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5화 (55/75)
  • 17. 또 속는 바보는 (4)

    태욱은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서류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바라봤다. 사진 몇 장이 첨부된 짧은 문자였다.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다는, 추리력을 동반해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보고들. 간단히 말하면 서영의 뒷조사였다.

    결국엔, 이런 식의 뒤틀어진 방식만이 그 자신에게 용납되었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어쭙잖은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서 말이다. 손 회장이 붙인 비서 주한이 서영에 대한 보고를 숨길 의무는 없었다. 아무리 그를 동정해 헷갈리는 눈빛을 보인다 해도 주한의 고용인은 필성이었다.

    손 회장이 헤어짐을 조건으로 내건 적은 없었다. 서영이 알아서 떠나 주었고, 필성은 태욱에게 그 어떤 압박도 하지 않았다. 지유린과의 결혼을 입에 올린 것도 태욱 자신이었다. 그 뒤로 따라붙은 가십들의 진실 또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필성은 그저 가만히 손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욱이 지금 하는 행동 또한 복수의 일환이고, 미련이란 걸 모를 양반도 아니었다. 한 번씩은 그 모든 것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싶은 욕망이 들끓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이유가 아니어도 뒤흔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게 필성이든, 서영이든, 그 자신이든.

    태욱은 눈을 감았다 뜨고는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방을 벗어나자 2층 독채에 나와 있던 은림과 마주쳤다. 주말에 더 바쁜 사람이 웬일로 편안한 로브 차림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랜만에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어디 가?”

    “어디 가겠습니까?”

    주말 구분 없이 일하는 건 태욱도 마찬가지였다. 서영을 리조트에서 마주친 이후, 감옥 같은 이사실에 갇혀 있는 것이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눈만 감았다가 뜬 새벽녘 책상 앞에 앉은 후 일어난 게 지금이었다. 벌써 창밖에서는 해가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했는데.”

    아침부터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태욱이 은림을 바라봤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왜 또 불안하게 흔들리시나. 묻지 않아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나, 태욱이나, 절에 다녀오면 치르는 후유증이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은림은 놀라워 웃음부터 터뜨렸다. 한 번씩 눈치 빠른 태욱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 저 자리를 저렇게 지키는 걸 보면 난놈은 분명해 보였다.

    “다른 곳으로 옮긴대.”

    “그래요?”

    태욱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거기가 어딘진 안 가르쳐 줄 생각인가 봐.”

    덤덤히 말했지만 은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오랜만에 마신 알코올의 부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막막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미련을 버려요. 그게 쉽진 않겠지만.”

    태욱은 자신이 말해 놓고 우스워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뛰쳐나가려던 곳이 어디인지 분명했다. 스토커처럼 그 여자의 사진을 모으고 있으면서 아닌 척을 했다.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지우지 못했으면서 벌써 떠나보낸 사람처럼 여유로운 가면을 썼다.

    “그래. 미련 같은 거 없는 태욱아.”

    은림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잘 다녀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섰다. 휘적휘적 손을 흔드는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태욱은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서영이 도착했다는 장소였다. 그의 발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걸…… 네가 샀다고?”

    조리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훈재를 불러냈다. 녀석에게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자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친구는 입을 벌렸다. 급하게 백화점 아기용품점에 들러 가장 비싼 물건을 구매했다. 차라리 두둑한 돈 봉투를 주는 것이 나았을까.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종이 가방은 녀석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신생아실은 몇 층이지?”

    “야. 가져가.”

    훈재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 종이 가방을 되돌려주었다. 이 자식이 무슨 수작인가 싶었다. 평소처럼 일 얘기나 할 것이지. 언제 친구 사이를 챙겼다고. 그렇게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자신이 걱정하지 않도록 네 인생이나 좀 제대로 돌보라는 말이 입 밖으로 와다다 쏟아지려는 걸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기사 봤을 거 아니야?”

    “……뭐?”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태욱이 아무렇지 않게 웃는데 훈재는 소름이 돋고 말았다.

    “강태욱.”

    훈재는 아직도 그를 ‘강’이라 불렀다. 태욱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려야 했으나, 그럼에도 그 호칭을 절대 입에 올리지 말라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농담이 나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옛날에도 그랬지만, 더 이상은…… 나도 안 되겠어. 그게 진짜면…… 앞으론 나 못 볼 줄 알아라. 이젠 네 편 드는 내가 불쌍할 지경이야.”

    “…….”

    태욱에게선 쓴웃음이 흘렀다. 훈재가 이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결혼 기사가 났을 땐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참았겠지. 하지만 속도위반까지 진실이라면 그 어떤 이유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박훈재는 그런 인생을 살았으니.

    “넌 이미 알고 있잖아.”

    태욱이 짧게 대답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러 차례 그를 노려보던 훈재는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엔 신생아실 앞에 태욱을 내려 주었다. 지선에게 선물을 건네주고 곧 내려오겠다는 훈재의 말에 태욱은 먼저 신생아실 앞으로 다가갔다.

    모든 건 추측이었다. 장소를 보고 상황을 예측한 후, 그녀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윤서영이란 여자를 떠올리고 행동을 읽어 보았다. 지선을 만난 후에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보고가 없었다. 아직 조리원 안에 있다는 소리였다.

    갈 곳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그 여자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 그 찰나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의 오늘 탐정놀이는 성공한 것이다.

    “오리야…….”

    사람이 다가가도 시선은 창가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이렇게 그를 바라봐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욕심이 끝없던 날들이 이어졌다. 사랑하고 있음에도 부족해 더 가지려 몸부림치던 인간은 이제 그 한 번의 웃음이 그리워 쫓기듯 달려온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모, 나쁘지? 그치?”

    자책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죄책감을 가지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그 죄책감으로 인해 아픈 것은 싫었다. 사랑은 끝없이 그를 혼란 속에 빠뜨렸고, 그 순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태명이 오린가 보죠.”

    곁에서 서영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까지 잊어버린 걸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또다시 원망의 감정이 들끓었다.

    “네. 아빠 이름이 훈재라서 훈재오리에서……. 웃기죠?”

    박훈재다웠다. 태욱에게서 헛웃음이 터지자 서영의 몸이 굳어지는 게 바로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시선을 아기에게로 옮겼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더할 수 없이. 행복하게.

    “티…… 팀장님.”

    이젠 듣기 어려운 호칭이었다. 태욱은 고개를 돌려 뻔뻔하게 서영을 내려다봤다.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버렸지만 태욱은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또 만나네요.”

    그가 간단히 대답하자 서영은 곧 차분해진 눈빛으로 태욱을 바라봤다.

    “그러네요. ……신기하게요.”

    잠깐 웃음을 보이던 그녀는 창가에서 물러섰다. 다음 행동은 보지 않아도 읽혔다.

    “여기서, 천천히 보세요. 전, 그럼.”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여자를 바라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이렇게 불편해하면서.”

    서영이 그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태욱의 시선은 여전히 오리에게 향해 있었다.

    “인터뷰는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었습니까?”

    그녀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건 쉬웠다. 굳이 은림이 도와주려 나서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 머리 하나는 탁월하게 타고나서 지금 자리까지 올랐다. 처음 그녀를 그의 상황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출구를 막아 버린 상황들 때문이었다. 거기에 또 속는 바보가 윤서영이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할 게 있는 일입니까?”

    태욱은 오히려 되물었다.

    “이사님은…… 아니시겠지만, 전 그렇습니다. 여기서 마주칠 줄도 몰랐고요. 일은…… 절차를 밟아서 하고 싶었어요. 그게 서로한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홍보실 쪽에 메시지를 남긴 것인가. 하루에도 수백 통의 스케줄 문의가 쏟아지는 곳에서 자신의 메시지가 살아남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걸까. 태욱에게서 헛웃음이 터졌다.

    “윤 대리한테, 그다지 절박하지 않은 일인가 보죠?”

    서영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기다리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요.”

    태욱이 돌아서 걸어갔다.

    “언제 연락이 갈지 모르겠지만.”

    그가 뒷말을 내뱉은 순간 베팅이 시작되었다. 태욱은 여유 있게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 내림 버튼을 눌렀다. 곧 그가 있는 층의 문이 열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닫힘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죄었다. 미친놈. 혼자서 웃고 있을 때 닫히려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서영이 단단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오해……받고 싶지 않아요.”

    서영이 불쑥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

    “…….”

    “이사님과 결혼하실 분한테요.”

    “…….”

    “홍보 팀 통해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단정한 인사가 건네지고 곧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갇힌 태욱은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또 속는 바보는 그녀가 아니라 그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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