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호가 아니라 복수 (2)
주말 아침 일찍부터 수신된 문자를 확인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등산복이었다. 하아……. 태욱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웃어 버렸다. 일주일째 퇴근하지 않은 채 회사 이사실에서 밤을 지새웠다. 몰아치듯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서영의 사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떠올라 두통이 찾아들었다.
한때는 그 여자만 보면 병이 나았었는데, 이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예전 같을 줄 알았나. 그런 오해의 단서들을 흘려 놓고도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며,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올 거라 착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흘렀다. 모른 척했다. 그에게 선을 긋듯 내뱉은 말에 복수라도 하듯이. 그가 지금의 위치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흔들림 따위 없었다. 그의 개인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으며, 은림에게선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어찌 보면 그녀는 태욱의 고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요즘 가장 웃을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네.”
태욱이 창밖을 내려다보며 간단히 대답했다.
― 집엔 안 들어올 생각이야?
은림의 목소리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누구 좋으라고요.”
그의 대답에 핸드폰 너머에선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구의 속은 썩어 들어가는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은림이 어제 서영을 불러 식사를 했다는 건 문자로 보고받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는 뻔했다. 정애가 있을 때도 은림은 꼭 자신이 태욱의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 이유가 모두 아버지에 대한 못다 한 애정과 허망하게 보내 버린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그녀를 뒤흔들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 어제 서영 씨 만났어.
“…….”
― 태욱아.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은림의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해졌다.
“고모 원망 안 합니다. 그 여자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그만하셔도 돼요.”
은림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이제는 안쓰러울 정도였다. 필성 또한 그녀의 이런 행동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차지하고 있는 자리까지 내놓아야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지금이야 태욱이 총알받이가 되어 주고 있지만 언제고 다시 판이 뒤집힐지 몰랐다.
필성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철민 또한 어느 순간 다른 칼을 들고 위협해 올지 몰랐다. 손씨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라면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했으며 모두를 적으로 보는 게 자신이 살길이었다.
― 내 걱정 해 주는 거야?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인데?
은림은 또 그녀만의 방식으로 웃어넘겼다.
“진심으로 드리는 충곱니다.”
― 나도 진심으로 충고 하나 하자. 네가 아픈 것도 알겠고, 힘든 것도 알겠는데, 널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마. 내가 경험자로서 하는 얘기니까 흘려듣지 말고. 끊는다.
뚝. 대답을 할 새도 없이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태욱에게선 싱거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은림이라도 옆에 있기에 견디는 걸까. 그녀가 아침밥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본가에 들어와 사는 이유가 그의 또 다른 한숨으로 남아 버렸다.
‘널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마.’
은림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자 태욱은 견딜 수 없어 몸을 움직였다. 슈트의 재킷을 챙기고 이사실을 벗어났다. 그러자 주말까지 출근해 대기 중이던 비서 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준비 태세를 보였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개인 볼일이 있습니다.”
태욱이 재킷에 팔을 집어넣으며 간단히 말했다. 주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알려 주지 않았던 스케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주한은 필성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선 같이 움직여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여태껏 개인 볼일이라면 절에 다녀오는 것밖에 없었다.
“앞까지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주한이 포기하지 않자 잠시 멈춰 선 태욱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머니 뵈러 갑니다.”
“아…….”
지금껏 그의 앞에서 ‘어머니’란 말을 입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놀란 주한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태욱은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잡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공간에 홀로 남게 되자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흘렀다.
어머니라니. 진심이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어머니를 데려오라며 눈물을 보이던 여자가 떠올라 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를 위해서 필성 앞에 무릎 꿇던 자신도. 모두 지난 일인데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신이라도 난 것처럼 가벼웠던 발걸음이 어느새 돌을 매단 것처럼 무겁게 떼어졌다.
이제 와 확인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그 절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우연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면. 태욱은 스스로에게 건넨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를 뒤흔들어 무엇이든 확인하고 나면 후련해질까. 어떤 말을 하든 수긍할 자신은 있는가. 답은 없고 물음만 이어졌다.
사랑은 어느새 집착이란 병이 되어 그를 갉아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자신만 모른 채 병신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차에 오른 태욱은 주머니에 넣어 둔 약을 꺼내 입에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산사는 늘 적막하고, 쓸쓸했다. 이렇게 속세와 단절된 곳에서 도를 닦으면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절을 찾았고, 방 안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태욱은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정애와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된 것도 그때쯤일 것이다. 그녀가 부처님에게 의지하며 삶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버려 나가고 있다는 걸 태욱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그가 태연하게 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영에게 어머니를 데려오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그리움까지 삼켜야 했다. 그것은 결국 그녀를 향한 미움이었고, 원망이었으며, 다른 의미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산사 입구에 서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사람. 태욱은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마치 진짜 모녀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등을 쓸어 내 주는 두 사람을 바라봐야만 했다. 실제가 아니길 바랐던 치기도, 진짜가 되었으면 하는 미련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서영이 다시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돌아섰다. 핸드폰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태욱은 고개를 내렸다. 어서 차에 올라타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것까지만 확인하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온 것이지 않았나.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결국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하고 말았다.
“이것도…… 우연이에요?”
덤덤하게 물었지만 애써 화를 꾹 참는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젠 안 믿는다는 얼굴이네요.”
태욱은 다시 가면을 써 버렸다. 그것이 그의 특기니까.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니. 그저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 그녀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미행한다는 거 알아요.”
그녀의 시선을 받아 내기 버거워 신발의 앞코만 내려다보고 있던 태욱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의 화질이 흐릿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엔 이 눈치 없는 여자에게까지 들키는 걸 보니 경력을 속인 돌팔이가 확실해 보였다.
“궁금했어요. 날 버리고, 어떻게 사는지.”
뻔뻔함은 여지없이 그의 진심을 다른 뜻으로 바꾸기에 적절했다. 그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가 그녀를 무시할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든 위협받지 않도록 보호해야만 했다. 그런 구구절절함이 이유가 되는 것도 우스워지고 말았다.
정말 그가 한 대답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알고 싶긴 했다. 자신을 버리고 조금도 아파하지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다 잊은 얼굴로 나타나 그를 뒤흔들면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 어떤 모습이든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천에 있을 땐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서영은 달라졌다. 예전처럼 그의 말에 속지 않았다. 태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이러는 건, 또 제가…… 아니, 이 말만 드릴게요.”
“…….”
“이제 더 이상 보호해 주실 필요 없어요.”
제발 꺼지라는 소리를 아주 다정한 말로 되돌려주었다.
“보호가 아니라 복수란 생각은 왜 못 하지?”
결혼 발표와 의도적으로 흘린 가십들까지. 철민과 유린에게 앙심을 품고 대갚음하려는 마음에 윤서영이 아니었다면, 그 단서가 꼭 따라붙었다는 걸 태욱은 이제 와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 모든 것이 어떤 희망을 위해서인지 그 누구보다 윤서영이 잘 알 것이라 확신했다. 그랬는데, 그는 그런 마음들뿐인데. 서영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생각뿐이었다. 끊어 내려고만 하는 마음 앞에서 원망을 넘어선 독기가 품어지기도 했다.
“복수,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전 괜찮아요.”
이것만은 여전히 윤서영다웠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태욱은 눈동자를 차갑게 바꿨다.
“복수는…… 내가 아니라, 지금 윤서영이 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가 산사를 올려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영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알아챈 듯 또렷해졌다. 정말 우연이었던 것인가. 정애의 존재에 대해 이제야 알게 된 듯한 서영의 표정에 태욱은 허무함을 느꼈다.
“몰랐었다면, 그게 더 확실한 복수겠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차 앞에 멈춰 서 문을 여는 순간 그를 다급하게 붙잡는 서영의 손길이 느껴졌다. 태욱이 돌아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안…… 만나고 가세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너는. 너란 여자는. 태욱은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여자의 동정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이제 와 제 손으로 꼭 모자의 상봉을 이뤄 내고 말겠다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보자 태욱은 더욱더 비틀어진 감정이 솟구치고 말았다.
“내가 어쩌든 상관할 이유 있습니까?”
태욱은 냉정하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내쳤다. 갈 길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그렇게 상처를 받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다시 되풀이하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를 잡고 더욱 다가왔다.
“다른 곳으로 떠나신대요.”
꽉 잡은 손. 울음을 참는 눈. 아픔을 감추기 위해 깨문 입술까지. 태욱은 서영이 자신을 고문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 이러는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뭔지.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답은 절대 아니겠지.
“아직도,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나?”
“네. 제 죄책감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산에 올랐고, 우연히 보살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사님 얼굴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서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아니, 티 나게 이사님 얘기를 털어놨어요. 내가 그 여자인 줄 아시면서도 안아 주셨고, 위로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진짜예요. 지어낸 말이 아니라…….”
“…….”
결국 눈물은 저절로 뚝뚝 흘러내려 서영의 얼굴을 적셨다. 태욱은 더 이상 그녀를 지켜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끝내 본인의 죄책감을 덜고 싶은 것이라면 응해 주면 그만이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또 다른 죄가 이 여자를 울게 만드는 게 싫었다.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