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6화 (56/75)
  • 18. 보호가 아니라 복수 (1)

    일주일이 지났지만 유신건설 홍보 팀에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에겐 아쉬운 게 없는 것처럼 선을 그었지만 실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닐지도 몰랐다.

    서영은 얼마 전 만남을 떠올렸다. 또다시 이끌려 갈 게 뻔한 그림이라 그랬을까. 먼저 헤어짐을 말하고 돌아선 것은 그녀였지만 여전히 그 남자에게만은 변함없이 약자인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다가오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웃어 버리는 남자. 감당하지 못할 게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거절의 이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원망이었다. 결혼 발표에, 혼전 임신까지. 그 모든 걸 생중계로 전해 듣도록 했으면서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니. 아무리 끝난 관계라 해도 서영에겐 한순간에 모른 척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오해를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헤어졌고, 지금 그의 옆자리엔 다른 여자가 있었다. 자신의 애인이 옛 연인을 다시 만나 웃고 떠드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서영은 그 옛날처럼 당하지 않아도 될 수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 아까 점심때 윤 대리 찾는 전화 왔었어요.”

    “네?”

    서영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자리의 가현은 그녀의 반응이 부담스러워 의자를 조금 뒤로 밀며 몸을 물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영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미안할 정도였다.

    “유신…….”

    “유신이요?”

    서영이 이제는 아예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트센터…… 관장이요. 윤 대리 전화가 안 된다고 해서.”

    가현의 말에 서영의 얼굴 위로 실망감이 쏟아졌다. 그 전화라면 서영의 개인 번호로도 여러 번 수신되었다. 나눌 대화는 뻔했다. 인터뷰는 언제쯤 진행되느냐는 것이겠지. 핑계를 가져다 대는 것도 더 이상은 힘이 들었다.

    “대표님, 다녀오셨어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지훈이 들어섰다. 그는 요즘 자신의 집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배려해 자신이 혼자서 해결하겠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일의 진행 속도가 거북이걸음이었다.

    서영은 어쩐지 눈치가 보여 몸을 움츠리며 지훈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잠시 서영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알은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지금 여러 감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일이 잘 진행되어도 신경이 쓰였을 테지만, 지금처럼 꽉 막혀 있는 것도 답답할 것이다.

    “저, 외근 좀 다녀올게요.”

    지훈이 집무실로 들어간 걸 확인한 서영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은림과의 인터뷰부터 진행하는 게 맞는다는 결론이었다. 태욱의 섭외가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누구에게 들었던 말인가 생각하다 서영은 가야산 자락을 떠올려 버렸다. 이번 주말엔 보살님이라도 보러 갈까. 해답은 얻지 못할지라도 그녀를 만나고 오면 자책감이 줄어들고 마음은 편안해졌으니까. 서영은 힘을 내듯 걸음을 내디디며 아트센터로 향했다.

    “맛이 어때요?”

    “너무…… 맛있어요.”

    정말 그랬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은림이 데려간 레스토랑의 프랑스 정식은 서영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최고의 맛이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맛있는 음식을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이때만큼은 잠시나마 걱정을 잊게 되었다. 그러자 또 불쑥, 어느 한때가 떠오르고 말았다.

    ‘스트레스 쌓였을 땐 잘 먹는 게 최고란 말이에요. 이 삼겹살 노릇하게 구워서 비빔면이랑 같이 먹으면…… 오늘 있었던 일 다 잊고 꿀잠 자게 될걸요?’

    그때의 서영이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태욱을 바라봤다. 지유린을 만나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은 이후였지만 그 남자가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게 잊혔다. 그는 그녀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으며 이유조차 묻지 못하게 했다. 그 순간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설레게 했고, 들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의 시간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서영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 버렸다.

    “……서영 씨!”

    “네?”

    서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은림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밥이라도 제대로 된 곳에서 먹이고 싶었다. 태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선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젠 태욱보다 서영에게 더 마음이 가 버렸다. 하지만 이유를 묻는다면 설명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은림이 웃으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 녀석 생각했어요?”

    서영의 눈동자가 그렇다고 인정하듯 세차게 흔들렸다. 은림이 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곧 긴 이야기를 꺼낼 것처럼 은림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홍보 팀에 연락은 넣었고, 손 이사가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건 전해 들었어요.”

    서영은 그대로 얼음이 된 채 변명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애초부터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은림의 위치라면 모르고 싶어도 들리는 게 있을 것이고, 알고자 한다면 못 알아낼 게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태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욱이와 관련된 기사들 서영 씨 입장에선 충분히 오해할 만한 내용이에요. 그런데 난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더라고요. 왜냐면……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은림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저 추측일까. 아니면 진실을 알아본 걸까. 궁금하지 않다고 무시하려 했지만 더 이상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영은 한참 만에 물었다.

    “어째서요?”

    “만약 진짜라면…… 우선 태욱이가 인터뷰 건으로 줄다리기를 할 이유가 없을 테고. 본가 마당에 있는 벚꽃나무들을 거슬린다는 이유로 죄다 없애 버리지도 않았을 거고. 또 서영 씨가 다녀간 날 아트센터 앞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벚꽃을 구경하지도 않았을 테고. 안 온다던 리조트 행사에 무리하게 스케줄을 바꿔 가면서까지 참석하지도 않았겠죠.”

    은림은 숨겨진 이야기를 말하며 산뜻하게 웃었다. 서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벚꽃나무들, 센터 앞, 리조트, 그리고 어쩌면…… 조리원까지. 뒤늦게 알게 된 그의 행동들이 가슴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맴도는 것 같았다. 너무 빨리 그녀를 지운 듯 보인 그에게 염치없이 서운해하던 심장이, 바보같이 그녀를 기다리는 그 때문에 먹먹하게 조여들었다.

    “나도…… 다시 그 녀석을 만나 달란 말은 못 하겠어요.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또 누가 어떤 일을 꾸밀지도 모르죠. 서영 씨가 더 고통스러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뻔뻔해지는 이유는…… 다 나 때문이에요.”

    은림이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흐리게 웃었다.

    “아무래도 병일 거예요. 죽은 작은오빠와 태욱이를 겹쳐 보는 건.”

    실체 없는 두려움이었고, 극복해야 할 상처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본가에 들어가 사는 이유도 그거예요. 유령처럼 걸어 다니는 그 녀석을 볼 때마다 불안해 미칠 것 같아요. 내 감정을 이해해 달라는 것도 미친 짓이라는 거 알아요.”

    서영은 그녀의 불안을 모른다 말할 수 없었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저절로 공감하게 만들었다. 서영은 은림을 만날 때마다 이유 없이 생겼던 동정심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냥…… 이것만 부탁하고 싶어요. 조금 덜 아파할 때까지만. 서영 씨가…… 그 녀석, 미련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미련. 어쩌면 그 단어가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에겐 이미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어떤 감정으로든 남아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증오든 복수든, 의미 없는 미련이든. 그러면 그 시간 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

    서영은 끝내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 ◆ ○

    휴일이었다. 등산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서영은 큰길까지 걸어 내려가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오늘에서야 그녀의 뒤에 따라붙는 수상한 차를 인지했다. 유리창이 검게 선팅된 데다 운전석도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한 번씩 스쳐 갈 때가 있었다. 그 초점의 주인공이 그녀일 줄은 모른 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일이었다.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야. 그 일을 겪고, 인천 집에 내려가 우편함만 보며 덜덜 떨던 윤서영은 다른 사람 같았다.

    서영은 자신을 미행하는 차를 개의치 않고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 도착해 가야산으로 향하는 표를 끊었다. 늘 그래 왔듯이 생수 한 병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에너지바를 샀다. 차에 오른 후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시 한번 버스를 갈아타고 절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서 내렸다. 천천히 그녀만의 속도로 산을 올랐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불당을 찾았다. 자리를 잡고 절을 올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마음이 절로 편안해지는 걸 보니, 보지 않아도 보살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서영이 절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보살님이 같이 웃어 주었다. 두 사람은 짧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런 뒤 보살님의 손에 이끌려 달고 맛있는 밥을 먹었다.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고 절을 빠져나가기 전, 보살님이 며칠 후 이 절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디로 가시냐는 물음은 꺼내지 못했다. 서영은 그녀에게까지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메고 절 입구를 나서는데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깜박하고 꺼 두지 못했다. 서영은 화면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산? 갑자기 거긴 왜?

    “마음이 답답해서요.”

    지선이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쏟아 내듯 말을 꺼내 놓았다. 속도위반, 그거 아니래. 아니, 아닐 거야. 확실해. 그렇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자기야. 절을 벗어나 흙길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서영은 동요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귀에 대고만 있었다. 자기야. 자기야, 듣고 있어? 어느새 지선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등산로 입구에 서 있는 한 남자만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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