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9화 (39/75)

13. 최선이라는 것처럼 (1)

꿈에 나타나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태욱이 기억하는 일곱 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의 태욱처럼 젊고 눈빛이 또렷했다. 항상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놓았다는 게 믿기 힘들 만큼 태욱에게 찾아오는 아버지는 미워할 수조차 없도록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위로를 받았을까. 그 꿈으로라도 죄책감을 덜었나. 태욱은 꿈에 아버지가 나타난 날이면 어떤 일이든 잘 풀렸다. 미신이라 해도 믿게 될 만큼 꿈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꿈을 꾸지 않은 채 잠자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어머니가 좋아할 일이었다. 언제나 그가 제대로 잠들길 바라셨으니까. 그렇다고 어머니가 꿈에 나온 적은 없었다.

꿈에서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태욱은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오피스텔 침실이었고, 사위는 아직 어두웠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해가 뜨기 직전이라는 걸 창문으로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윗도리를 찾아 걸치고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 6통. 모두 고모 은림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 태욱은 화면을 클릭해 전화가 들어온 시간을 체크했다. 새벽 3시부터 10분 간격이었다. 그가 잠든 게 2시쯤이었으니 진동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난 것과 은림의 전화가 연관이 있는 걸까. 태욱은 얼굴을 쓸어 올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은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로움에 자주 술을 먹고 그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태욱은 꿈을 꾸느라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돌아서 걷는 순간, 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태욱은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봤다.

본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언제나처럼 박 비서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그를 안타까워하듯 바라보는 눈빛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희태를 무시하듯 지나쳐 빠르게 본가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선 은림이 초조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들 뭐가 달라질까. 태욱은 이곳으로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체념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반드시 모두가 잠든 새벽이어야만 한다는 듯, 어둠 속에서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짐을 싸는 어머니를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먼저 떠나보낸 아들의 여자를 꼭 쫓아내야만 하는 고집스러운 늙은 노인도 진절머리가 날 뿐이었다.

“태욱아.”

은림은 이곳에서 잠든 듯 로브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겁을 집어먹은 듯 창백한 상태였다. 은림에게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태욱도 잘 알고 있었다.

정애가 아니었다면 은림이 이 정도도 버티지 못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늘 불안해했고, 그런 감정을 태욱에게 숨기지 못했다. 어머니 정애한테 일이 생기면 네가 꼭 나서야 한다고. 마치 살려 달라는 애원처럼 그를 붙잡고 주사를 부릴 때면 그런 불안함마저 사라진 자신이 쓸쓸해져 오히려 은림이 부럽기도 했다.

“어디…… 계세요?”

태욱은 담담하게 물었다. 은림은 고개를 들어 위층에 자리한 정애의 방을 가리켰다. 자신은 들어가 말리는 것조차 할 수가 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떨리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손필성의 피를 받고 태어난 여자가 어찌 이리 나약할 수 있을까. 태욱은 언젠가 은림을 보며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필성이 낳은 자식들 모두 제대로 삶을 이어 가지 못한 채 그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댔다.

누구의 잘못이다,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세상에 태어나는 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태욱 역시 그랬고, 그와 은림이 다르다고 할 순 없었다.

그저 강한 모습으로 나를 더욱 감추고 방어할 뿐이었다. 강함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것은 태욱이 서영을 만나 깨달은 여러 감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방 앞에 서고, 문을 두드렸다. 곧 대답이 들려오고 태욱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정애는 밝은 얼굴로 태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이 보이는 테라스 옆이 그녀의 지정석이었다. 작은 콘솔 의자에 앉아 있는 정애의 차림이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것처럼 그녀의 모습은 낡고 초라해 보였다.

그녀의 발치에 작은 가방이 단출하게 놓여 있는 걸 보자 태욱은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태욱아…….”

어머니의 부름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가세요. 태워 드릴게요.”

그곳이 어디든, 그것까지는 그가 하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묻지 않았고, 답하는 것을 잊었다. 드러내 놓고 마음을 표현하면 결국 상처를 건드려 두 사람 모두 힘들어할 것이 뻔했기에. 모르는 척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지금을 살아 내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셈하는 대신 모두가 같은 시간을 견딘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정말 시간이 지나자 아픔의 흔적은 엷어지기도 했다.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태욱은 꿈에서나마 아버지를 만났고, 정애는 염불을 외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대로가 최선인 줄 알고 살아왔다. 그 아슬아슬한 평화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두 사람은 어떤 해명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정애는 아들을 따라 방을 벗어났다. 몇십 년을 살았던 공간이지만 돌아볼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홀가분했다. 다만 태욱이 가방을 든 채 내려오는 걸 보고 놀라 달려오는 은림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허나 그것 역시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었다.

“언니! 정말 이럴 거예요? 강태욱, 너까지 왜 이래!”

은림은 태욱을 바라보며 화를 냈다. 떠나려는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아 앉히려고 불렀더니 오히려 더 나서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정애의 가방을 태욱에게서 빼앗아 갔다. 눈물이 그 가방 위로 뚝뚝, 서럽게 떨어져 내렸다.

“언니는…… 아버지랑 약속한 것만 중요해요? 그래요. 좋아요. 이해해요. 인주 오빠가 받아야 할 몫, 태욱이 앞으로 남기고 이 녀석 손씨 만들어 주고 싶은 맘 충분히 안다고요. 근데 언니가 왜 떠나요? 왜 다 버리고 떠나는 게 그 조건으로 붙냐고요!”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난 은림이 이번엔 태욱을 노려봤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네 엄마한테 이러라고 시켰어? 그렇게, 저 영감 자리가 갖고 싶어? 그래, 너도 똑같아! 아버지랑 다 한통속이야!”

은림은 다시 가방을 태욱에게 던지듯 건네며 집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리 큰 소란을 피웠으니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들이 분명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 소식은 곧장 어디로든 흘러가겠지. 철민에게까지 들어간다면 한바탕 큰 전쟁이 치러질지도 몰랐다.

태욱은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방을 다시 잡아 들고선 현관을 빠져나왔다. 정원 가운데 두 사람을 기다리듯 서 있던 희태가 얼른 뛰어와 가방을 받아 가려 하자, 태욱은 거부하지 않고 건네주었다.

“타세요.”

주차장에 당도하자 희태는 이미 뒷좌석 문을 열고 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태욱이 정애에게 눈짓으로 안내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정애는 문을 붙잡은 채 서 있는 희태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자 희태는 고개를 숙인 뒤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차에 오른 정애가 문을 닫은 후에도 그는 뒤돌아서지 않았다. 차를 출발시킨 태욱이 백미러를 바라보자 그 속에 비춰진 남자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떠나는 길, 두 사람은 울어 준 것 같아 태욱은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꼭…… 설명해야 할까요?’ 되물을 것만 같은 서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욱은 잠깐이라도 가슴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머니가 지내려는 곳은 가야산 자락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비구니들의 수행처라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는 또 끊어졌다. 정애는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선 이후부터 잠에 빠져들었다.

어젯밤 어머니는 고모 은림을 불러 잠도 잊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 끝의 고백이 떠남이라는 것을 은림은 몰랐을 테고. 누가 나쁜가. 그것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태욱은 아버지를 잃은 이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영을 지키기 위해선 다른 누군가의 목줄을 쥐어야 하는 운명이었고, 어쩌면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본인이 가져야 할 것을 전부 내려놓았다. 자신이 낳은 아들까지도.

어쩌면 은림의 말처럼 지금의 태욱이 이런 정애를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놓았던 것을 가지기 위해서 그가 미친 말처럼 달리고 있을 때 정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그저 자신이 사랑한 두 남자를 위해서 살아왔을 뿐인데. 그것이 마치 죄인 것처럼 가장 고통받고 물러나게 된 것은 그녀가 되었다.

“……도착했어요.”

새벽을 달리자 아침이 찾아왔고, 산 아래 풍경처럼 자리한 암자가 나타났다. 태욱이 깨우기 전에 정애는 일어나 있었다. 고생했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선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태욱은 따라 내려 그녀가 쥐고 있는 가방을 다시 가져갔다.

차가 오르지 못하는 입구까지만. 그렇게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절로 향하는 흙길을 걸었다. 자연의 고요함만이 두 사람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다. 곧 불상이 가까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둘은 마주 섰고, 태욱이 가방을 내밀었다.

“건강히…… 지내세요.”

아들의 말에 정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이면 됐다며 돌아섰다.

정애는 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태욱은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올라온 흙길을 내려갔다.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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