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4화 (54/75)

17. 또 속는 바보는 (3)

지선은 뒤척이던 몸을 결국 훈재 쪽으로 고정했다. 소파가 자신의 지정석인 것처럼 앉아 있는 그는 가져온 일감에 눈을 박은 채였다. 주말이었고, 산후조리원은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편안했다. 그러니 머릿속엔 당연히 잡생각들이 찾아들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유신에서 근무하는 몇몇 직원들과 단체 채팅방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가란 사람도 없었고, 그녀도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얻어 낸 정보들이 지금 회사의 영업에 심심치 않게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그녀로서는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애를 낳고 제정신을 차릴 즈음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그러자 하나둘 축하 메시지와 함께 모바일 선물 교환권을 보내 주기도 했다. 그러다 얻어듣게 된 태욱의 사생활 얘기는 결국 그녀의 달콤한 낮잠 시간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

“진짜…… 아니지?”

다짜고짜 주어도 없는 말이 지선에게서 내뱉어졌다. 훈재는 그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오리를 낳은 후 그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그가 그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성적인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의 핏줄을 끌어안은 그는 강한 부성애를 보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달라진 건 지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고 해야 할까. 오리를 낳으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 극한의 고통을 이겨 낼 힘이 어디서 오느냐, 였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여도 가능할까. 지선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걸 뛰어넘어 오리를 낳은 건 박훈재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당신은 알 거 아니야?”

지선이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재촉했다. 그제야 훈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를 낳으면서 깨달은 마음이 어째서 서영을 향한 걱정으로 이어지는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결혼이 뭐 별거야, 그놈이 그놈이다, 라는 그녀의 철칙을 갈아엎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서영과 태욱이었다.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훈재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거짓말.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당신이 강이든, 손이든, 태욱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에 대해서 관심을 끊었을 리 없다고 따지지는 못했다.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여 다시 창가 쪽으로 돌아누울 뿐이었다.

“맞으면…… 내가 진짜 찢어 죽일 거야.”

지선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얘기를 했다. 훈재가 놀라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임신했을 때야 호르몬의 불균형 때문에 그렇다지만 지금은 아이를 낳은 후였다. 왜 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는 침대 가에 앉아 아내의 등을 잠시 쓸어 냈다.

“여보.”

“…….”

“오리 엄마.”

몸을 흔들어도 지선은 베개 속에 얼굴을 더욱 파묻을 뿐이었다.

“아…… 그래. 나도 확실한 건 몰라. 그 새끼가 나한테 말하는 놈도 아니고. 근데 당신도 봤을 거 아니야?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어? 애는 혼자 만드…….”

“진짜지?”

지선이 벌떡 고개를 들어 재차 확인했다. 그녀의 눈가는 깨끗했다. 눈물을 흘린 흔적 따윈 없었다.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훈재는 웃음이 샜다. 이 여자는 영원히 이길 수 없는 건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오리 낳으니까, 더 맘이 쓰여. 몰랐으면 모르겠는데 다 알잖아. 당신도 좋아했잖아. 강태욱이 얼마나 변했는지 아냐고. 다른 사람 같다고. 행복한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훈재는 말없이 지선의 손을 쓰다듬듯 붙잡았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그 녀석이 멍청하게 웃을 땐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얼마나 대단한지, 열을 내며 설명해도 못 알아듣던 놈이었다. 그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걸 녀석도 알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태욱의 발목을 잡아 그를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고통받는 두 사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게 훈재였다. 손발이 묶여 버릴 수밖에 없는 태욱의 상황도,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서영의 마음도 모두 이해가 되어 가슴이 더 답답했다. 그래서 차라리 모른 척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 오리 낳을 때, 서영 씨랑 그 자식 만나게 했어.”

“뭐?”

지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팔을 급하게 풀었다. 서영에게선 전해 들은 말이 없었다. 그럴 정신이 없긴 했지만 만나서 무슨 상황이라도 벌어졌다면 그렇게 덤덤히 전화를 받았겠는가. 여러 가지 추측만 생겨날 뿐이었다.

“당신은 그 서 대표랑 잘됐으면 하기에…… 말 안 했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들었을 거 아니야?”

훈재는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이 어두운 걸로 보아 좋은 결론은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선의 근심은 더욱 깊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암튼, 양반은 못 되네. 이 자식도.”

핸드폰을 내려다본 그가 겉옷을 챙겼다. 할 이야기라고는 일에 대한 것뿐일 테니, 지선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게 뻔했다. 그는 그녀가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이었다.

훈재가 방을 빠져나가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지선의 핸드폰도 장단을 맞추듯 울렸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서영이었다. 지선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얼굴 보니까…… 안심이 돼요.”

서영이 조리원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주말이긴 했지만 회사 대표의 병문안을 가는 것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는가. 진짜 아픈 것도 아니고, 다들 묵묵히 해내는 출산이었다.

외부인 출입이 가능한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영이 수줍게 내민 선물을 풀어 볼 때도 마음이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오리를 위한 물건들은 이미 차고 넘치게 선물받아 오히려 더 부담이었다. 괜찮다며 상자를 열어 본 지선은 가슴이 찡, 하게 울리고 말았다. 예쁜 선물 상자 안에 든 것은 산모용품들이었다. 오리가 아니라 그 녀석을 낳은 지선을 위한 물건들이었다.

“비싼 건 아니에요.”

서영이 민망함에 말을 덧붙이자 지선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대표님?”

“아, 미안. 그냥, 그 망할 호르몬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나 봐.”

지선이 울다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원래 애 낳고도 그런대요. 일찍 결혼한 친구들도 그러더라고요. 그럴 때 참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울고 싶으면 우는 거죠. 전…… 애도 안 낳았는데 수시로 그래요.”

서영에게 받은 위로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그랬다. 늘 나서서 충고하고 서영을 챙긴 건 지선이었지만 중요한 순간 그녀의 손을 붙잡아 주는 건 서영이었던 것 같았다.

“아직도…… 못 잊겠어?”

지선은 이제 모른 척 넘길 수가 없었다.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지만 그게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음……. 뭐, 그것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서영은 울음을 참아 내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끝내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울고 싶으면 울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직도 인생, 상처, 아픔, 사랑 등등. 모든 것이 숙제처럼 어려웠다.

“리조트에서 만났다는 얘기 들었어.”

“아…….”

그때를 떠올리듯 서영이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있는 것도…… 웃기잖아요. 진짜, 다시 만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제가 헤어지자고 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 준 사람도 저라는 거. 그래 놓고,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잊고 있었더라고요.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거겠죠?”

태욱이 상처받았음을 모른 척하기엔 지선도 지켜본 시간들이 있었다. 짧았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었을 그 시간 동안 그 남자는 수없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의 고통이 덜하다 말할 순 없었지만 어쨌거나 먼저 손을 놓은 건 서영이었다.

“에휴.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제가 또 대리님, 아니, 대표님 머리 아프게 했네요. 이럴까 봐 오지 않았던 건데. 오늘은 오리가 진짜 보고 싶더라고요.”

결국엔 지선이 아니라 오리였나. 감동으로 가득했던 지선의 눈이 서영에게 잠시 세모로 변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버렸다. 심각해져도 그게 오래가지 못하는 사이였다. 지선은 서영에게만 특별히 오리의 실물을 보여 주겠다고 윙크를 날렸다.

지금 지내는 조리원의 규칙상 주말은 최소 인원만 실물 면회가 가능했다. 그 주인공으로 서영은 당연히 1순위였다. 출산하던 그날, 서영이 옆에 없었다면 오리가 제대로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지선은 서영을 신생아실로 먼저 올려 보내고 조리원 방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밀려 있는 스케줄을 쳐 내야 했다. 수유 콜이 오기 전에 점심 밥상을 해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얼른 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훈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백화점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나간 사이에 뭘 사 왔나. 지선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거. ……전해 주란다.”

“어?”

이번엔 훈재가 주어가 상실된 말을 내뱉었다. 지선은 어리둥절했다. 누가……. 설마. 그녀의 머리가 갑자기 재빠르게 돌았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 준 운명이라는 건가.

“어디 있어? 갔어? 주차장이야?”

호들갑을 떨며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심해. 아직 그렇게 막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손 이사 어디 있냐고!”

지선이 답답해 훈재에게 소리치자 그가 짧게 대답했다.

“신생아실. 우리 애기가 보고 싶은가 봐.”

“…….”

“그 자식…… 미친 것 같아.”

천사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아가들은 어른들의 죄를 씻어 내기 위해 내려온 감사한 선물인 것 같았다. 서영은 본인이 낳지도 않았는데 오리를 내려다보자 무언가 울컥, 하고 감정이 요동쳤다.

간호사가 유리창 앞으로 아기를 데려와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허락한 시간이 지나고도 그녀는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오리를 멀리서라도 계속해서 지켜봤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우르르 다음 순번으로 면회할 사람들이 몰려들고 서영은 옆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그녀는 갑자기 어느 한 순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싶다고 했던 말. 그것이 왜 지금 머릿속을 스쳐 가는지 모르겠지만 미안함은 더할 수 없이 깊어졌다.

“오리야……. 이모, 나쁘지? 그치?”

“……태명이 오린가 보죠.”

누군가 옆쪽에서 말을 걸었다. 서영은 오리가 눈을 뜨고 웃는 순간이라 옆을 보지 못했다. 그저 아기에게 빠져 정신없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네. 아빠 이름이 훈재라서 훈재오리에서……. 웃기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춰야만 했다. 남자는 서영이 아니라 오리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만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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