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42화 (42/75)
  • 14. 사랑을 모르지 (2)

    서영이 은림을 만나기로 한 장소는 아트센터 1층 카페였다.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왔을 땐 누구인지도 모른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홍보 일의 특성상 모르는 번호로 업무 전화가 걸려 올 때도 있었기에 어떤 번호든 거르지 않고 받는 편이었다.

    ― 저번에 인사했었는데, 태욱이 고모예요.

    은림의 말에 서영은 잠시 그의 본가에서 마주친 그녀를 떠올렸다.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던 걸음걸이. 불안한 눈동자. 그러면서도 선한 웃음이 서영으로 하여금 그녀를 마음대로 동정하게 만들었다.

    전화 통화는 길지 않았다. 내일 아침 스케줄을 함께해 줄 수 있느냐고 은림이 물었다. 무리한 부탁인 줄 알고, 거절해도 좋다며,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그녀가 농담처럼 말했다. 서영은 생각해 보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을 쉬는 주말이라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다. 태욱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곧 마음의 결정을 했고, 다음 날인 오늘 아트센터로 찾아왔다. 로비의 카페에 들어서고 은림에게 간단히 문자를 보냈다. 곧 답장이 날아왔고, 은림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빨리 왔네요.”

    다시 본 은림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센터 관장이란 직책에 걸맞게 지적인 정장 차림이 그녀만의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길게 흩날리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올백으로 말아 올려진 상태로, 작고 이지적인 그녀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우린 오늘도 근무라 복장이 좀 그렇죠?”

    아트센터는 주말이 더 바쁜 곳이었다. 서영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도 평상시 주말 옷차림은 아니었다. 깔끔한 블라우스와 슬랙스로 예의를 갖춰 입었다.

    은림을 보자 생각했던 것만큼 만남이 부담되진 않았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태욱의 고모가 지유린처럼 그녀를 대할 리 없다는 것 정도는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알았다.

    다만, 서영을 보며 짓던 슬픈 웃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태욱에게 여자가 생겨 고모로서 기뻤던 걸까. 어쩌면 술기운 때문에 감성에 젖어 들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갈까요?”

    “아, 네.”

    커피 두 잔을 시켜 받아 든 은림이 길을 안내했다. 서영은 그저 은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남들보다 걸음이 빨랐다. 태욱도 그런 편인데, 이것은 집안의 내력인가.

    그녀는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주차장으로 들어섰고, 고가의 스포츠카 앞에 멈춰 선 은림을 바라봤다. 그녀는 마치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서영이 탈 수 있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타요.”

    “아, 감사합니다.”

    커피까지 받아 든 서영은 은림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내비에 목적지를 입력한 은림은 그제야 서영에게 눈을 맞춘 후 다시 한번 의사를 물었다.

    “지금이라도 부담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가는 길에 서영 씨 집 앞에 세워 줄게요. 그냥…… 서영 씨를 데려가면 언니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멋대로.”

    은림이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서영은 고민할 수가 없었다. 은림의 마음도 알았고, 꼭 한 번은 그의 어머니를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서영이 같이 가겠다는 뜻으로 안전벨트를 매자 은림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웃었다. 서영도 따라 웃게 되는 웃음이었다. 곧 주차장을 빠져나간 은림의 차는 빠른 속도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가야산 어느 절로 향하는 길에서 서영은 태욱의 어머니가 은림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은림은 몇십 년을 알아 온 사람처럼 친근하게 태욱 모자의 사연을 서영에게 찬찬히 들려주었다. 정작 태욱 본인에게도 듣지 못한 사연이었다.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건 서영도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동생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그건,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난 후가 될 것이다.

    상처란 것이 그랬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거겠지. 어쩌면 평생이 지나도 그 아픔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걸 끄집어내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할 자신이 서영에겐 없었다. 태욱도 그런 마음일 테다.

    “나는…… 태욱이처럼, 모든 걸 다 끌어안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 순 없더라고요. 그렇게 태어난 거겠죠. 태욱이는 나랑 다른 성격인 거고. 그렇다고 내가 약하고, 태욱이가 마냥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생각해요.”

    차가 뻥 뚫린 도로를 쉼 없이 달리는 동안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깊어졌다. 은림은 다시 어느 날을 떠올리듯 잠시 말이 없었다. 서영은 그저 그녀의 말을 들어 주기만 했다.

    자신이 해 줄 말은 없었다. 태욱의 상처를 알아 버렸다고 해서 그를 치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오만일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니었고, 그녀는 그가 아니었기에.

    “언니가 절로 들어가겠다고 한 날, 태욱이를 불러서 그놈 탓을 했어요. 다 네 녀석이 회장 자리 앉기 위해서 꾸민 짓이라고.”

    은림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녀는 그런 감정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니 태욱에게 드러냈을 것이다. 반대로 태욱은 그 모진 오해에도 어떤 변명도 없이 지금을 살아 내고 있을 것이고.

    그가 진짜 회장 자리를 원하는 것이라 해도 어느 누구도 말릴 자격은 없었다. 유신건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할 사람은 태욱일지도 몰랐다. 그가 지금까지 그걸 증명했고, 앞으로도 보여 줄 가능성이 제일 컸다.

    “……나도 알아요. 언니 혼자 결정했다는 거. 아버지가…… 그런 조건으로 처음부터 언니를 받아들인 거겠죠. 그저 30년 같이 산 세월에 미련을 가지는 건 나뿐일 테고.”

    잠시 쉬어 가기 위해 휴게소로 들어선 은림은 차를 세우고 서영을 바라봤다.

    “그래도…… 나는, 내 욕심에, 태욱이가 제 엄마를 지켰으면 했어요. 아무리 새언니 혼자 결정한 일이라고 해도, 아버지 앞에 달려가서 말이라도 한 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기라도 했으면…… 그 녀석이, 이만큼 밉지 않았을 거예요.”

    그날, 태욱은 서영이 그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아팠다. 어머니에게 가진 죄책감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어머니를 위한 일인지.

    은림의 말처럼 그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빌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렇게 말없이 모든 결정을 끝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서영은 태욱의 복잡한 얼굴만이 그려질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 태욱이 곁에 서영 씨가 있으니 언니가 편하게 떠났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언니랑 서영 씨를 만나게 해 주고 싶은 걸지도 몰라요. 뭐, 이것도 내 오지랖이지만.”

    은림이 멋쩍게 웃었다. 그저 술에 취해 건넨 무례한 고백으로 시작된 그들의 연극 놀이가 이렇게 주변인들에게까지 큰 믿음으로 다가가게 될 줄은 몰랐다. 서영이 처음부터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가족을 속이기 위해 시작한 가벼운 만남이었고, 그의 어머니까지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지금은 어떨까. 그 만남이 진짜 사랑으로 변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됨은 확실한가. 태욱은 몰라도 서영은 그랬다. 그로 인해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상처가 그녀의 일처럼 아팠다.

    “내 뻘소린 여기까지. 우리, 잠깐 쉬었다 가요.”

    은림이 먼저 차에서 내려 큰 기지개를 켰다. 서영도 따라 내려 바깥 공기를 마셨다. 여름이 절정이었지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시원한 자연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은림은 곧장 화장실부터 가야겠다며 휴게소 안쪽으로 뛰어갔고, 서영은 그녀를 위해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매점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것저것 주워 담고 사다 보니 봉지가 두 손 가득이었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식탐을 탓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코너 한쪽의 호두과자가 눈에 들어왔다. 꼭 천안이 아니라도 어느 휴게소에서나 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음식이었는데. 서영에게선 소리 없는 웃음이 샜다. 그리고 태욱이 보고 싶었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두 손에 든 봉지를 내려놓고 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태욱의 번호를 찾았다. 망설이긴 했지만 주말이라는 걸 핑계 삼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도 가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언제 나 찾나 싶었는데.

    “아, 내 전화 기다렸어요?”

    서영이 미안한 웃음을 흘렸다. 하루의 루틴이 되어 버린 모닝콜 이후 그가 바쁠까 봐 일부러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게 어쩌면 태욱에겐 서운한 행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말인데 왜 일만 하냐고, 잔소리도 좀 하고 그래. 그래야 내가…… 여길 벗어나지.

    그저 웃음만 났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서영은 행복했다.

    ― 어디야?

    “아, 여기…….”

    서영은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곧 은림과 약속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의 여행은 태욱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괜히 나선다고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이 화해를 한 것이 아니니 이해를 해 달라고 했다. 서영은 꼭 그의 친누나처럼 태욱을 대하는 은림이 고마워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주 좋은 곳.”

    서영의 대답에 태욱의 웃음이 넘어왔다.

    ― 거길 혼자 갔단 말이지?

    “대신, 팀장님 생각 많이 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생각나서 내가 먼저 전화했잖아. 전화는 자주 못 해도 하루 종일 당신 생각만 한다는 거 알아주세요.”

    ― 당신……이란 말 좋네.

    태욱이 다정하게 읊조렸다.

    “알았어요. 앞으로 많이 해 줄게요. 그럼, 일해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서영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은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얼른 간식 봉투를 집어 들고 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멀리 차 밖에 서서 전화 통화를 하는 은림이 보였다. 업무 전화일까 봐 서영은 걸음걸이를 늦췄다. 점점 다가갈수록 은림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곧 그녀에게서 화가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걸, 태욱이가 다 터뜨렸단 소리야?”

    은림의 입에서 태욱의 이름이 나오자 서영은 당황스러웠다. 곧 그녀의 핸드폰에도 문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리가 난 곳은 사내 채팅방이었다. 빠르게 넘어가는 말들 사이에 첨부된 기사 링크를 누르자 ‘손인국 사장, 공금 횡령, 팀장 고발’이란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서영 씨 이름이 왜 나와? ……뭐? 동생 사고라는 게…….”

    은림은 자신의 귀로 듣고도 말이 이해되지 않아 돌아섰다. 그다음 철민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보다 먼저 모든 걸 눈치챈 서영의 무거운 눈빛만 마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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