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시 봄은 시작되었고 (3)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차를 기다리는 듯 입구 계단 끝에 서 있는 태욱의 눈길이 꽂힌 건 흩날리는 벚꽃 잎들이었다. 그런 태욱을 바라보고 있는 서영은 단번에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살이 조금 빠진 것 빼고는 예전 그대로였다. 화보라도 찍는 것처럼 슈트를 갖춰 입은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그의 앞으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익숙하게 뒷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서영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허무한 웃음만 흘렀다.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가 가능이나 할까. 지선이 말한 대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넬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심장에 날카로운 것들만 스쳐 가는 느낌이었다. 아프고, 답답하고, 먹먹했다.
“들어갈까?”
지훈이 마시던 음료와 케이크 상자를 정리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제가 버릴게요.”
서영은 모른 척하듯 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쓰레기를 가져와 휴지통이 위치한 곳으로 다가갔다. 친환경을 지향하는 아트센터의 모토답게 분리수거함이 여러 단계로 나눠져 있었다.
남은 음료를 따로 버리고 플라스틱 컵을 정리하는데 우수수 날아온 벚꽃 잎이 컵 안으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바람이 불어온 곳을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지켜봤던 차 한 대가 떠나지 않고 멈춰 서 있었다.
“가자.”
재촉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대로 된 이별은 이제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를 아무렇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 스스로가 옥죄고 있는 모든 감정들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독해져야 한다. 흔들려선 안 된다. 서영은 또 그렇게 멍청한 다짐을 했다.
“어서 와요.”
은림이 반가운 얼굴로 서영을 맞았다. 그러다 그녀의 옆에 선 지훈을 알아채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잠시 짓기도 했다. 대표님이 유신건설 출신이라 열정남이시구나, 하는 혼잣말로 지훈의 얼굴을 잠시 뜨겁게 만들어 버렸지만 곧 세 사람은 업무 이야기로 넘어갔다.
“유신리조트가 내 앞으로 넘어온 건 들었을 거예요. 그만큼 유신건설과 연계해서 추진하는 행사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 홍보 마케팅은 ‘지앤지’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해 주시길 부탁드려요. 담당자가 마침 유신건설 신사업 마케팅 팀 출신이라고 하니, 더 든든하네요.”
은림은 서영을 그저 업무 파트너로만 대했다. 그러는 게 서영으로서도 더 편했다. 지훈의 앞에서 태욱과의 이야기 나온다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들의 만남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되었는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은림뿐이었으니. 그녀 또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서영을 그곳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의 전화를 엿듣게 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태욱과 헤어진 후, 은림은 한 번씩 서영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답장은 필요 없으니 읽어만 달라는 내용이었다.
너무 아프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누구든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껏 미워해 버리고, 울고 싶으면 울어 버리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찾아와도 좋다는 말끝에는 매번 미안하다는 사과가 덧붙여져 있었다.
한 번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 그리도 미안할까. 어차피 그녀가 아니어도 언젠간 알게 되었을 일일지도 몰랐다. 태욱과의 관계는 마지막이 정해진 만남이었다. 행복한 결말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건 언제든 깨닫게 되어 있었고, 누가 먼저 손을 들어 항복을 외치느냐만 남은 시한부 행복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 사보는 부록처럼 특집 인터뷰가 들어갔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은림이 서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 준비해 보겠습니다.”
서영은 업무용 수첩에 ‘특집 인터뷰’라 적고, 내용을 받아 적기 위해 은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보의 특성상 특집 인터뷰라 하면 대표의 미니 자서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은림도 그런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재벌가에 자랐고, 돋보이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유신리조트가 그녀에게 넘어온 것이 촉매제가 되어 지금까지의 업적을 드러낸다면 그보다 좋은 홍보 효과는 없었다. 태욱이 유신의 얼굴이 되어 본인 이미지를 파는 것처럼 그녀 또한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몰랐다.
“인터뷰는 나랑 유신건설 손태욱 이사의 대화 형식이었으면 하는데.”
은림의 입에서 태욱의 이름이 나오자 서영은 더 이상 수첩에 글씨를 남기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은림을 바라보자 그녀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건……, 유신 홍보 팀과도 부딪쳐야 되는 문제고.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아트센터 사보 색깔과도 어긋납니다. 차라리 유신건설 마케팅 팀과 진행하시는 게…….”
대답은 서영이 아니라 지훈에게서 다급히 흘러나왔다.
“윤서영 대리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은림은 서영만을 바라본 채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서영은 그녀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담아서는 안 되었다. 서영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보에 대한 최종 권한은 관장님께 있으니, 문제 될 건 없다고 봅니다. 유신건설 쪽 홍보 팀과 부딪치는 문제는 잘 조율해 보면 될 거고요. 이번 유신리조트 책임 총괄이 손태욱 이사님이셨고, 그리고 두 분이…… 일 이외에도 이어져 있는 사이시니, 사람들의 관심 포인트가 될 겁니다. 전…… 이 인터뷰가 유신리조트 홍보에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본 서영의 대답에 지훈은 배신이라도 당한 눈빛이었다. 그걸 지켜본 은림은 흥미로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사랑의 작대기가 이렇게 연결되고 있었나. 지훈이 여기까지 함께 나타난 이유에 대한 그녀의 추측이 그저 망상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담당자가 괜찮다는데도, 대표님은 여전히 반대인가요?”
은림의 물음에 지훈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상의해 보고 오픈식 전까지 결정해서 알려 줘요.”
은림은 제 할 말은 끝났다는 표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영과 지훈도 자리를 정리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림은 또 한 번 의미 모를 웃음을 흘렸다.
어쩔 땐 상황이 관계를 만들고, 도망칠수록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서영은 태욱과 헤어짐으로써 그를 멀리하려 했을지 모르나 그런 의식 자체가 이별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되돌아올 것이다.
태욱의 반응도 궁금했다. 가만히 있는 벚꽃나무를 없애 버릴 땐 언제고, 아트센터 앞에서 날리는 꽃잎들은 차까지 멈춘 채 지켜보는 속내가 뭔지.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알게 하고 싶었다. 또다시 봄이 시작되었고, 여름은 분명히 올 테니까. 은림은 그 계절들이 둘을 위로하길 바랐다. 서영과 태욱의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 둘을 다시 이어 주라는 게 오래전 떠난 오빠 인주가 남길 법한 유언이라 생각했다.
○ ◆ ○
“출발할까요?”
비서인 주한의 목소리에 태욱이 창가에 두었던 시선을 거뒀다. 서영이 지훈과 함께 아트센터 안으로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태욱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곧장 아트센터 큰길을 빠져나와 막히는 도로로 들어섰다.
잠시 후, 신호를 받고 차를 멈춰 세운 주한은 백미러로 뒤쪽을 바라봤다. 태욱은 평소처럼 쌓여 있는 서류에 눈을 박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는 비서라면 알아채긴 쉬웠다.
이것 또한 오늘 보고해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그의 비서로 뽑힌 후 주한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태욱이 아니라 손필성 회장이었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 주한은 금방 파악해야만 했다.
/(회상)‘특별한 행동은 모두 보고해.’
능력 없는 허수아비를 보필하는 건가. 재벌들의 뒤처리를 하며 쌓아 올린 경력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았다. 겉으론 같은 편인 듯했으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이라는 소리였다. 거기다 한쪽 목을 쥐고 흔드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약점으로 점철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태욱을 마주했을 땐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허수아비일 거란 주한의 추측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업무 능력과 머리의 비상함이 그가 모셨던 어느 재벌 집 자식들보다도 탁월하게 앞섰다. 능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기사 내용이 홍보용 거짓이 아니란 걸 주한은 그의 바로 옆에서 확인하듯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새 8개월, 이제 그의 표정을 읽을 정도는 되었다. 특별한 행동이란 게 무엇을 뜻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구나. 차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모든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여자 때문이란 게 조금은 시시하면서도 그가 달라 보이기도 했다. 곧 인생을 마감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눈 안에 미련 따윈 없던 보스였다. 한 번씩 태욱이 홀로 산에 다녀온 다음 날이면 눈빛은 더 갈 수 없는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불쑥 끔찍한 결말을 상상하다 정신을 차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부터 주한이 필성에게 전해야 하는 보고들은 하나둘 삭제되어 갔다. 사람이 숨이라도 쉬어야지. 숨 쉴 틈은 남겨 두고 이용해야지.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태욱의 편에 선 스스로를 주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조트 오픈식 날 출장 일정은 변동 없습니까?”
차가 조금씩 움직일 즈음 태욱이 불쑥 물어 왔다.
“네.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조정 원하시는 거면…….”
“아뇨. 예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태욱은 다시 시선을 내려 서류를 바라봤다. 주한이 뒷자리를 의식하며 태욱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필성 쪽에서 걸어 온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 순간 태욱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스쳐 간 것을 주한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태욱이 예전보다 창밖을 많이 바라본다는 사실에만 의미를 두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