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랑을 모르지 (1)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태욱을 이젠 ‘강 팀장’이 아닌 ‘손 팀장’으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가 어마어마한 유신의 주식을 증여받았다는 게 밝혀지며 그 소문이 사실이란 걸 증명해 주었다.
어떤 이는 당연하게 예상했던 것이 아니냐며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손철민 이사에게 줄을 섰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태욱을 피해 돌아다녔다.
태욱의 이야기는 탕비실, 구내식당, 흡연실, 어느 곳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선 핫이슈가 되어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무실에서 업무를 볼 뿐이었다. 유신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른 그가 회장 자리에 앉는다 해도 여전히 이 모습일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흔들림 없는 태욱의 모습을 보며, 그가 유신을 이끄는 게 가장 안전하고 믿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듯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목소리가 커질수록 손철민 이사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급작스레 잡힌 외국 출장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것도 여론 몰이에 한몫을 했다. 그를 출장 보낸 사람은 손필성 회장이었다. 어쩌면 철민은 후계자의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 버린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남 일이라고 아주 소설을 쓰는구나.”
지선은 쯧쯧 혀를 차며 서영과 함께 회사 근처 커피 전문점을 빠져나왔다. 에어컨 존을 잠시만 벗어나도 헉, 하고 숨이 막히는 폭염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여름이 예전보다 그다지 덥지 않을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모두 그렇지 않을까. 아이스커피를 손에 든 채 서영은 생각했다. 태욱이 하루아침에 ‘손태욱’이 되었고, 자고 일어나면 회장 자리에 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소설이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서영이 그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버텨 낼 수 없는 업무량이었다. 현재 맡고 있는 팀장 업무와 후계자 수업을 병행하는 건 태욱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녹초가 된 몸으로,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그는 그녀의 집으로 걸어 들어와 서영을 안았다. 그것만이 지금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약이라는 것처럼 끝없이 몸을 탐하고 쓰러지듯 그녀의 곁에서 잠들었다. 그의 알 수 없는 불안을 읽었지만 그녀는 묻지 못했다. 사랑은 두려움을 아주 많이 동반한 감정이란 걸 요즘에서야 깨닫는 중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는 귀담아듣지 말고.”
지선이 서영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두드렸다. 태욱의 상황이 급변할수록 덩달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서영의 자리였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인 것을 안 몇몇 여직원들이 아부성 멘트를 꺼내는 척하며 곧 닥칠 서영의 앞날을 제멋대로 걱정하기도 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던 서영은 웃어넘겼지만 지선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인 훈재를 닦달해 들은 뒷이야기가 있으니 더 그럴지도 몰랐다. 누구든, 서영이 좋다면 그만이었지만, 요즘 들어 태욱을 볼 때면 그가 가진 삶의 무게가 주변인들을 버겁게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훈재에게 전해 들은 바로 태욱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가야산 어느 절로 몸을 숨겼다고 했다. 어머니를 보내 놓고도 태욱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볼 땐 흔들림조차 없었다.
서영을 만나면서 조금은 사람 냄새가 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으나 강태욱은 강태욱이었다. 아니, 이제 손태욱이 된 그는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가는, 그녀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라는 것을 더욱 확연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전…… 잠깐, 나무 아래서 마시다가 갈게요. 대리님 먼저 들어가세요.”
서영의 말에 지선이 뜨거운 햇볕을 올려다봤다.
“이 더운데?”
“괜찮아요, 전.”
서영이 짧게 웃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지선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금 마음이 젤 복잡한 사람은 그녀일 것이다. 태욱의 변화로 유신의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녀가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선이 더위를 피해 재빠른 걸음으로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영은 작은 공원으로 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가 해를 가려 주긴 했지만 더운 날씨 탓에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출장을 다녀온 태욱이 커플 손수건이라며 선물로 준 것이었다. 서영은 그때가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났다. 툭, 선물 봉투를 무심하게 내밀던 남자. 여자 선물은 처음이라 뭘 골라야 할지 몰라 종업원의 조언을 들었다는 덧붙임. 손수건을 볼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자는 달콤한 말.
그래. 그것이면 되었다. 태욱은 여전히 그였다. 서영은 모든 잡생각을 지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봤다.
○ ◆ ○
점심시간, 신사업 팀은 한산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젠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태욱은 필성의 전담 변호사인 윤창수와 집무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지사들을 돌며 현재의 운영 상태를 파악하느라 점심은 건너뛰었다. 그런데도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필성의 계획표대로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시간을 아껴야 했다. 태욱은 쓴 속을 달래기 위해 연거푸 생수를 들이켰다.
“식사는 제때 하십니까?”
아버지뻘인 창수가 딱한 얼굴로 물었다. 태욱은 가벼운 질문에 답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가 가져온 서류부터 확인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허탈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큰아버지 인국이 제대로 장남 노릇을 못 하게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가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알았다. 또한 그 덕분에 태욱의 노력이 필성의 눈에 든 것일지도 몰랐다.
인국이 회장이 되었더라면 철민에게 온전히 넘어갈 자리였다. 탐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호랑이 새끼가 배신이라는 칼날로 온 집안을 뒤집어엎어야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한 필성의 의도에 또 한 번 섬뜩함을 느껴야 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은 동생의 자식, 그러니까 조카인 자신이 큰아버지의 비리를 만천하에 공개해 죗값을 치르게 만드는 스토리. 이슈가 될 것은 확실했고, 그가 회장 자리에 올라서게 할 가장 유의미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태욱이 어떤 인간으로 비칠지 뻔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선 천륜도 저버리는 배신자. 사촌 형 철민의 등에 칼을 꽂고 회장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에게 진정 자격이 있는가, 하는 꼬리표가 따라붙겠지. 어떤 말들이 나돌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태욱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기사는 언제 나갑니까?”
자료를 내려놓은 태욱이 창수를 바라봤다.
“내일 아침이면 퍼지도록 작업했습니다. 곧바로 검찰 조사가 들어갈 거고, 증거들은 확실하니 빠르게 처리되겠죠. 손인국 사장도…… 부인하지는 않을 겁니다.”
태욱이 등장한 이후부터 인국은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까. 그는 늘 먼발치에서 동생의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직접적인 미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히 보듬어 주지도 않았다. 술에 취해 있을 땐 꼭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귀신을 마주한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까지 하면 태욱은 그날 꼭 아버지 꿈을 꾸었다. 비록 꿈속일지라도 아버지가 괜찮다며 안아 주면 태욱은 잠에서 깰 수 있었다.
“그리고…….”
창수가 다른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예상은 했던 인물이나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태욱은 블라인드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직원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서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 공간에 들어와 처음으로 리모컨을 눌러 블라인드를 가림으로 바꿨다.
“무슨 일이시죠?”
태욱이 날카롭게 철민을 올려다봤다.
“하. 무슨 일? 너 같은 새끼는…….”
철민이 평소의 여유 따윈 잊은 채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갈며 태욱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조용히 서류 파일을 들고 일어서는 창수를 발견하고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한테 붙으셨네요. 이것도 회장님에 대한 충성입니까? 아니면, 이 잔인한 새끼한테 붙어야 본인은 당하지 않을 것 같으셨어요? 이햐아, 정말 강태욱이 무서워서 살겠나. 아, 이젠 손태욱인가.”
“수고하셨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욱은 철민의 조롱 따윈 개의치 않고 창수에게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창수는 그저 두 사람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공간 안에는 이제 둘뿐이었다. 태욱이 시선을 들어 철민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러길래……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십니까?”
태욱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철민의 모든 걸 꿰뚫어 보듯 직설적이면서도, 사나운 칼날을 가까스로 감춘 눈빛이었다.
철민은 그저 하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우 같은 새끼. 영리하게도 그보다 한발 앞서는 데는 도가 튼 놈이었다. 모두 다 준비되어 있었다. 날이 밝으면 그가 이길 싸움이었다. 그 짧은 기다림을 파고들어 뒤통수를 때리듯 그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휘둘러. 영감이 널 선택했다면 내가 진 싸움이지. 지금이라도 네 앞에 무릎 꿇으면 작은 자리 하나 정도는 남겨 줄 생각이 있어? 아, 이것도……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가?”
철민이 돌아가는 판을 모두 알고 비웃었다.
“그렇게 손발이 잘린 채로 살아. 그게 나보다 나은 인생인지 지켜보자고.”
돌아 나가려던 철민은 문을 붙잡고 잊은 말이 있다는 듯 태욱을 바라봤다.
“그리고…… 영감을 너무 믿지 마. 이건 진짜 충고야.”
문이 열리고 닫혔다. 태욱은 무거운 눈을 감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자 이번엔 그에게서 실성한 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