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8화 (58/75)

18. 보호가 아니라 복수 (3)

“정애 보살님이요?”

“네.”

“……잠시만요.”

한참을 절 입구 앞에 서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본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나서던 한 보살님을 발견한 태욱이 문 앞에서 꾸벅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경계의 눈빛을 보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어머니가 머무는 절은 여자 스님들만 지내는 곳으로 남자는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한 번도 입구 앞까지 올라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산사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었다. 운이 좋아 산을 구경하러 나온 어머니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돌아갔었다. 정애가 그를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태욱은 기다리는 내내 주머니 속의 담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꺼내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간절했다. 언제나 그의 흡연을 걱정하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자식에게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애가 유일하게 예민하게 굴었던 게 그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태욱은 더욱 이 담배를 끊지 못했다. 어린 마음이었고, 어려운 감정이었다.

“스님이…… 오늘은, 귀인들이 많이 올 것이라 하시더니.”

고개를 돌린 채 산 아래만 바라보고 있던 태욱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애는 오랜만에 가까이 마주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딱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밝게 웃어 주었다.

“잘…… 지내셨어요?”

끝내 첫 물음은 누구에게나 하는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무뚝뚝한 아들이 변할 리 없었다. 어머니와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태욱은 정애의 어깨 너머에 있는 불당만 바라봐야 했다.

“그럼. 좋아. 아주…… 좋아.”

정말 그렇게 보였다. 태욱의 추측이 맞았다. 그녀는 아들 때문에 필성에게 쫓겨나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이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한때는 그녀가 믿는 종교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인내하는 어머니가 대단해 보이기보단 더욱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그러질 못했으니. 어째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원망조차 못 한 채 마음을 닫아 버렸다.

“고모가 가 보라고 했니?”

태욱에게서 더 이상 말이 없자 정애가 입을 열었다. 아들이 찾아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가냐고. 어디로 가냐고. 왜 말해 주지도 않느냐고. 꼭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야만 하냐고 울면서 따져 묻던 은림의 얼굴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오늘도 오랫동안 새벽 예불을 드려야 했다.

“고모는,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죄 없는 사람이잖아요. 어머니가 필요하고.”

“태욱아.”

“제가 찾아와서 그러신 거 알아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필성이 어떤 보고를 받고, 정애가 누구의 뜻에 의해 이러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강’이 아니라 ‘손’이 되었고, 유신건설을 넘겨받으려면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 정애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이곳에 온 것이지만, 은림도 태욱도 그녀를 잊지 못해 찾아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면 필성은 또 다른 칼을 빼 들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모는 만나세요. 뒷일은 제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아셨죠?”

결국엔 제삼자를 위한 대화뿐이었다. 아픔을 삼키는 게 너무 익숙해진 모자라 늘 이런 끝맺음이었다. 태욱은 누구를 탓하겠는가 생각하며 정애 앞에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 걸으려는데 어머니의 손끝이 그에게 닿았다. 태욱의 걸음이 멈췄다. 정애가 태욱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 아가씨 맞지? ……그렇지?”

태욱은 어머니의 질문을 단번에 이해한 자신이 우스웠다. 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애는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 기도하듯 두 눈을 감았다.

“다행이야.”

정애는 서영을 떠올리며 감사해했다. 하늘이 이렇게도 돕는구나. 그동안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절을 올린 게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받는 순간이었다.

다시 눈을 뜬 정애는 연신 태욱의 손을 쓸어 냈다. 그도 이번만큼은 부끄러워 밀어 낼 수가 없었다. 잠자코 시선을 내린 채 어머니를 눈에 담았다.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는 저절로 묻게 되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정애가 금방 웃어 버렸다.

“태욱아, 엄마는…… 네가 그렇게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그 여자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였구나. 태욱은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어머니의 마음까지 얻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끌렸고, 모든 걸 걸어 버렸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만신창이가 되었고 뒤늦게 어머니를 사랑한 아버지를 절절한 가슴으로 이해하는 멍청한 아들이 되었다.

“여기 와서…… 많이 아파했어. 너한테 항상 미안해했고. 날 찾아온 것도 그것 때문 아니겠니? 그건…… 태욱아.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 엄마 말, 알아듣겠지?”

꼭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머니는 태욱의 생각을 읽었다. 그렇게 위로하고 품어 준 날들이 태욱을 자라게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 서영이 가득 차고 예뻐 보였던 게 모두 어머니 정애의 모습을 닮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갈게요. 들어가세요.”

불당 쪽에서 스님이 걸어 나오는 걸 본 태욱이 정애의 손을 밀어 냈다. 쑥스러워하는 아들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태욱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길을 내려갔다. 아들을 보던 그녀는 안심하듯 뒤돌아섰다.

태욱이 등산로를 걸어 내려와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차바퀴에 가려져 앉아 있던 여자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가 멈춰 서 그녀를 바라봤다. 서로 대치하듯 서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러기를 한참, 태욱은 서영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서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태욱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수많은 물음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았고, 놓으려 하면 눈앞에 나타나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또다시 두통이 차올랐다. 답답함에 눈이 뜨거워진 순간, 그는 손으로 핸들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다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영이 다가와 그와 마주 섰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눈가엔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웃음이 났고, 마음이 아팠으며, 그럼에도 이 순간이 미치도록 감사하고 절실해져 버렸다.

“윤서영.”

태욱이 그녀를 불렀다. 서영은 결국 포기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잠시 후, 울음을 삼킨 얼굴로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사람 가슴을 쥐어짜는 법을 어찌 이리도 잘 아는지. 태욱은 심장이, 숨통이, 턱턱 막혀 왔다.

“원하는 게 뭐야?”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그러면 다시 돌아와 줄 것인가. 네가 말한 대로 어머니를 데려오고 평범한 강태욱으로 산다면 그땐 옆에 있어 줄 수 있는가. 그러지도 않을 것이면서 그녀는 바랐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 그것만은 안 된다고 빼놓은 채. 악덕한 거래처가 따로 없었다. 사업은 머리를 쓰면 되지만, 이건 제멋대로인 가슴이 시키는 일이라 그의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뭐든……, 할게요.”

서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과는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뭘 시킬 줄 알고. 뭘 원하는 줄 알고. 대책이 없는 이 여자는 그를 나쁜 놈으로 만들었으며, 끝내는 자신이 모든 걸 잘못했다고 손을 놓아 버렸다.

“이러면…… 내가 또 널, 이용 못 할 것 같아?”

그가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내도 서영은 끄떡없었다.

“…….”

“그래요. 원하면 그렇게 합시다. 뭐든 한다고 했으니, 내가 다 포기하고 한 여자만 지키겠다고 저당 잡힌 인생, 다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도록 좀 도와줘요.”

무슨 말인지 몰라 서영이 눈빛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게 당신이 죄책감을 갖는 이유 아닌가? 방법이야 쉽지. 내가 윤서영을 다시 만나도 예전처럼 머저리같이 굴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면 되지 않겠어요?”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뒤흔들어도 여자는 답이 없었다. 널 다시 이용하겠다는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전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해도 괜찮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셈하면 결국엔 태욱 자신이 무너져야 할 것이다.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함부로 굴었던 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요.”

뒤늦게 남의 일처럼 서영이 대답했다.

“그럴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언제는 도망치지 못해 안달하더니, 이제는 죄책감 하나에 이리도 쉽게 본인의 자존심을 접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안다. 그도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예전 상처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겠지. 모든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라서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태욱은 당연한 것처럼 서영의 손을 붙잡고선 차에 태웠다.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다시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차 문을 닫자 정적이 일었다.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쏟아 낸 적 없었던 것처럼 차 안은 고요했다.

“이사님.”

서영이 입을 열자 태욱이 막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많이 심하세요? 저한테 지금 약…….”

놀란 표정으로 급하게 등산 가방을 뒤지는 그녀를 그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그러다 잠깐 눈을 감고 웃어 버렸다. 이미 약은 먹었다며 그의 약통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수십 알의 약이 들어 있는 이름 없는 플라스틱 통이 서영의 가슴을 어떻게 찢어 내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태욱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고, 천천히 산사를 벗어났다. 굳은 표정으로 운전대만 붙잡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서영은 또 한 번 자신의 이기심을 깨달아야 했다. 거짓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그를 마주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은림의 말을 듣고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돌아서 가야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산사 앞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그녀와 손을 붙잡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런 그를 두고 혼자 먼저 가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들은 다 핑계일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직도 그와 이별하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운명이 그런 것처럼. 보살님의 아들이 그녀가 사랑한 남자라는 것을 알아 버렸듯이. 원망이, 미련이, 사랑이, 모두 뒤엉켜 버린 채 앞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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