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호가 아니라 복수 (4)
휴게소를 발견하고 차를 세울 때까지 서영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태욱은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감정이 뒤섞이고 만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가도 지겨운 풍경들뿐이었을 테고. 게다가 등산을 하느라 노곤해진 몸으로 따뜻한 봄 햇살의 공격을 이겨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
태욱은 차의 시동을 끈 채 옆자리의 서영을 바라봤다. 관찰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한동안 보지 못한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그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변한 것은 짧아진 머리카락 정도였다.
이별했다고 가차 없이 싹둑 잘라 버린 걸까. 헤어스타일을 바꾼 것만으로도 그는 감정이 요동쳤다. 이것은 그리움이 낳은 상처인가. 이별을 통보받은 자의 억울한 심보인가.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또 그만큼 미웠기에 태욱은 행동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가 없었다.
“윤서영…….”
이름을 불러도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대담하게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던 동작이 어느 순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시야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잠든 척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그런 태도는 그를 또다시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 속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만큼 싫고 불편한 것이다. 생각의 결론은 언제나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희망적이라 누가 말했나. 그 사람은 사랑의 처절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태욱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손을 거두고 차 문을 한 번 열었다 닫았다. 그러자 천천히 눈을 뜬 서영이 경계심 없이 운전석을 바라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참 잘 속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놀린 태욱이 이번엔 진짜로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반쯤 몸을 숙여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서영에게 간단히 말했다.
“밥 먹고 갑시다.”
문이 닫히고 서영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태욱의 뒤를 졸졸 따라가 도착한 휴게소 안은 없던 식욕도 생겨나게 할 만큼 유혹적이었다. 그는 무인 자판기 앞에 서서 자신의 메뉴를 먼저 고르고 뒤돌아 서영을 바라봤다.
“뭐 먹을래요?”
간단하고 당연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왜 그렇게 가슴을 쳐 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의 표정과 행동에 다정함은 없었다. 그녀만 알고 있던 강태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것에도 감정을 주지 않는 강 팀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에도 서영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돈, 돈가스요.”
“치즈?”
태욱이 다시 화면을 보더니 되물었다.
“아, 네.”
주문과 계산은 재빠르게 이뤄졌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차 안에서처럼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태욱은 서영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내 내려다봤다.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서영도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34번 고객님.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기다리던 멘트였다. 서영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지고 올게요.”
혼자 다 들 수 있느냐 묻기도 전에 그녀는 음식을 받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태욱은 또 한 번 쓴웃음을 내놓았다. 불편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그녀에게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영이 향한 곳으로 다가갔다. 식판 두 개를 다 들 수 있는 힘은 예전부터 없었다.
“아, 제가…….”
“누가 보면 애인이 쓰레긴 줄 압니다.”
서영이 들기도 전에 식판이 태욱의 손에 들렸다. 그는 식판을 두 개나 들고도 아무렇지 않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방금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애인. 쓰레기. 서영은 잠시 멍한 상태가 되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태욱이 자리에 앉고 어서 오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을 때에야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다이어트했어요?”
“네?”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태욱이 물었다. 그는 서영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음식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서영은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살이 더 빠진 거 같아서 묻는 겁니다.”
“아…….”
또 멍청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태욱과 함께 있는 한 이건 고칠 수 없는 행동인 걸까. 나름 냉정하고 이성적인 척을 했지만 그게 몇 번을 가지 못했다. 그가 하는 얄미운 장난질에 보기 좋게 당하는 건 이별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먹어요.”
태욱은 자신의 식판에 있는 고기를 덜어 서영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불고기덮밥을 시킨 이유가 이것이었나. 서영은 또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태욱은 아무렇지 않게 밥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시선은 여전히 식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어선 서영은 세수부터 했다.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사귀었던 사이라고 해도 편안하게 잠들어 버리다니. 지선이 들으면 역시 대단하다며 엄지손을 들어 보일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선 일어날 타이밍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처음엔 쪽팔려서 그랬지만 어느새 그의 시선이 그리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의 손이 다가오다 멈춰 버린 순간, 왜 아쉬움이 찾아왔는지 알 길이 없어 서영은 다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식혔다.
“……휴.”
눈가는 또 멋대로 젖어 버렸다. 참, 답도 없다. 자신에게 속삭이고는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멈춰졌다. 화장실 앞에 서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모델같이 큰 키에 슈트까지 차려입은 남자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기 충분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 서영은 간단히 생각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왜 여기 계세요?”
서영의 물음에 태욱이 뒤돌아섰다. 그녀의 추측과는 다르게 그의 눈빛엔 불안과 안도가 동시에 스쳤다. 뒤늦게 그의 행동과 표정의 뜻을 알아차렸다. 설마, 도망이라도 가 버렸다 생각한 걸까. 어쩌면 그럴 수 있지. 화장실을 가겠다고 분명 말했었다.
“너무 안 나오기에…… 괜찮으면 갑시다.”
태욱은 감정을 들킨 게 못마땅한지 곧바로 돌아서 걸었다. 서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먼저 헤어짐을 고한 사람은 모르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돌아서 잊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기다린 적은 없었다. 헤어진 뒤 그리워하긴 했어도 버려졌다는 생각을 하며 쓸쓸하고도 절박한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녀는 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그저 화장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 그의 작은 행동 하나가 서영의 죄책감을 또 한 번 깊게 들쑤셨다. 그녀의 감정을 읽어 버리기라도 한 듯 그가 뒤돌아섰다. 태욱의 눈빛이 깊어지자 서영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 보인 건 공교롭게도 호두과자였다.
“호두과자 드실래요?”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되는 것이다.
“배부른 줄 알았는데?”
태욱이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밥 먹는 배랑 간식 배는 달라요. 또 휴게소 하면 군것질거리 먹는 재미잖아요. 올라가는 길에 출출할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사 갈래요? 이건 제가 살게요. 이사님이 밥값 내셨잖아요.”
그 음식값에 대한 보답으로 의도치 않은 지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영은 더 이상 우울하고 불편해하는 자신을 태욱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뭐든 하겠다고 말한 건 그녀였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뻔뻔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리, 오다리도 먹을까요? 맞다, 알감자도 사야 하는데.”
태욱은 졸지에 손이 부족할 정도로 주전부리를 든 채 서영의 뒤를 지키고 서 있어야 했다. 티브이 광고에서 본 적 있는 남자가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으니 그를 주시하던 몇몇 사람들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하나둘 사라져 갔다.
“식탐은 여전하네.”
보다 못한 태욱이 서영의 앞을 막아섰다. 소시지 떡꼬치를 사려던 서영이 고개를 들어 태욱을 바라봤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의 손엔 더 이상 빈 공간이 없었다.
“아, 사다 보니까…….”
“마실 것만 사서 갑시다.”
태욱은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며 커피숍 쪽으로 향했다. 서영은 어쩐지 예전 강 팀장일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다시 돌아선 그가 안 오고 뭐 하느냐며 눈에 힘을 줄 때는 미소가 쏙 들어가 버렸지만 어느 정도 작전은 성공한 것 같았다.
“살 빠졌다고 말해서 시위하는 겁니까?”
커피를 사서 나와 앞장서 걷던 태욱이 물었다.
“이걸론 제대로 찌지도 않아요.”
“다 먹을 자신은 있고?”
“같이 먹으면…… 되잖아요.”
서영이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배불러.”
그가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듯 말하곤 운전석 앞에 멈춰 섰다. 서영은 그가 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눈으로 왜 그러느냐 묻자 태욱은 눈짓으로 자신의 바지 주머니 쪽을 가리켰다.
“차 리모컨.”
“아…….”
그가 들고 있는 물건들은 잠시 어디든 내려놓으면 될 텐데.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태욱의 의도를 알았다. 그녀를 놀리고 싶은 거겠지. 서영은 이런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태욱이 가리킨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넣어 차의 리모컨을 찾았다.
어쩐지 조금은 민망했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얼른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 고개를 드는데 태욱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당황해 움찔하는 서영을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꺼냈어요. 열림 버튼이 어느…….”
“안 눌러도 이미 열렸어. 자동 기능이라.”
“……네?”
“그러니까 문만 열어 줘요.”
태욱이 싱긋 웃었다. 그제야 서영은 상황 파악이 되었다. 요즘 기능 좋은 차들은 리모컨이 가까이 다가가면 저절로 문이 열린다는 것을. 평소 운전을 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알 리가 없었다. 서영은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것도…… 복수예요?”
“……그럴지도.”
그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든 것들을 차 지붕 위에 올려놓고 문을 열었다. 다시 간식거리들을 옮겨 넣고 서영이 가진 것들까지 빼앗아 가져다 놓았다.
“아직…… 제대로 된 복수는 시작도 안 했어.”
그가 서영에게 다가와 잠시 뺨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