는 사촌 형?

    드라마보다 더한 재벌가의 막장 혼사]

    기사의 타이틀은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이걸 태욱이 준비해 뿌렸단 말인가. 제 얼굴을 더럽히면서까지 그가 하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서영은 태욱을 이해하면서도 전부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냥 건양 지유린이랑 자기 사촌 형 한 방에 보내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래 놓고 정략결혼 뒷거래 때문에 결혼은 다른 문제라고 뻔뻔하게 대처해 버리려나. 이게 진짜 막장이 아니고 뭐야. 태어날 애만 불쌍하지. 뭐, 그 애도 날 때부터 금수저니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요.”

    가현은 늘 봐 왔던 재벌가의 모습들에 대해 얘기하며 소문을 해석하고 추측했다. 제3자의 입장에선 그럴 것이다. 태욱은 무수히 칼을 뽑아 휘두르며 나아갔고, 끝내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서영은 그를 위해 헤어져 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엔 마지막까지 이용당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영의 핸드폰이 울리며 짤막한 문자가 들어왔다.

    [오늘 저녁 9시, 유신리조트 1305호.]

    보낸 사람은 태욱이었다.

    ○ ◆ ○

    손 회장의 호출은 예상한 바였다. 태욱은 무리하게 스케줄까지 접으며 본가에 들렀다.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개가 아닌가. 별채로 들어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골프공이 날아왔다.

    피하지 않았음에도 공은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부딪치고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는 확실히 정확도가 떨어졌다. 영감도 힘이 빠졌다는 방증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치부를 더 이상 들키고 싶지 않은 노련한 이기심의 끝일지도 모른다. 뭐든 구역질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 할 셈이야?”

    그동안은 눈감아 주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영감은 지유린과 다시 혼인하겠다는 그를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것이고, 태욱보다도 먼저 철민과 유린의 사이를 눈치채고 그쪽을 따로 매듭지으려 했을지 몰랐다.

    거기에 방해꾼이 되어 훼방을 놓은 게 태욱이었다. 그 배후에 윤창수 변호사가 있다는 것도 비서 주한을 통해 보고받았을 것이다. 늙은 노인은 아무도 믿지 않은 채 자신의 머리만을 의지하며 상황을 굴려야 했다. 그럼에도 태욱보다 한발 앞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미친 말 강태욱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써 그의 계획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제 혼사 문제는 저한테 일임한다고 하셨잖습니까?”

    태욱이 흔들림 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이 집안을 콩가루로 만들 셈이야!”

    필성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골프채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가 아끼던 도자기가 산산조각 나 바닥에 떨어지는 걸 지켜보다 손자를 바라봤다. 태욱의 두 눈에 두려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검게 가라앉은 눈빛은 이 집 안에 들어온 뒤 내내 품던 독기마저 빠져 평온하고 잠잠했다.

    “그것처럼, 모든 게…… 한순간입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라고요. 제대로 된 자식 하나 곁에 두지 못해 결국 버렸던 손자의 목줄을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만족하십시오.”

    “…….”

    필성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해 골프채를 놓치고 말았다. 무릎이 저절로 접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이다. 마지막 업이다. 이것만 제대로 되잡아 놓고 죽겠다. 그렇게 자신의 행동들에 이유를 붙이며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현실을 깨달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 네놈이 하는 그…… 복수의 끝은 나더냐?”

    가까스로 숨을 고른 채 필성이 입을 열었다.

    “복수에 끝이 어디 있습니까?”

    태욱은 간단히 되물었다.

    “…….”

    필성은 받아치지 못한 채 손자를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숨기려 덮은 과거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의 짐을 가지고 죽었는지. 그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사람이 결국 누구였는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린 필성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내가…… 네 아비처럼…… 그렇게 죽길 원하는 게야?”

    영감의 말에 태욱이 그저 감정 없이 웃어 버렸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요. 이 집안에서, 회장님 말고 원하는 대로, 뜻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있습니까? ……아버지도 그러셨겠죠. 잘못하고 있는 걸 아는데 바로잡을 수 없으니. 잘못을 또 다른 잘못으로 덮기만 하는 게 사업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나서 떠나셨겠죠.”

    “그저 작은 사고였다. 어느 현장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거야. 인부 한 명이 죽었다고 그 큰 공사를 중단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이 회사 직원이 몇 명인 줄 알아? 그리고 그 밑에 딸린 식솔들…….”

    “네. 그렇게 이유 만들어 가며 덮어 두고 자식까지 스스로 죽게 만든 그 터널이 결국은 터져 버렸죠.”

    만약 아버지의 뜻대로 터널 공사가 멈췄다면 어땠을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과 위험한 환경, 그 속에서 지어지는 터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버지는 분명 알고 계셨을 것이다.

    끝내 필성을 이기지 못하고 유신을 떠난 후 죽은 인부의 가족이 그를 찾아올 때마다 인주는 끝없는 죄책감과 싸워야 했을 테다. 그가 막다른 길에서 용서를 빌 때마다 필성은 아들이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손필성이 살아온 세계가 그랬다. 하지만 인주는 되돌아가는 대신 스스로를 벌했다. 그 방법 또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욱은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다 지난 과거야. 이제 와서 뭘 어쩔 셈이야? 네 아버지 잘못이 아니란 걸 증명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잠깐의 감정도 못 이겨 내고 죽어 버린 녀석을.”

    “그래서 그 터널 공사 책임자들 중에서 큰아버지 이름부터 지우셨습니까? 살아 있는 하나뿐인 아들은 아무 죄 없이 살게 해 주시려고요?”

    필성은 큰 숨을 삼킨 후 낮게 목소리를 바꿨다.

    “네 큰아버지도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네 손으로 감옥에 넣지 않았어?”

    결국 그런 의도였는가. 태욱은 완벽한 필성의 계획들에 허무한 웃음이 흐를 뿐이었다.

    “……그렇군요. 그랬던 거였네요. 그럼 모든 게 다 정리되는 거였어요.”

    “태욱아.”

    손 회장이 처음으로 손자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태욱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미 진실을 마주하고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회장님께…… 바라는 것 없습니다. 어머니랑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한테 자유는 가질 수 없는 거였습니다. 악착같이 후계자 자리를 노린 것도 제 뜻 아닙니까? 그 누구를 탓할 자격도 스스로 버렸습니다.”

    “…….”

    “그저…… 지쳤어요. ……지겨울 뿐입니다.”

    태욱은 덤덤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뒤 깍듯하게 목 인사를 건네고 별채를 빠져나갔다. 필성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수족인 박 비서가 뛰어 들어와 그의 안위를 살피며 깨진 물건을 치울 때도 그는 무거운 눈을 뜨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일 수도 있었다. 태욱은 이미 모든 걸 빼앗겼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으니. 마지막 하나까지 그가 뺏어 버린 게 되었으니. 그러니 태욱은 자신마저 재물로 올려놓고 이슈로 만들어 버렸다. 제 얼굴이 짓밟히는 것 따윈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어딘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그 끝이 어디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꾸만 떠난 아들이 꿈에 나왔고, 수시로 태욱과 겹쳐 보였다. 필성은 호흡을 길게 이어 가지 못하고 서랍 속 약을 찾았다.

    ○ ◆ ○

    “아직 퇴근 안 했어?”

    서영이 마지막으로 퇴근하며 사무실 불을 끄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섰다. 마침 그녀가 남아 있어 다행이라는 것처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려고요.”

    서영은 짧게 대답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태욱이 보낸 문자의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버티듯 회사에 남아 일거리를 찾아 컴퓨터 화면에 올려놓았지만 제대로 진도가 나갈 리 없었다. 생각할수록 어려워진다는 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잠깐. 나도 서류만 놓고 나갈 거야.”

    지훈이 서둘러 대표실로 들어갔다. 서영은 잠시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불을 끄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니. 그는 곧장 대표실에서 튀어나와 서영을 대신해 뒷정리를 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지훈은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지하철 타면 더 빨라요.”

    서영은 곧바로 거절했다. 지훈은 참 대단한 철벽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서영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엘리베이터의 숫자판만 바라봤다.

    “지금까지 일하게 만든 게 미안해서 그래.”

    지훈도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약속이 있어요.”

    “그래? 그럼 거기까지 데려다줄게.”

    “……선배.”

    서영이 대표님이 아닌 선배라 부르자 지훈은 진지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설마, 했던 무수한 추측과 망상들이 현실이 되어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손태욱의 가십들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지유린과의 결혼 발표와 속도위반 소식이 어쩌면 그에게 기회일 것이라 생각하며 가졌던 희망을 산산조각 내듯, 서영과 태욱의 재회를 의미하는 상황이 곧장 수면 위로 올랐다. 인터뷰가 성사되었다는 문자가 그 뜻 같아서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 써 붙일 수 없었던 걸까. 지훈은 타들어 가는 가슴을 애써 모른 척하며 확인 사살하듯 물었다.

    “다시 만나니?”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버렸다. 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서영에게 닿아 있었고, 서영은 열린 문 너머를 바라봤다. 태욱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서 있었다. 곧 서영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녀를 보고 있음에도 태욱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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