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시 봄은 시작되었고 (1)
이삿짐이라고 해 봐야 캐리어 몇 개가 전부였다. 간단한 짐이었지만 인천 집 앞에는 차 한 대가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걸려 온 전화였지만 서영은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어차피 이제는 예전처럼 함께 일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지훈은 예전 그대로였다. 며칠 전에 만난 사람처럼 간단히 그녀의 안부를 묻고 이사를 돕겠다고 했다. 부담을 주려는 행동이 아니며, 거절할 이유도 없다 덧붙였다. ‘지앤지마케팅’ 대표로서 직원의 복지를 책임지는 것뿐이라고 했다. 공동대표인 지선이 부른 배를 이끌고 나서려 하는 걸 그가 말렸다고 했다. 그 부분에선 서영도 동의했다.
“짐은 이것뿐이야?”
서영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오자 지훈은 곧장 차 문을 열고 달려왔다. 어색해할 겨를도 없이 그는 짐을 가져가 자신의 차에 실었다. 못 본 사이, 그의 차종이 더 고급지고 튼튼한 브랜드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집엔 자주 오니까 그때그때 조금씩 가져가면 돼요.”
“그래. 그 방법이 더 낫겠다. 큰 짐 옮길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뭐 하러요. 택시도 있고, 아빠 찬스 써도 되고요.”
서영이 미안한 웃음을 짓고는 정확한 선을 그었다. 그게 너무도 윤서영다워 지훈은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았다. 그녀가 태욱과 헤어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긋난 타이밍과 오만한 자신감이 만들어 낸 착각이 이렇게 긴 후회를 남길 줄은 몰랐다.
“서영아! 잠깐만! 거기 서 봐!”
짐을 모두 싣고 차에 오르던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골목 끝에서 어머니가 두 손에 종이 가방을 든 채 뛰어오고 있었다. 주말이었고, 그녀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라 부모님 두 분 모두 자신의 일들은 미뤄 둔 상태였다.
서영은 놀라 얼른 골목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것보다 더 빠르게 어머니가 지훈의 차 앞에 다다랐고, 세 사람은 삼각 구도처럼 서서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눈 맞춤을 나눠야 했다. 지훈은 곧 영희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저, 서영이 대학 선배 지훈입니다.”
언젠가, 서영이 방학이라 기숙사가 아닌 인천 집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동아리 회장이었던 지훈은 후배들과 함께 여행 겸 서영을 만나러 왔었다. 그녀가 가이드를 맡아 짧게 월미도를 구경하고 곧장 조개구이집에 앉아서 술판을 벌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게임 벌칙에 많이 걸린 서영은 빠르게 취했고, 결국 테이블에 기대 잠들어 버렸다.
차를 몰고 온 사람이 지훈이었기에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이는 그뿐이었다. 모두들 2차를 하기 위해 사라져 버리자 그는 서영을 업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지훈이 벨을 누르자 석완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그의 신원을 확인했다. 곧 문이 열리고 집에서 뛰쳐나온 석완이 지훈의 등에 업힌 서영을 보고는 얼른 번쩍 안아 데려가 버렸다. 민망해진 지훈은 마당 끝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서영의 어머니 영희였다. 그녀는 얼른 그에게 다가와 고생했다며 물 한 잔을 건넸다. 그때의 물맛을 지훈은 아직도 기억했다. 영희가 잠시 들어왔다 가라고 했지만 집 안쪽에서 반대하는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훈은 괜찮다며 그대로 마당에서 뛰쳐나갔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딸을 너무 과보호하는 서영의 아버지로 인해 어린 마음에 작은 편견이 생기기도 했다. 비록 조금일지라도 후배 서영에 대한 호감이 접어지기도 했었다.
“알지, 알지. 내가 어떻게 잊어. 그때도 고마웠는데, 오늘도 이렇게 신세를 지네.”
“아뇨. 신세 아닙니다. 서영이가 저희 회사에 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요.”
“그래요? 그럼, 내가 또 기분이 너무 좋고. 하하하.”
“엄마……!”
결국 서영이 영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자리에서 무슨 얘기까지 오갈지 몰랐다. 영희는 서영의 친구라면 누구든 반가워했고, 석완과는 달리 경계심이 없었다. 그저 딸이 누군가와 어울려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한 것 같았다.
어릴 적 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던 딸이라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이해하려 했지만 이렇게 한 번씩 난처한 상황을 만들 때면 서영도 가만히 지켜만 볼 순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엄마 들어간다. 이것만 주고 가려고 했어.”
영희는 서영의 손에 종이 가방을 쥐여 주었다.
“가는 길에 같이 나눠 먹어. 엄마가 급하게 싸느라 너 좋아하는 오이는 못 넣었어.”
언제 김밥을 싼 걸까. 서영은 짐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부엌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놀러 가는 게 아닌데. 영희는 거리와 상관없이 서영이 어딘가 갈 때면 꼭 김밥을 싸서 챙겨 주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았다. 사고가 있었던 그날, 바쁘다는 핑계로 동생의 도시락을 직접 싸 주지 못한 것이 영희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알았어. 고마워. 잘…… 먹을게요.”
서영은 눈물을 들키기 전에 얼른 가방을 챙겨 조수석에 올라탔다. 영희와 지훈이 나머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도 바라보지 못했다. 앞만 쳐다본 채 자신의 허벅지 위에 놓인 도시락이 든 종이 가방만 꽉 움켜쥐었다. 모든 게 아직도 이리 가슴에 사무치는데. 어떻게 잊어. 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서영은 늘 같은 생각뿐이었다.
“나 좀 출출한데.”
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지훈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쩐지 서영의 기분이 다운되어 보이는 때문이었다. 옛날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 보고 싶었다. 되돌아가려는 시도조차 접고 싶진 않았다.
“아, 죄송해요. 휴게소에서 뭐 좀 먹을까요?”
창밖만 바라보던 서영이 정신을 차리듯 지훈에게 물었다.
“어머님이 싸 주신 김밥 있잖아.”
달리는 차 안이었다. 서영은 지훈이 가리킨 종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같이 나눠 먹으라고 일부러 챙겨 준 것이니 맛을 보긴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김밥을 꺼내면 운전하는 지훈의 입에 넣어 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김밥을 먹여 주기 위한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서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입에 넣어 달라고 그럴까 봐 그래?”
“……아.”
지훈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 버렸다.
“하여튼, 윤서영 틈을 안 주지.”
그가 포기하듯 작게 웃었다.
“알았어. 조금 더 가면 휴게소 나와. 거기 가서 나눠 먹자.”
“……네. 그래요.”
짧게 대답하고 서영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지훈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향했지만 되돌아오는 시선 같은 건 없었다. 아마도 그를 의식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지훈은 허무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태욱이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남겼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는데. 그 기회조차 차단하려는 서영이 미련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지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며칠 전 그의 약혼 기사에서 체감했다.
기회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일에서든, 사랑이든. 지훈은 이제 그 타이밍을 어이없이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서영의 눈길이 어딘가에 멈춰 있다면, 이젠 그에게로 돌려놓고 싶었다. 바보같이 후회하는 건 지금까지로도 충분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서영에게 머물렀다.
○ ◆ ○
‘지앤지마케팅’에서 서영에게 제공한 집은 엘리베이터가 딸린 신축 빌라였다. 층수도 딱 적당한 3층이었다. 모든 게 풀 옵션으로 갖춰져 정말 몸만 들어가 살면 되는 곳이었다. 서영은 간단하게 필요한 것만 싸 온 캐리어를 풀어 금방 정리하고는 하룻밤을 보냈다.
몸을 쓴 만큼 잠도 잘 왔다. 새집에 빠르게 적응한 그녀는 출근 준비를 하고 오랜만에 아침 지하철을 탔다. 바뀐 것은 없었다. 환승 구간에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밀려나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구두의 앞코가 밟히기도 했고, 사무실이 있는 동네에서 한 정거장 지나쳐 내려 아침부터 발이 까지도록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긴장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두 대표를 비롯해 새로운 직원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자리를 배정받고 가방 안의 물건들을 정리해 그녀만의 공간을 만들 때였다.
“인수인계 회의부터 했으면 하는데요.”
그녀의 앞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지훈에게 다가가 전투적으로 말을 건넸다.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본 서영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서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 눈을 마주했을 때부터 한눈에 읽혔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게 있다면 자신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알아채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눈만 봐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서영을 탐탁지 않아 할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갑자기 비교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이겠지. 이미 지선에게 들어서 직원들의 포지션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1년도 안 된 신생이라 대기업처럼 원활하게 업무 분담이 되어 있을 리 없었다.
서영이 등장하면서 일을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지만 그 나눔의 경계가 모호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대표들이 스카우트하듯 데려온 낙하산이 아닌가. 게다가 마치 특별대우를 하듯 직원 숙소까지 마련해 줬다는 소문이 돌았다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유신아트센터 사보부터 맡아 주셨으면 해요. 급한 거라.”
회의실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민가현 대리는 서영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당황한 두 대표가 눈빛 교환을 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기선 제압을 하고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 건가. 서영은 감정 없는 얼굴로 가현을 바라봤다.
“그쪽 일은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녀의 비아냥거림이 한편으론 우스웠다.
“네. 그럴게요.”
모두의 시선은 이제 서영에게로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