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시 봄은 시작되었고 (2)
“싫으면 하지 마. 억지로 할 필요 없어.”
점심시간까지 넘겨 가며 인수인계를 받고서 지선의 손에 이끌려 회사 근처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서영은 그녀에게서 지금까지 꾹 참고 있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주문한 아이스커피를 받으며 서영은 작게 웃었다. 지선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서영에게 일을 제안했을 때 유신과 얽혀 있는 업무의 구조를 설명하는 게 맞았겠지만 그게 쉽지 않았을 거란 것도 이해했다. 굳이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대표도 아니고 그저 직원일 뿐인데 일을 가려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질 않았다.
“이런 일 생길 줄 알고, 만나면 ‘안녕하세요.’ 그러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라고 하신 거예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서영의 모습이 더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낼 줄은 몰랐다. 지선은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의 심리를 알 수가 없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서영을 회사로 데려온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럼에도 지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서영을 섭외하러 인천까지 향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길 바라는가, 아닌가. 그 질문을 놓고 그녀 자신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꼴이었다. 한편으로는 서영이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지훈과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서영의 마음이 그쪽으로 흐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그렇다면 예전처럼 지훈과 부딪치다 보면 새로운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그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일을 저지르고 보니 생각은 온통 서영과 태욱의 재회에만 꽂히고 말았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이런 그녀의 고민을 듣고 난 훈재는 변호사다운 객관적인 태도로 지선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당신 친구잖아. 이제 친구 안 하기로 했어?’ 그동안 담아 두었던 물음을 내던지고 나자 훈재는 말이 없었다. 지선은 곧장 미안해지고 말았다. 잘못했다며, 두 손을 붙여 싹싹 빌었다. 그러자 훈재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놓더니 ‘우리 이제 그 자식 얘기는 하지 말자, 진짜.’ 그리 말하곤 아프다는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누구의 잘못으로 헤어진 게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걸, 더 이상 어쩌겠는가. 지선은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떨어지는 벚꽃 잎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서영을 지켜보며 쓴 커피를 빨아 마셨다.
그리고 업무 통화를 짧게 했고, 서영의 눈치를 살피며 자꾸만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무슨 일인데요?”
서영이 괜찮다며 먼저 물었다.
“유신리조트 오픈 기념 파티도 지면에 넣어야겠다. 그게, 소문만 돌더니 오늘 아트센터 손은림 관장 몫으로 넘어갔나 봐. 처음부터 휴식과 예술의 접목, 이러면서 리조트 안에 미술관 넣을 때 촉이 오더니……. 거의 음, 그러니까…… 강, 아니, 손…….”
지선이 뜸을 들이며 제대로 호칭하지 못하자 서영이 대신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요.”
“그래. 그……분.”
“이젠……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죠.”
서영은 낯선 호칭을 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응, 뭐. 손태욱 이사가 전체 책임 총괄이었거든. 진짜 몸을 갈아 넣어서 만든…… 암튼, 그걸 또 자기 딸한테 넘기네, 그 망할 영감탱이.”
지선은 전 직장의 오너인 필성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회사에 다닐 적에도 그의 일방적인 업무 방침과 편견 앞에서 울분을 토한 적이 많았다. 서영은 그저 가까이할 일이 없는 사람의 얘기로만 들었다. 태욱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다면 리조트 홍보에 관한 건 우리가 맡아야 할 것 같고. 손 이사가 파티에 올 가능성을 점쳐 보자면…… 내 생각엔 반반. 오리 아빠 말로는 지금 중국 쪽 투자 관련해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고 했거든. 그리고 자기가 다 만든 걸 고모가 날름 해 먹는 걸 보고 싶겠어? 뭐, 안 오면야 우리야 땡큐고. 안 올 거야. 안 오도록…… 빌어야겠지?”
그렇게 한 번 피한다고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사람은 아니었다. 서영이 유신아트센터 사보 일을 맡는다면 은림은 당연히 만나야 할 상대일 것이고, 이번 호의 이슈가 유신리조트라면 본사의 홍보 팀과도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일이 생길 게 뻔했다. 아무쪼록 간단히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해 둔 번호를 지우지도 못했다. 서영은 지선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바쁜 거 아니었어?”
뜻밖의 손님이 등장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은림이 내려다보던 자료들을 치웠다. ‘지앤지마케팅’에서 보내온 사보 견본을 살피던 중이었다. 거기에 끼워져 있던 담당자의 프로필까지.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할까, 아니면 필연인 걸까. 잠시 감성적인 물음에 빠져 있을 때였다.
“머리가 아파서. 그림 구경 좀 하려고요.”
“네가?”
은림에게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지자 태욱은 곧장 응접 테이블에 앉으며 가져온 자료들을 펼쳐 놓았다.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은림은 태욱이 보여 주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의 감정을 읽은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이것도 아버지 심부름이야?”
서류의 내용은 첫째 새언니 미연의 본가에서 사들인 미술품에 대한 정보였다. 탈세가 의심되는 정황들도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약점을 하나라도 더 잡으려는 발악처럼 보이기도 했다.
“알아봐 줘요. 그럼, 갈게요.”
“태욱아.”
은림은 태욱이 본가에 들어온 후,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 그의 방 앞을 서성였다. 그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안다. 앞서간, 잘못된 염려라는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몸이 그러질 못했다.
어느 날, 새벽이 돼서야 들어온 태욱이 창가 앞에 서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은 채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오빠 인주의 환영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때의 인주가 지금의 태욱 나이쯤이었고, 눈빛도 닮아 그녀를 더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어요.”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읽어 낸 듯 태욱은 간단히 대꾸했다. 눈치 빠른 녀석이니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그를 향한 시선들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터득했을 수도 있었다. 관심으로 둔갑한 동정이야 은림 자신도 수없이 받아 보았다.
“그래. 네 인생인데,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무엇 때문에 헤어진 줄 알았고, 그가 어떻게 붙잡으려 했는지 내막을 전해 들었으며, 윤서영이라는 여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두 다 지켜보았다. 결론은 어느 한쪽의 손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애를 절로 보냈을 땐 차라리 녀석에게 화라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얼마나 아프냐고 물을 수조차 없었다.
“리조트 오픈식은 못 가요.”
문을 열고 나서려다 태욱이 덧붙였다.
“왜, 나한테 넘어와서 배 아파?”
은림은 모른 척 농담을 건넸다. 태욱이 흐릿하게 웃더니 그녀를 돌아봤다.
“어머니 앞으로 돌려놓은 거 아니었어요?”
그럼, 그렇지. 녀석이 모를 리 없었다. 은림은 아닌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욱은 그러라며 또 관심을 끄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은림의 머릿속엔 불쑥 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쉽게 될 리 없었다.
“늦어도 꼭 와. 와서 밥 먹고 가.”
꼭 꿍꿍이가 있는 말이었다. 태욱은 그녀의 의중을 몰라 눈썹을 모았다.
“그럼, 이거…… 알아봐 줄게.”
은림이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들었다. 태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냥 여린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를 상대로 거래도 할 줄 알았다. 태욱은 온다, 못 온다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은림이 입을 삐쭉이며 혀를 찼다. 이런 게 통할 녀석이 아니란 건 알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한쪽에 밀어 놓은 사보지 안에서 프로필 서류를 꺼냈다.
○ ◆ ○
“진짜 혼자 가도 괜찮은데…….”
“어차피 들어갈 일도 있어.”
아트센터를 돌아보고 오겠다는 말에 지훈은 외투부터 챙겨 일어났다. 탕비실을 나오던 지선이 서영의 옆에 서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서 대표가 옆에 있어야 말 한마디라도 더 먹힌다는 이유에서였다.
은림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호출은 일과 연관된 것이었기에 서영은 공적으로 외근을 나갈 생각이었다. 뒤늦게 혼자서 아트센터 관장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서영은 단념하듯 지훈의 차에 올랐고 센터 앞까지 도착했다.
“점심 못 먹었다며? 이거 먹고 들어가자.”
지훈은 차 뒤쪽에서 케이크와 음료를 꺼내 서영에게 안겨 주었다. 그녀가 자주 가던 카페의 홍차라떼였다. 인천으로 내려가서도 한 번씩 생각나던 집이었다. 퇴사를 한다는 것보다 그곳을 가지 못한다는 게 더 아쉬웠던 그녀의 비밀 맛집이었다.
“여기…….”
“그래. 점심 미팅 하고 일부러 가서 산 거야. 너 주려고.”
서영은 고개를 들어 지훈을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피하고 차에서 내려 버렸지만 무슨 뜻으로 이러는지 표정에 모두 담겨 있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나. 서영은 조금 우스웠고, 그의 행동이 안타까웠다.
“선배.”
서영이 먹을 것을 들고 따라 내렸다.
“알아. 네 마음에 지금 아무도 못 들어가는 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어차피 네 선배일 때도 같이 다니던 곳이야. 이 정도도 못 사 줄 사이면 그냥 원수로 지내자.”
그답지 않은 농담에 서영은 짧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웃자 지훈도 따라 웃어 버렸다. 그래, 선배이자 상사일 때도 같이 다니던 곳이었다. 더 이상 깊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맞았다.
“잘 먹을게요.”
“그래.”
서영은 지훈과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홍차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서 도는 달콤함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모든 걸 잊게 하는 맛이었다. 게다가 아트센터 앞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렇게 지나가면 된다. 마음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뜨자 그런 그녀를 당장이라도 혼내듯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저 멀리 서 있는 한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