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은 지나도 사랑으로 남는다 (3)
서영은 숨을 고르고 등 뒤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얼려 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산을 오르느라 지친 몸이 그제야 살아나는 것 같았다. 큰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자 풍경이 발아래 있었다.
이래서 모두들 등산을 다니는구나 싶었다. 꼭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인생은 그럴지도 몰랐다. 매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감정을 모를 테니. 힘든 나날들을 견디며 이겨 내야 잠시의 기쁨이 얼마나 달콤한 줄 아는 것이니까.
서영은 다시 몸을 돌려 산속의 작은 절을 올려다봤다. 왜 이 산이었을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어디로든 가야 했을 때 이곳이 생각났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부모님에게는 못 할 짓이었다. 그렇다고 누굴 만나는 것도, 홀로 우는 것도 싫었다. 그런 시간들은 이미 충분했으니. 서영은 혼자서 이겨 내고 싶었다. 그래서 길을 나섰다. 산을 오르다 보니 절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불상 앞으로 다가가 절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생각나서일까. 아니면……. 모르겠다. 그날의 아픔이 이젠 흐릿해졌다.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등을 쓸어 내 줄 때 모두 쏟아 버렸으니. 원 없이 울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가볍고 시원해졌다. 발갛게 부은 눈으로 고개를 들자 한 보살님이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영이 괜찮다며 웃자 보살님은 따라 웃으며 그녀의 두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손은 따뜻했고, 서영의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너무 울었더니…….’ 민망해 변명을 하자 보살님은 그녀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절밥이 그리 맛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서영은 부끄러움도 없이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러고는 절을 내려왔다.
그때 닿은 인연 때문인지 산에 오를 때마다 서영은 보살님을 찾았다. 그녀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가만히 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게 괜찮았다. 보살님이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해 보라고 말하면 서영은 먼저 눈을 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보살님은 그 남자를 닮았다. 아니, 태욱이 그녀를 닮은 것이겠지.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가 태욱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건 서영만의 추측이었다.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만약 맞는다면…… 그것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함께해 주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에 서영은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었으니까.
“……취직이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보살님이 물었다.
“네. 이제 그만 놀고, 일해야죠.”
그래서 예전처럼 자주 오진 못할 것이라는 말에 보살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 서영은 감사했다. 그녀 앞에선 가끔 동생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때때로 태욱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사랑을 말할 때면 그녀의 눈에선 빛이 났다. 벚꽃 길을 같이 걸어 내려오던 순간, 호두과자를 머리 위로 올리며 장난칠 때 짓던 웃음, 바닷가를 바라보며 품 안 깊숙이 그녀를 안고 안았던 간절함. 모두 지난 일이었지만 서영에겐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사랑은 지나도 사랑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도 만나야 해요.”
산사 앞까지 내려와 배웅하던 보살님이 마지막 당부를 하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서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좋은 사람 만날게요. 약속하듯 그녀를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등을 쓸어 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영이 돌아서 두 손을 모아 인사하자 그녀도 맞절을 해 주었다. 헤어짐은 언제나 마음 끝이 아팠다. 특히 보살님과 헤어질 땐 더 심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도 서영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 서영은 위로를 받았다.
“안 탈 거예요?”
버스 기사가 외친 소리에 서영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 타요. 죄송합니다.”
산에서 내려와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은 가방에 넣어 둔 채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진동음이 여러 번 울려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부터 출근이니 지선에게서 연락이 온 걸지도 몰랐다. 서영은 핸드폰을 열어 화면을 확인했다. 정말 지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곧장 다시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겨 두고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으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 서영은 일을 그만둔 이후, 이런 전화들은 받지 않았다. 무음으로 돌리는데 같은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윤서영 대리님. 데일리 신문 기자……]
장문의 문자를 읽어 내려가던 서영은 마지막에 첨부된 링크를 클릭해 기사를 확인했다. 태욱이 활짝 웃는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쪽이 당연한 것처럼 아팠다. 그 여자와 다시 약혼을 하는구나. 가볍게 넘겨야 할 기사가 온 정신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허겁지겁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버스 기사를 바라봤다. 다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멍청한 깨달음만 얻은 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바보처럼 서 있었다.
○ ◆ ○
담배를 끈 태욱은 산사를 올려다봤다. 남자인 그에게는 출입이 허락된 곳이 아니었다. 굳이 들어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딱 이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만족했다.
정애도 어느 날 산사 아래를 내려다보다 그의 차를 발견했지만 굳이 내려와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도 있었다. 태욱이 고개를 숙이면 정애는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라도 그가 쉬어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듯이. 얼굴을 보는 것, 그 이상은 모자에게 없었다. 태욱은 이제 이곳도 그만 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가 더 가슴 아파할 것을 알았기에.
오늘은 멀리서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태욱은 차에 올라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닦여진 도로 옆으로 등산객들이 걸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완연한 봄이라 지난번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아침에 터진 기사로 그의 핸드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 댔다. 훈재는 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를 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네 인생을 왜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느냐고. 너는 몰라. 내 인생을 살지 않았으니. 태욱은 묵묵히 친구의 화를 받아 내며 침묵했다.
멀어지겠지. 떠나 버리겠지.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생 가운데 그가 서 있었다.
태욱은 다시 속도를 줄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눈을 아프게 만드는 알록달록한 차림인 단체 등산객들 사이에서 홀로 튀는 무채색 차림인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튀지 않는 색깔이 더욱 도드라져 버린 아이러니였다.
여자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태욱은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엔 그랬다. 모든 게 윤서영으로 보였다. 다시 찾아올 것이라 확신하기도 했다. 그를 사랑한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그는 생각지도 못할 세월을 한 남자만 바라봤는데 어찌 그리도 쉽게 마음을 접을까. 그렇게 멍청하게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태욱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기다린 전화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자는 다짜고짜 소리쳤다.
― 당신, 미쳤어요?
지유린이라면 그의 행동을 미리 짐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만의 착각이었나. 태욱은 산 아랫길로 내려와 차를 멈춰 세웠다. 던져둔 핸드폰을 여유롭게 집어 들고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쪽이…… 원하던 거, 아닌가.”
태욱은 또다시 두통이 시작돼 잠시 눈을 감았다.
― 그땐……, 아니, 강태욱 씨. 그래요, 이제 손태욱 씨.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 여자랑 어차피 오래갈 생각 없었던 거 아니에요? 나랑 결혼하기 싫어서 쇼한 거잖아. 원하는 대로 됐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그리고 당신 이미 다 알고 있잖아. 내가 임신했고, 그 애가 누구 앤지도!
복수일까. 모르겠다. 그런 의미를 가져와 붙이는 것도 우스웠다.
“어쩌지, 이번엔 내 쪽에서 흥미가 생겼어. 어차피 핏줄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놈이란 거 애 아빠한테 들었으니 잘 알 텐데? 회장 자리 차지하기 위해선 뭐든 한다는 것도. 사람들이 좋아할 시나리오잖아. 아주 자극적이고, 더럽고, 구역질 나는 거.”
태욱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지고, 차 안에 남겨 둔 두통약을 꺼냈다. 물도 없이 삼켜 넘기자 조금은 통증이 가라앉았다.
한참 만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산이 보였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고, 무채색의 등산복을 입은 여자를 다시 마주했다. 이번엔 뒷모습이 아니라 정면이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멈춰 선 버스에 타지 못했다. 버스가 가 버리자 여자는 정류장에 앉았다. 멍하니 산을 올려다보다가 주머니에서 염주를 꺼냈다. 버스가 두 번 더 정류장을 통과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걸치고 걷기 시작했다.
태욱은 조용히 여자가 가는 쪽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걷다 서기를 반복했고, 길을 잃은 것처럼 방향을 헤매었다. 앞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끝내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욱은 조수석에 던져 버린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울릴 리 없을 텐데.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멍청했다. 허무한 웃음이 흘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모든 게 꿈이었다는 것처럼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두통약을 너무 집어 먹은 부작용일 것이다. 현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차를 다른 방향으로 몰았다.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겠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