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47화 (47/75)

5. 사랑은 지나도 사랑으로 남는다 (2)

32층 이사실의 불빛이 외로이 밝았다. 사방이 통유리 창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무실 다섯 개는 이어 붙여 놓은 듯한 넓이의 공간을 사람 한 명이 차지하고 있는 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밤이 되면 우주를 부유하는 것처럼 이사실은 현실 세계와 분리된 채 하늘 위에 떠 있는 형상이었다.

이런 자리, 형식, 허세에 일찌감치 질려 있었으나 태욱은 이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림자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 공간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에 적힌 ‘손태욱’이란 글자도 그러했다.

그것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역할을 누리면 되었다. 그러자고 필성과 거래를 했다.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칼자루 따윈 없었다. 품을 수 있는 마음까지 모조리 뺏긴 것처럼 그는 그 어떤 동력도 없는 기계적인 상태였다.

태욱은 시계를 한 번 올려다봤다.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붕 떠 버린 시간이 어색해 그는 책상을 등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32층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로한 눈을 잠시나마 쉬게 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기계와 서류들이 조만간 그의 눈을 멀게 할 것처럼 담당 의사는 무서운 경고를 날렸다.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고,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과에서 안과로, 이런저런 검사를 하며 두통의 원인을 찾던 의사들은 간단하게 일을 쉬라고 명령했다.

우스운 말이었고, 태욱은 알았다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챙겨 준 약들은 고스란히 책상 구석에 처박힌 상태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거나 32층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나마 머리가 맑아졌다.

그런데 그 습관이 오늘은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 줄은 몰랐다. 어느새 봄이 찾아온 걸까. 벚꽃나무들이 어김없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늦은 밤까지 사람들을 설레게 하고 들썩이게 만들었다.

태욱은 오늘 오후 참석한 상반기 광고 기획 회의에서 언급된 감성적인 문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날리는 꽃잎 하나에 흔들리는 마음이라니. 듣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늙은 이사진들을 구워삶으려 하는 외주 기획자의 눈물겨운 노력을 지켜보다 보니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흥미가 일었다.

‘꽃이 지면 어떡합니까?’

회의실 불이 켜지기도 전에 태욱이 물었다. 외주 기획자들은 당황했고, 그들과 뒷거래가 있었던 몇몇 이사진들이 술렁였다. 손태욱이 이사가 된 이후에 제대로 피바람이 몰아칠 줄 알았지만 그는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트러블을 만들어 낼 생각 따윈 없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에 머무를 뿐이었다.

한동안 몸을 사리던 이사진들도 이제는 마음을 놓고 이전의 방식대로 일을 진행시켰다. 태욱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가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외주사가 만들어 낼 광고의 깊이는 뻔했다.

회사의 이름만 바꿔 공장 물건처럼 찍어 내는 아파트 광고들. 그 틀에서 벗어나면 죽는 줄로만 아는 구시대적인 사고의 늙은 양반들이 대거 포진한 건설 분야에서 일하며 큰 기대감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꽃, 마음, 아파트를 연결 짓는 모순에 대해선 태욱도 더 이상 참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꼬, 꽃이 싫으시면…….’

외주 기획자가 얼버무리며 답하자 태욱은 다시 번복했다. 아니라며, 그대로 진행하라 이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진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모두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쓴웃음을 짓던 태욱은 노크 소리에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윤창수 변호사였다. 그는 늘 같은 시각 태욱의 집무실로 찾아와 보고를 마치고 사라지는 생활을 8개월째 이어 오고 있었다.

“출장이 취소된 걸 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었다고 해 봐야 10분 정도였다. 하지만 창수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태욱은 그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신뢰했다. 손필성의 옆에서 몇십 년을 버틴 양반이니 단단함이야 테스트해 보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시작하시죠.”

태욱은 그와 일적인 대화 이외엔 어떤 말도 섞지 않았다. 철민처럼 창수의 의중을 떠보려는 생각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제 자신을 믿기에 다른 이의 마음 따윈 궁금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제 자신마저 내려놓은 냉철함이 현재의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든이 넘은 필성조차 끝내 해내지 못한 마음가짐이었다. 그걸 당연하게 감당하는 태욱을 볼 때면 창수는 가슴 한편에 묻어 둔 죄책감에 마음이 끝없이 가라앉기도 했다.

때때로 스스로가 우스워 몸서리쳐질 때도 있었다. 이제 와서 미안함을 가진다는 것부터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걸 선고받은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태욱이 필성을 뛰어넘게 될 것이란 계산이 확실하게 섰을 때부터였나.

인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그의 숨통을 쥐고 조금씩 죽여 나간 이가 아버지 필성이라는 걸 되뇌었지만 죗값의 크기는 점점 커져 가기만 했다. 그게 현실이 되도록 손과 발을 움직였던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의 마지막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도 창수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어떤 크기로 인간을 집어삼키는지.

“변호사님.”

태욱이 그를 바라봤다.

“아, 네.”

정신이 돌아온 듯 창수가 들고 온 서류를 꺼내 놓았다.

이제는 다를 줄 알았다. 또다시 자신의 핏줄을 절벽으로 몰아 무릎 꿇게 하고, 제 허수아비가 되어 살길 바라는 마음이 필성에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고, 실패한 방법이었다. 자식이 죽었고, 그로 인해 모두가 고통받았다.

달라질 줄 알았고, 태욱의 행복 앞에서 이제는 그의 인간됨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창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틀렸다. 충성심이 가져온 수많은 죄들은 더욱 그 크기를 불려 그 당사자와 마주 앉게 했다.

“지유린 씨는 3일 전 입국한 걸로 전달받았습니다. 이건 외국 병원에서 검진받은 임신 확인서입니다. 친자 확인은 이미 들어간 상태고, 그동안 지켜본 바로 특별히 다른 남성을 만난 적이 없으니 손철민 이사의 아이가 확실해 보입니다. 어느 쪽에서 만들어 낸 시나리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두 사람 다 출산을 원한다는 겁니다.”

태욱이 표정 없는 얼굴로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창수는 그가 끝나지 않은 복수심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회장의 자리가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윤서영. 그 여자 때문일까. 모두 지운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남자였다. 손인주의 아들이니까. 어머니를 절로 보내 놓고도 그 여자를 위해서 모든 걸 내려놓았으니. 지독한 사랑을 하는 게 어찌 이리도 닮은 것이냐, 필성이 한탄하며 노여움을 감추지 못할 때 창수는 오히려 감사했다. 태욱이 이제야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

“건양 회장, 약속 잡아 주십시오.”

간단히 지시하며 태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오전 중으로 약혼 기사 나갈 겁니다.”

그가 책상 위의 내선 전화로 홍보실에서 대기 중인 최 팀장을 불러올렸다. 창수는 펼쳐져 있던 서류들을 다시 봉투 안에 담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독한 사랑을 하는 것은 닮았으나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태욱은 인주가 아니었다. 창수는 한 번씩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가 지난 사랑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상태로 사라지고 싶은 건지,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태욱이 아니니, 어쩌면 마지막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 ◆ ○

은림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확인차 연락한 기자들의 문자가 수십 개나 쌓여 있었다. 침대 옆 탁자에서 안경을 가져와 끼고 기사의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관심을 끊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애가 절로 들어간 직후 본가로 들어와 새언니가 쓰던 방을 차지하고 눌러살게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조카 태욱 때문이었다.

필성은 태욱에게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본가로 들어오도록 명령했다. 녀석은 군말 없이 곧장 그다음 날부터 필성의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너무도 간단하고, 당연한 행동 같았다. 은림은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녀석을 무시하려 했지만 정애의 부탁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세 사람이 매일 아침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남편이 죄수복을 입은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귀양살이 보낸 미연은 어이없음에 실소를 터뜨렸고, 필성을 향해 자신의 지분과 역할을 공고히 했다.

미연의 친정은 유신을 흔들 힘 정도는 갖고 있는 기업이었다. 태욱이 필성의 지지를 받아 회장 후보에 오른다고 해도 반대편인 철민 쪽 라인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었다. 진절머리 나는 자리다툼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은림은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회장이 되면 뭐가 좋을까. 돈이라면 지금도 다 쓰고 죽지 못할 정도로 많지 않은가.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욱이 그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이젠 웃으며 축하해 줄 자신이 없었다. 소중한 것을 모두 잃고 얻은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곁에 제대로 된 자식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필성을 지켜봤으면서도, 그 자리가 욕심났던 걸까.

은림은 지금 자신이 태욱의 옆에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 한번 씁쓸한 체념이 들었다. 오늘 아침 터진 녀석의 약혼 기사도 그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도대체 왜 그런대? 갑자기 멀쩡한 나무를…….”

“거슬린다잖아. 그 맘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식당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려던 은림은 주방 쪽에서 수군대는 험담을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멀쩡한 나무를 갈아 치우라고 했나. 필성이 또 고약한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옹심을 부리는 것인가, 싶었다. 그녀가 커피 잔을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 아주머니들이 입을 닫았다.

“왜요? 아버지가 나무 다시 심으래요?”

은림은 주방 유리창을 통해 정원 쪽을 바라봤다. 희태가 가꾼 나무들이 봄기운을 물씬 풍겨 내고 있었다. 이맘때면 이유 없이 설레는 게 저 꽃잎들 때문인 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되었는데, 그것마저 누군가에겐 거슬리는 모습인가 보았다.

“아니, 손 이사님이요.”

조용히 해. 옆의 아주머니가 말리는 소리에 은림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다. 지금 말한 손 이사라면 이 집에 살고 있는 태욱일 것이다.

녀석이 왜. 은림은 다시 정원을 바라봤다. 꽃잎이 흩날리는 게 그리 거슬릴 일인가. 녀석답지 않은 행동에 헛웃음이 흘렀다. 그리고 은림의 생각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작년 봄. 이곳으로 한 여자를 데려왔던 녀석이 문득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