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랑을 모르지 (3)
고급 빌라 앞에 차가 세워지고, 거칠게 문이 열리고 닫혔다. 뒤이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거친 구둣발 소리가 울리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은림은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욱은 현관에 멈춰 선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두 눈 속엔 원망이 가득했다. 녀석을 만나고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생생한 아픔이 담긴 무거운 눈동자였다. 그만큼 마음을 주었다는 것이겠지.
은림은 가슴이 또 한 번 아래로 꺼졌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태욱은 그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저벅저벅 거실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누워 있는 서영의 상태를 확인했다.
‘저…… 술 좀 사 주세요.’
정애에게는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은림은 서영에게 자신이 들은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당사자는 모른 채 흘러가는 이야기. 서영의 상처가 태욱 가족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그땐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은림은 철민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태욱이 서영의 동생 사건을 무기로 이용하려는 손 회장과 거래를 했고, 그로 인해 큰아버지인 인국을 제 손으로 고발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여자 하나 때문에 집안을 말아먹는 놈이 될 것이라는 철민의 말까지는 차마 전할 수 없었다.
서영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은림도 가늠할 수 없어 충고조차 힘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서영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다다랐을 때 뜻밖의 부탁이 흘러나왔다. 은림은 서영을 홀로 두는 것보다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빌라로 데려와 술친구를 해 주었다. 오늘은 이렇게 잊는 게 맞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복잡했던 머리가 단순해질 것이고,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상처 내는 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술이 들어갈수록 서영은 아프게 웃기만 했고,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가방에선 수차례 전화가 울렸다. 직감적으로 태욱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는 걸 눈치챈 은림은 울리는 벨 소리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서영의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태욱이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태욱아.”
태욱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영을 일으켜 자신의 등 뒤에 업었다. 은림은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일지라도.
“어디까지 얘기했어요?”
서영을 업고 선 태욱이 은림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이 그녀를 찌를 듯 날카로웠다.
“너는, 도대체 어쩔 생각이야? 끝까지 서영 씨만 모르게 할 순 없어.”
은림의 말에 태욱이 잠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이 사람을, 어머니한테 보여 준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요? 그거…… 알아요? 고모도, 어머니랑 비슷하다는 거. 다들 멋대로 행동하고, 결정해 놓고, 문제가 생기면 내 핑계를 대면서 날 들러리 만들지. 결국 내 힘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강태욱.”
“그래요. 내가 강태욱인들, 손태욱인들 뭐가 그렇게 중요해. 어차피 꼬여 버린 인생 이렇게 꼬인 채로 살다가 갈 거예요. 근데, 이 여자는 무슨 죄야.”
태욱이 한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냥, 나를…… 날, 자꾸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길래 이용했어. 바보같이 착해서는 나한테 이용당하면서도 나를 위로해. 내가 자꾸 기대고 싶게 만들어. 그래서,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이 뭐가 됐든, 이 여자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는 다시 냉정한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서영을 업은 채 은림의 집을 빠져나갔다.
은림은 스르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삶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부모까지 배신하며 선택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그 녀석에겐 그저 태어난 죄밖에 없었으나 아비를 잃어야 했고, 배신자의 자식이라며 낙인이 찍혀야 했다.
얼마나 억울할까. 그 마음을 알았기에 은림은 철민보다 태욱에게 더 애착이 생겼고, 그가 필성과의 싸움에서 이기길 바랐다.
그를 쥐고 흔들려는 필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 손으로 모든 걸 해내고 이루길. 그를 온전히 행복해지게 만들어 줄 사랑까지도.
하지만 은림은 서영의 울음 같은 웃음이 잊히지 않았다. 정애에게서 보던 모습이었다. 그녀가 오빠 인주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파할 일도, 매일 신에게 기도드릴 일도, 하나뿐인 아들을 떠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 ◆ ○
태욱은 서영을 업고 빌라의 5층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두 사람이 당연하게 공유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원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에 축 늘어진 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버거운 한숨을 내쉬는 여자가 안쓰러워 눈 밑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얼른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후 답답하게 몸을 조이는 옷부터 벗겨 주었다. 그제야 서영은 조금 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욱은 자신의 넥타이도 길게 늘어뜨려 풀어 버렸다. 차올랐던 숨이 조금 안정되자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잠든 서영을 내려다보자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처음부터 이리될 줄 몰랐나. 그녀를 이용했으니,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짐이었고, 그가 유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씌워진 굴레였다.
태욱은 잠든 서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상처가 가슴속에 얼마만큼의 깊이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을 이유로 그를 내려놓을까 봐.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를 절로 들여보내고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 대한 원망과 연민도 마음속에서 쉽게 접고 지워 버렸는데 이 여자가 그의 존재를, 운명을 탓하며 곁에서 사라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끔찍한 지옥이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결국 모두 그를 떠나갔다. 미련도 없었다. 지키는 방법 따윈 모른 채 살았다. 그런 존재가 그에겐 없을 것이라 자만하고 감정의 허세를 부리기만 했다.
“……우윽.”
갑작스레 입을 틀어막고 일어난 서영이 욕실로 직행했다. 놀란 태욱이 따라붙었지만 문은 차갑게 닫혔고, 잠겨 버렸다. 그가 문을 두드릴 새도 없이 서영이 욕실에서 속을 게워 내는 소리가 들렸다. 태욱은 안쓰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문 앞에 정승처럼 서 있었다.
곧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욕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태욱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쾅쾅쾅. 그는 문을 두드렸다.
“윤서영. 괜찮아?”
“…….”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혹시 안에서 쓰러지기도 한 것이면 큰일이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세차게 불렀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비상 키를 찾기 위해 돌아서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서영이 붉게 부은 눈을 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랬어요?”
“…….”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는 믿어 줄까. 이 모든 게 설명될 수 있을까. 태욱은 입을 열어 보았지만 그 어떤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울음을 참아 내는 얼굴로 돌아서는 서영을 보며 그는 어쭙잖은 이유를 갖다 붙인다.
“너 때문 아니야. 날 위해서 그런 거야.”
“…….”
“회장이 되려고 이용한 거야.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떻게 해야 그녀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을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태욱은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서영이 아프지 않기를 원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 그도 알았으나, 온전히 지키겠다는 핑계로 모든 걸 숨겼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곁에만 있어 주길 바랐다. 그런 결정으로 인해 넘치는 미안함은 그녀를 끌어안고 짐승처럼 욕망을 탐하며 지워 내려 했다.
그가 성을 바꾸고, 후계자 수업을 하며, 큰아버지를 고발할 때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길 욕심부렸다. 그녀의 감정과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그것은 끝까지 그녀의 눈가를 붉게 만들었다.
“당신은…… 정말, 내가…… 그 말을 믿었으면 해요?”
고통을 토해 내듯 서영이 되물었다. 그런 그녀를 안아 주려 태욱이 다가섰지만 서영은 냉정하게 뒤로 물러서며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곤 울음을 참아 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가세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머리가…… 복잡해요.”
서영은 다시 욕실 문을 닫았다. 그 앞에 선 태욱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도 문을 열지 않겠지. 좁은 공간 안에서 자신의 화를 표현하는 방법이 그게 전부인 여자였다.
태욱은 조용히 돌아서 서영의 집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탄 후 위쪽을 올려다보자 5층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핸들을 붙잡은 두 손 위로 머리를 내렸다. 잊고 있던 두통이 몰려왔다. 머리를 조우는 고통보다 가슴을 쥐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아 버렸다.
○ ◆ ○
갑작스러운 서영의 휴가는 3일에서 2주로 길어졌다. 핸드폰은 꺼져 있는 상태였으며, 원룸 빌라의 5층에선 그날 이후 불빛이 흘러나온 적이 없었다. 그녀가 잠시 본가로 내려갔다는 것을 지선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에게 전해 주었다.
태욱은 두통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고, 꿈속에서 언제나처럼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그를 걱정하듯 표정이 어두웠다. 태욱은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면 멍하니 앉아 있는 때가 많았다.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큰아버지 인국의 수사는 속도를 붙여 진행되었다. 철민의 외국 지사 발령과 동시에 태욱의 상무이사 승진이 결정되었다. 회사를 쥐락펴락하는 어린놈에게 불쾌함을 표시하는 늙은 임원진들 사이에서 묵묵히 밥을 밀어 넣었다. 필성이 호출하면 새벽이라도 달려갔고, 어머니는 잘 계시니 걱정 말라는 은림의 문자를 받았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의 한 곳만 내려다보다 끝내 집무실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종종 서영의 자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을 때가 있었다. 그가 선물로 사 준 손수건이 책상 위에 버려진 듯 올려져 있는 걸 애써 모른 척했다.
인천 바다를 보고 온 날엔 두통약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다녀와야만 했다. 돌아오는 길엔 꼭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를 샀고, 식탁 위에 던져두었다. 어느 날 식탁 위에 가득 쌓인 호두과자를 보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반병신이 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오피스텔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통 때문에 머리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지만 걸어 나갔다. 문을 열자 서영이 서 있었다. 태욱은 그녀를 잡아 끌어안았다. 서영이 밀어 냈지만 그는 허락할 수 없었다.
“잠깐만. ……살려 줘.”
그가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